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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 50주년’ 맞는 중국은 지금…



아시아/호주

    ‘文革 50주년’ 맞는 중국은 지금…

    • 2016-05-15 20:38

     

    정확히 반세기 전인 1966년 5월 16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에서는 역사적인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개막 13일째인 이날 회의는 당 주석인 마오쩌둥(毛澤東)이 베이징 밖에 나가 있어서 권력서열 2위였던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이 주재했다.

    당 중앙정치국은 이 회의를 통해 이른바 '5·16 통지'를 채택, 전 당에 시달함으로써 '무산계급(無産階級) 문화대혁명'의 전면적 개시를 선언했다.

    낡은 사상과 문화 등을 가진 부르주아계급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가진 무산계급을 압박한다는 좌경적 관점에서 출발했던 문혁은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으로 극찬받기도 했다.

    하지만 문혁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권력쟁탈 운동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50주년에도 ‘문화대혁명’은 여전히 금기어

    약 10년 동안 중국 전역을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사건인 ‘문화대혁명’이 공산당 공식 문서로 등장한 지 50주년을 맞았지만 대륙은 잠잠하기만 하다.

    일부 온라인 매체 등에서는 ‘문혁 당시 목숨을 잃은 유명인사들’을 재차 소개하며 안타까운 역사를 다시 조명하기도 했지만 국가 차원의 행사는커녕 지도자들의 언급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상흔이 깊은 탓인지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논의를 사실상 금기시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관영 매체들 역시 조용하다.

    문혁 기간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문혁소조 조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치번위(戚本禹)가 지난달 20일 사망하며 중국은 문혁 결산의 계기를 맞았지만, 그 뿐이었다.

    오히려 문혁 흔적 지우기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처음이자 유일한 문혁 박물관으로 알려진 중국 광둥(廣東)성 산터우(汕斗)시에 있는 문혁박물관의 문혁 관련 문구 등이 최근 지워지거나 공산당에 대한 충성 구호로 변경됐다고 홍콩 명보(明報)는 전했다.

    문혁의 총책임자인 마오쩌둥은 여전히 신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톈안먼광장에 버티고 서 있으며 농민을 혁명기반으로 둔 마오쩌둥 사상은 지금도 중국의 진로를 가늠하는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

    ◇ 문혁 부인은 마오쩌둥 부인, 내부의 오류 들춰내기 싫은 중국 지도부

    중국 당국이 문혁 논의를 회피하는 것은 중국의 사상적 구심점인 마오쩌둥을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데서 오는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마오쩌둥 사상을 부인할 경우 자칫 국가의 지도이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다.

    문혁에 대한 철저한 외면은 또 내부적으로 극명하게 의견이 갈리며 사회 대립 혹은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일제 침략과 같은 ‘외부’에 의한 고난이 아니라 내부 스스로 초래한 고난이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10년간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 혁명’은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를 꿈꾼 마오쩌둥 주도로 진행된 대규모 사상ㆍ정치ㆍ계급 투쟁이다.

    낡은 사상과 문화를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을 타파한다는 좌경적 관점에서 출발, 만민평등과 조직 타파를 부르짖으며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기간 중고생들과 대학생들이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낡은 문화를 일소한다며 대중 정치운동 조직에 동원됐다.

    홍위병들은 ‘부르주아적 낡은 질서’라고 지목된 학자 및 전문가, 문화 예술인, 지주 출신 및 자본가 등을 닥치는 대로 공격했으며 책과 문화재 등을 파괴했다.

    홍콩 배우 고 장국영의 열연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패왕별희(1993년)도 당시 문화혁명의 척결 대상이었던 경극의 몰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문혁의 주축인 홍위병들에 대해 “나를 실망시켰다”며 무력 진압에 나섰고, 홍위병도 내부 조직 약화 등으로 점차 소멸됐다.

    중국 공산당도 “문혁은 ‘마오(毛)의 과오’로 시작됐고 린뱌오(林彪)와 4인방(四人幇) 등 반혁명 집단에 이용당해 중화 민족에 심각한 재난을 가져 온 정치 운동”으로 규정했다.

    문혁 주인공들의 말로도 비참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린뱌오는 ‘대약진 운동’을 지지하면서 중국 정치 전면에 등장했지만, 이후 마오쩌둥의 견제로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됐고 위기에 몰렸다.

    1971년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소련 망명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몽골 지역에서 추락사 했다. 일각에서는 미사일 격추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을 비롯해 왕훙원(王洪文), 장춘자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문혁 기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도 마오쩌둥 사망 후 한달 만에 쿠데타 음모 혐의로 모두 체포돼 사형, 종신형 등을 선고 받고 자살하거나 병사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정부당국은 당시 혼란상에서 정확한 기록이 불가능했다며 정확한 피해자 통계를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50만∼200만명이 탄압을 받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 ‘문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하지만 문혁은 발발 50년, 종결 4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중국내 일각에서는 문혁 재현 움직임도 일고 있다. 홍위병 정신을 이어받은 좌파 인사들이 중국 공산당의 핵심 요직에 포진해 있고 활발한 인터넷 매체 활동을 통해 좌파 이념을 전파하려는 시도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의 관제 걸그룹의 공연에서 마오쩌둥의 얼굴을 배경으로 문혁 당시 혁명가를 합창한 것을 두고 중국이 문혁의 재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시 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풍조가 확산되고 언론·사상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는 것 역시 문혁 재현에 대한 우려를 사고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문혁 반성론과는 별개로 문혁의 성과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문혁 시기에 중국이 인공위성을 쏴 올리고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는 등 성과를 거둔 것도 함께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주석이 문혁을 '10년 동란'으로 지칭하면서 지도사상의 좌경화를 경고한 사실을 인민일보가 뒤늦게 공개하면서 문혁 재평가론에 쐐기를 박고 나섰지만 이런 움직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회에 계층간 갈등과 빈부격차가 심각해지면서 문혁 시기를 그리워하는 풍조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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