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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은 어떻게 일터를 지배하는가



책/학술

    괴롭힘은 어떻게 일터를 지배하는가

    신간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기업의 부당 해고, 성폭력, 노동 재해를 주로 다뤄온 공익인권변호사단체 '희망을 만드는법'은 노동 현장에서 미묘한 괴롭힘 문제가 심각함을 발견하고, 이에 대응할 필요성을 공유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인권활동가, 변호사, 노무사 등이 모여 일터괴롭힘 공부 모임을 열었다. 국제기구의 관련 문서, 해외의 입법 사례, 출간물 등을 연구했고,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면담했다. 또 토론회와 공청회를 열어 노조, 청년 단체, 여성 단체, 법률가 등의 자문을 구했다.

    신간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은 이 연구 모임을 이끈 인권활동가 류은숙, 변호사 서선영· 이종희 등 세 사람이 그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름부터 정확하게 붙이자고 제안한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이름은 ‘일터괴롭힘(workplace harassment)’이다. 일과 관련된 시간과 공간,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사무실이 아니라 회식 장소에서, 업무 시간이 아닌 주말이나 휴가 중에, 고용주나 상사가 아니라 고객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또 장시간 노동, 고용 불안, 자영업 증가 등 한국사회 노동의 특징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일터괴롭힘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이 시간, 장소, 관계에서 발생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원치 않으리라고 간주되는 위해적인 행위’, 즉 괴롭힘이 일터괴롭힘이다.

    일터괴롭힘은 주로 권력이 불균형한 관계에서 반복적이고 주기적이고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점차 고조되는 특성이 있다. 또 일터괴롭힘은 조직적이냐 개인적이냐, 일과 연관성이 있느냐, 물리적이냐 정신적이냐, 직접적이냐 은밀하냐에 따라 유형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들이 직접 면담하고 조사한 사례를 중심으로 일터괴롭힘의 유형과 사례를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책은 일터에서 자신이 겪었거나 가담했거나 목격한 행위가 괴롭힘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은 일터괴롭힘의 개념 정의, 유형 분류는 물론이고 피해자에게 끼치는 영향, 노동을 지배하는 감정까지 포괄적으로 담았다.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을 둘러싼 감정은 모욕, 수치심, 혐오, 분노, 자책감이다. 그중 혐오를 보자. 일터괴롭힘은 강자로부터 받는 모욕을 약자에게 분풀이로 분출하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폭력인 경우가 많다. 혐오는 자기 가치를 주장하려고 자기보다 약자인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감정이자 행위다. 혐오의 표적은 흔히 성, 인종, 계급 등 어떤 범주로 작동해왔다. 일터괴롭힘에서 약자는 ‘일 못하는 사람’이다. 일 못하는 사람은 불쾌하고 일터에서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이다. 피해자가 일을 잘하건 못하건 ‘일 못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작동한다. 이렇듯 혐오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현실적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누군가의 노동을 폄하하고 가치 없는 일로 취급함으로써 마땅한 대가를 갈취하는 일을 정당화한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실질적인 차별과 괴롭힘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일터괴롭힘은 저성과자 해고, 불안정 고용, 열정 페이, 감정노동 등의 중핵일 뿐 아니라, 그에 맞설 사회적 결합을 생성하고 유지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일터괴롭힘은 한가한 주제가 아니라 시급히 이야기해야 할 주제라고 말한다.

    한국에는 아직 일터괴롭힘을 규제할 법규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적인 절차를 밟을 수는 없다. 다만 현재 제정된 다른 법률로 구제 받을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이 책은 현재의 노동법이 어떻게 노동자를 보호하고 혹은 보호하지 못하는지,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에서는 일터괴롭힘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일터괴롭힘을 겪었다면 현행 법제도 안에서 어떤 절차를 거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지 상세하게 제시해 실용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증거를 수집하는 방법에는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록하는지에 따라 ‘증거물’로서 어떤 효력이 있는지, 시말서 같은 공식 문서를 남겨야 할 때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 자칫 잘못 녹음 등을 했을 때 민형사상으로 어떤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있는지 등 법률적인 조언까지 함께 담았다.

    책 속으로

    모욕, 혐오, 수치심 등 마이너스 감정들은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감정(emotion)에는 이미 운동(motion)이란 말이 포함돼 있다. 감정은 행위하는 것이다. 눌린 것은 어딘가로 분출되게 되어 있다. 운동하는 감정은 몸과 정신 모두에 작용한다. 앞에서 살펴봤듯 괴롭힘 피해자가 겪는 고통 중 대표적인 증상이 심신증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몸에 각인된다는 말이다. 133쪽

    많은 피해자가 자기에게 이런 고통이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고통의 장본인이 나라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패배자고 저성과자고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꼴이라고 여기기 쉽다. 이런 나약한 자기선언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절대 이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남에게 알려지게 해서도 안 된다. 이해할 수 없기에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기에 숨기려 든다. 그러나 그런다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148쪽

    상대방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거리낌 없이 뭐든 할 수 있다. 거침없이 막 나갈 수 있다고 느낄수록, 순응이 속 편하고 알아서 기어야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인격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인격 제거라는 한 뿌리에서 길러진다. 일터괴롭힘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런 존엄성의 모독을 노력과 성과에 따른 합리적인 대우로 탈바꿈시키고 내면화한다. 162쪽

    ‘자전거 타기 반응(bicycling reaction)’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자세처럼, 서열 체계가 강고한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윗사람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아랫사람은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구조를 묘사한 말이다. 권력 관계에서 강자에게는 대들 수 없으니 약자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뭉개진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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