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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한단 말이오?"



책/학술

    "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한단 말이오?"

    신간 '회상기-1950년', 유종호 지음

     

    "아니 그래 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한단 말이오? 3년도 아니고 겨우 석 달을? 쯧쯧쯧. 그게 말이 됩니까?"
    그의 호령에 좌중의 반역 죄인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그의 고압적 일갈이 누구 얘기 끝에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몸 둘 바를 모르는 반역죄인들 한옆에 서서, 한 변변치 못한 죄인의 역시 변변치 못한 2세二世가, "아니 석 달이 될지 3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어떻게 압니까? 누군 하고 싶어서 부역했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하고 격하게 속으로 항변하고 있음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305p

    '회상기-나의 1950년'은 문학평론가 유종호(1935) 전 교수가 열여섯살 때인 1950년 여름 두 달과 가을에 보고 듣고 겪은 나라의 뒤숭숭한 불안과 공포의 시기를 가감 없이 적고 있다.

    이 글은 수많은 개인 경험의 하나일 뿐이지만 그 시대를 상상하는 데 조그만 기여가 되기를 바라며 '전쟁의 상흔이 규격화된 상투어로 일괄 처리되는 개개 인간의 불행과 고뇌'를 재확인하게 한다는 신념으로 쓴 것들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후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복원시킨 의미 있는 작업이다.

    충주읍 변두리 소재 용산리에 전쟁의 소식이 들린 건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이었다. 신문을 통해 들린 전쟁 소식에도 마을은 큰 동요 없이 일상을 이어나가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야 급박한 전황들에 한두 가정씩 피난길에 오른다. 집을 떠나 먼 인척뻘이 살던 욕각골로 피난을 나선 소년의 가족은 그곳에서 전쟁에 얼룩진 불편한 일상과 마주하게 된다.

    학교는 문을 닫고 교사의 신분이던 아버지는 가족들과 떨어져 학교 근처에서 따로 생활을 하며 상황을 살피고, 중간중간 필요한 살림살이 등을 가지러 용산리 집과 욕각골을 오가던 소년과 소년의 가족은 제트기의 공습과 인민군, 시체, 한센병 환자에 이르기까지 생각지 못한 여러 공포 앞에 서게 된다.

    눈병으로 고생을 하나 닫힌 의원 탓에 어떠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실명의 공포에 떨었던 한때나, 겨울을 나기 위해 산판에 나뭇짐을 져 나르다 산주인에 호되게 당한 일화, 의용군에 자원해 나간 친구들과 선배들의 알 수 없는 생사, 학생에게 죽임을 당한 교사에 관한 이야기 등은 소년이 느낀 혼란했던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전한다.

    또한 아버지가 비어 있는 동료 교사의 집에서 묵은 좁쌀 되가웃을 가져 나와 끼니에 보태는 모습에서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의 냉철한 윤리의식은 후일 학생들에게 자신의 그런 치부들을 고백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말할 수 없는 비애감으로 도치된다. 그러나 피란에서 돌아온 다른 교사의 아버지를 향한 질책에 대해서는 격한 항변을 속으로 삭이며 수통한 상황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복잡 미묘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대단한 기억력의 노비평가가 쏟아놓은 이런 일화들은 그의 기억력에 의해 재구성된 일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소중한 증언의 역사로 승화되며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 개인의 비극적인 개인사, 가족사가 아닌 우리의 시대사였음을 확인시키는 65년여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한 세대적 문제까지를 곱씹어보게 한다.

    본문 중에서

    열여섯의 겁쟁이 사내아이가 여든 고개를 넘는 사이 강은 호수가 되고 고토故土의 상징이던 붉은 산은 초목 우거진 산림이 되었다. 지게도 달구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절대빈곤의 전근대는 교육 수준과 불행지수가 극히 높은 현대가 되었다. 마스막재에서 바라보는 시내에는 고층 아파트가 우뚝우뚝 활거하고 있었다. 거기서 시골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립 밴 윙클에겐 이제 고향에서도 옛날의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게 생각되었다. 반도의 겨울에서 삼한사온이 사라졌듯이, 흔하디흔한 제비와 황새가 사라졌듯이, 길가의 미루나무가 사라졌듯이, 6·25 전에 볼 수 있었던 기막히게 새파란 가을하늘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라져간 것이 어찌 그뿐이랴. 그 시절 좋아하던 시인의 대목이 저절로 바뀌어 입가에서 맴돌았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은 아니러뇨.
    ―357-358p

