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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직설 무령왕릉: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책/학술

    [새책]'직설 무령왕릉: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직설 무령왕릉: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는 무령왕릉 발굴의 실상을 밝혀내고, 민족주체성이라는 미명하에 감춰진 진실을 들춰낸다. 아울러 일본학계에 끌려가는 우리 학계의 문제점, 고고학 발굴을 정지척 역학관계에서 읽으려 했던 사실 등을 직설적으로 토로한다.

    17년간 문화재·학술 전문기자로 일한 저자 김태식은 1971년 무령왕릉 당시 발굴단과 정부 관계자, 언론 보도, 그리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실로 광범위하게 채집, 비교하면서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명쾌하게 해명한다.

    저자는 무령왕릉 발굴이 이후 유신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으로 치밀하게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무령왕릉 발굴이 이뤄진 1971년 그해 박정희 정부가 경주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이 계획은 보문관광단지 개발과 신라시대 유적 발굴 홍보 전시를 양대 축으로 삼는다. 무령왕릉 발굴이 끝난 직후 조사단장은 문화공보부 차관에게 불려가, 문공부 차관으로부터 “텔레비전을 동원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무령왕릉 발굴 이후 전개된 고고학 발굴현장에서는 ‘대한뉴스’를 필두로 하는 영상매체와 고고학 발굴이 본격적으로 결탁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 성과는 치밀한 각본에 따라 영상매체를 타고 시기각각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저자는 무령왕릉을 누가 축조했는가에 대해서는 인접해 있는 똑같은 양식의 벽돌고분인 송산리 6호분 출토 명문 전돌 분석을 통해 중국 기술자가 설계와 공사 전반을 지도했음을 확정했다.

    이 책 1부에서는 일제 강점기 교사 가루베 지온이 공주의 백제 무덤들을 도굴한 이야기부터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졸속 발굴, 유신 검열에 걸려 발굴보고서를 다시 찍고, 일본판 보고서에 이어 단행본 '무령왕릉'이 일본에서 나온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2부에서는 묘지 매입을 보여주는 묘권의 비밀을 밝힌다. 그리고 전방후원형 고분, 금송, 목간 등이 말해주는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 무덤의 주체성과 사대성 등을 살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팔찌를 휘었다 폈다 한 박정희, 무덤 바닥을 꽃삽으로 긁어 담은 발굴단 등 에피소드가 재미나게 읽히는 가운데 권력과 고고학, 역사학의 관계를 곱씹어보게 한다.

    본문 중에서

    p. 210 무령왕릉이 ‘중국제’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전축분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중국 수입품이 확실한 청자와 청동거울을 비롯한 많은 유물, 나아가 왜(倭)에서 가져온 관재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외래적인 특성이 두드러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백제 고유의 토기와 말갖춤이 1점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p. 214 박정희를 바라보고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운운하는 대목에서 아부가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유물을 쥐락펴락하는 박정희는 전근대 왕조의 제왕을 연상케 한다.

    p. 241 무령왕릉의 경우 관련 정보를 일본에 다 퍼다 주는 바람에 이후 이 분야 연구를 일본이 주도하고 국내 학계가 꽁무니를 따라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p. 285 중국인이 와서 무덤을 설계하고 배치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백제 무덤은 거의 예외 없이 북침인데 어찌하여 유독 무령왕 부부만 남침이란 말인가?

    p. 337-338 상층 고급문화가 대체로 백제에서 왜로 흐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백제가 왜에 일방적으로 퍼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화 교류에 대한 반대급부로 왜가 백제에 자주 제공한 수출품 혹은 선물로 가장 두드러진 품목은 실은 군사 지원이다. 틈날 때마다 왜는 백제에 군사를 파견했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도 보이는 사실이다. 그런 교류 품목 중에 금송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p. 373 무령왕릉 지석에서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崩(붕)’ 자를 발견한 학계에서는 이 글자 하나로 백제가 민족주체성을 견지한 왕조였노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아직도 이런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p. 451 민족사적 정통성은 물론 북한 김일성 정권을 염두에 둔 것이며 잘라 말하자면 북한에 비해 정부의 정통성이 남한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정통성 회복을 위해 박정희는 역사에 주목했다.

    p. 454 독재자는 흔히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민족주체성, 전통문화 부활을 부르짖은 박정희가 좋은 예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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