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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아노 신작 장편소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책/학술

    모디아노 신작 장편소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내가 사건의 실상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 그림자만 보여줄 수 있을 뿐."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발표한 장편소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스탕달의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에서 비롯한 스탕달의 자서전 속 이 구절은 기억과 망각, 정체성이란 주제를 천착해온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관통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특유의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문체로 '기억의 예술'을 통해 인간의 불가해한 운명을 환기시키고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모습을 그려왔다.

    소설은 작가 장 다라간이 사소해 보이는 한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그는 과거의 공간을 집요하게 더듬어가며 자신의 기억과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려 애쓰지만, 서로 맞춰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과 메워지지 않는 공백에 가로막힌다. 육십대가 된 작가 장 다라간의 현재와, 수상쩍은 사람들 틈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던 그의 유년 시절, 첫 소설을 써내려가던 청년 시절 등 세 시점으로 번갈아 서술되는 이 작품은 슬픔을 동반하는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작가 장 다라간은 어느 날 오후 집필실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전화를 건 남자는 다라간이 잃어버린 연락처수첩을 돌려주겠다며 그에게 만나자고 한다. 자신을 질 오톨리니라고 소개한 마흔 남짓한 남자는 그보다 젊어 보이는 여자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그는 다라간에게 수첩을 돌려주며 그 속에 이름이 적힌 기 토르스텔이라는 남자에 대해 묻는다. 사내는 어떤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데, 그 사건에 기 토르스텔이 연루되어 있다며 그에 대해 알려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다라간이 언젠가 수첩에 무심코 적었을 이름, 그의 첫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 토르스텔이라는 인물은 다라간의 기억 속에서 이미 까맣게 지워진 후다. 다라간은 그들에게서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오며 모종의 불안을 느낀다. 카페에서의 만남이 있은 뒤로 그들은 다라간의 잠든 기억을 깨우려는 양 그에게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한편 질 오톨리니가 이틀 동안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 남자와 함께 왔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다라간에게 따로 만나자고 청한다. 샹탈은 질이 경마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며, 기 토르스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서류철을 다라간에게 건넨다. 서류철 안에는 글자가 행간 없이 빽빽하게 타이핑된 종이 뭉치와 일곱 살가량으로 보이는 아이의 증명사진 확대본이 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다라간은 살인 사건에 관한 짤막한 메모들을 뒤죽박죽 모아둔 듯한 종이 사본들을 읽어내려가다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하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이름을 떠올린다. 아니 아스트랑. 그리고 마침내 다라간은 서류철에 끼어 있던 아이의 사진으로 눈길을 돌린다. 뒷면에 '즉석 사진 세 장. 신원 미상 아동. 아니 아스트랑 수색 및 체포. 벤티밀리아 국경 검문소. 1952년 7월 21일 월요일’이라고 쓰여 있는, 자신의 어릴 적 사진으로.

    작가는 다라간의 현재와 유년 시절, 청년 시절을 번갈아 서술한다. 두 남녀가 불러일으킨 기억은 그를 1950년대 아니 아스트랑과 함께 살던 생뢰라포레 시절로, 그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60년대로 이끌어간다. 육십대가 된 소설가는 어릴 적 생뢰라포레에서 머물던 시절로부터 한참 비켜서 있다. 그는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잊어버리려 했다. "여태 고이 파묻혀 있던 슬픔이 마치 불붙은 완연(緩燃)도화선처럼 지난 세월을 타고 서서히 타들어가지나 않을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베어무는 순간 프루스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마을 콩브레의 풍경을 떠올렸듯, 연락처수첩에 담긴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이, 질이 썼다는 책 속 트랑블레 경마장이라는 단어와 다라간이 과거에 살기도 했던 그레지보당 단지에 있는 질의 집이, 청년 시절 다시 만난 아스트랑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샹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를 과거로 이끈다.

    소설 중반으로 가면 다라간의 슬프고 고독한 어린 시절의 비밀과 미스터리만이 남는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오래전 다라간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자, 훗날 연인 같은 존재로 남은 아니 아스트랑에 대해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라간의 기억 속에는 과거의 수수께끼의 핵심인 아니 아스트랑의 잔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청년이 된 다라간은 수배 전단을 작성하는 마음으로 첫 소설 '그 여름의 어둠'을 쓴다. "다라간은 그 책을 오직 그녀에게 기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책을 쓴다는 것도 그에게는 소식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등대 불빛을 쏘거나 모스부호를 띄워보내는 일과 같았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책장 이곳저곳에 흘리고, 마침내 그들에게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78쪽) 소설은 장 다라간에게 있어 "그가 남몰래 삽입한 현실의 한 조각, 오직 한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신문광고란 속 개인적 전언 같은 것이었다." 그는 아니 아스트랑의 눈길을 붙들 수 있는 한 대목을 소설에 집어넣고, 그렇게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전후(戰後) 혼란스러운 시대에 부모님의 부재와 동생의 죽음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 시절 자신의 고독과 불안을 헤아리며 그때를 잊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쓴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드리워 있는 그림자를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기억의 공백은 기억을 더욱 뚜렷하게 한다.

    작가가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 "대개 상실은 그것이 촉발하는 결여 혹은 결핍감으로 인해 기억을 선명하게 한다. 그 상실이 물론 사랑하던 존재의 상실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 친숙했던 장난감 병정이나 부적, 우리가 받았던 편지, 오래된 연락처수첩 등 평범한 물건의 상실일 수 있다. 이러한 상실과 부재가 당신에게 과거로의 틈새를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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