    쌀을 가마니로 들여놓고 살면 원이 없겠다는 게 입버릇이엇던 모친은 늘 꽁보리밥을 들었다. 삶은 보리쌀에 흰쌀을 얹어놓고 밥을 지어서 위쪽 쌀밥을 가족에게 퍼주고 나면 맨 아래 꽁보리가 당신 몫으로 남았다. 쉰 꽁보리밥을 냉수로 씻어서 드는 것을 본 어릴 적 여름날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옛날의 가난과 뒷날이 가난 극복을 간과 내지는 과소평가하는 거룩한 이들에게 흔쾌히 동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못 되는 소싯적 경험 때문이다. 절대 빈곤의 극복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왕년에 한가락 하고 살던 이들의 자랑스러운 후예들이라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171p

    살다 보면 절망감 비슷한 것을 겪게 마련이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깊으면서도 곧 담담해지는 경우도 있다, 빨간자위 눈을 하고 단신 마스막재를 넘어와서 닫힌 병원에 헛걸음을 두 걸음이나 하고 나니 맥이 빠지고 속상하기 짝이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시퍼런 젊은이가 픽픽 쓰러지는 판국에 안질 때문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하면 핀잔 받을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의 떡과 행운이 커 보이듯이 내 고뿔이나 불운이 커 보였다고 해서 누가 내게 흰자위를 굴릴 수 있을 것인가?
    -232p

    어려운 집안의 어머니일수록 못난 자식에 대한 기대와 걱정은 크게 마련이다. "쌀을 가마니로 들여놓고 살면 소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모친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주 어릴 적 모친은 귀이개로 후벼낸 내 귀지를 내 목에 부비며 "정신 밝아라, 정신 밝아라" 하고 주문처럼 외우곤 했다. 그것이 심심풀이로 만들어낸 모친 창제의 자가용 주문인지 아니면 우리 고향 쪽에 널리 퍼져 있던 수상한 전래주술傳來呪術의 일환인지는 헤아릴 길이 없지만 아마 후자일 개연성이 높다. 고령자가 되면서 나이에 비해 기억력이 좋다는 덕담을 더러 들었는데 그럴 때 혹 모친의 주문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자 속으로 웃은 적이 있다.
    ―257p

    흔히 전쟁, 하면 전투와 전사와 부상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화끈하게 처절하고 화끈하게 비통한 국면이지만 은근히 사람을 골탕 먹이는 고약한 국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사지는 멀쩡하게 돌아왔지만 속으로 골병이 든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부수적인 재난이 많은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전도양양한 젊은이를 맥없이 쓰러트린다. 가난도 마찬가지다. 굶주림만이 가난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령 가난에서 유래한 영양부족이 많은 유위한 젊음들을 폐결핵으로 피 토하며 쓰러지게 했다는 것은 쉬 상상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상상력의 교육이야말로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 처지에서는 아직 머나먼 구름 같은 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61p

    우리 동년배들도 60년 전의 참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상기를 시켜도 복원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서운 사실도 세월 앞에서는 모두 지워지는 것 같다. 무서운 사실이 지속적으로 새로 생겨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용산교 파괴에 실패해서 생긴 거대한 구렁들은 그 이듬해 말쯤이 되어서야 겨우 메워졌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모두 인간 도로의 슬픈 기표들이다.
    ―276p

    울분과 분노와 불안과 공포의 지겨운 나날을 보낸 뒤 돌연히 마주친 구질서의 상징은 동시에 안온한 유년과 고향의 표상으로 다가온 것이기도 하였다.
    ―287p

    가을이 깊어가면서 겨울나기에 대한 걱정도 없지 않았지만 지난여름을 생각하면 가슴은 더없이 가벼웠다. 통일의 날도 가까워오는 터요 그리되면 지난여름의 사달은 소소한 불편으로 간주되고 말 것이었다. 맹랑하고 잔혹한 민족 대이동의 새해 겨울이 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우리가 다시 한 번 허를 찔리고 번롱翻弄당하리라는 것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무슨 수가 있었을 것인가? 나의 그리고 우리들의 1950년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349-3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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