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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여정남'을 아십니까?



책/학술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여정남'을 아십니까?

     

    '사법살인'의 희생자 여정남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북대 학생운동의 상징과도 인물이었다.

    유신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4년 4월, 그는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그는 그 다음날로 '인혁당 사형수' 7명과 함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는 유일하게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던 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올해는 여정남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꼭 40년이 되는 해다.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불과 31세에 생을 마친, 불꽃같은 그의 치열했던 삶과 생애에 대한 첫 탐구서이다.

    또한 이 책은 여정남 개인사는 물론이요, 그가 활동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 최대공안사건으로 불린 소위 '민청학련 사건'과 '제1·2차 인혁당 사건' 등을 총망라해서 다룬 최초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1960~70년대 경북대 학생운동권의 면모,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들의 활동과 계보까지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경북대 학생운동권 후배들이 그의 사후 40년을 맞아 편집위원회를 구성, 추진해온 첫 성과물이다.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민청학련 사건’과 그가 중간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제2차 인혁당사건(인혁당 재건위사건)의 수사와 재판기록을 최초로 분석했다.

    총 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이 자료들은 재심 과정에서 일부가 공개됐을 뿐, 그간 일반인에게는 공개된 적이 없다.

    당시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자신들이 북파한 간첩 김상한이 이미 북한에서 사망하여 이 세상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가 다시 남파되어 인혁당을 만들었다고 각본을 짰다.

    이어 관련자들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하여 받아낸 허위진술서를 근거로 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여정남에게도 상상도 못할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고문을 가하여 인혁당과 민청학련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허위진술을 받아내고 민청학련 관련자로는 유일하게 여정남을 사형시켰다.

    저자는 집필과정에서 이 자료를 입수하여 두 사건의 수사 개시에서부터 군법회의 재판, 대법원 확정판결, 사형집행에 이르는 전 과정을 꼼꼼히 분석하여 이를 반영하였다.

    특히 긴급조치 2호로 설치된 비상군법회의 재판의 불법성, 가혹한 고문 실상과 허위진술서 작성 경위, 사형 집행 과정의 의혹 등을 소상히 밝혀내 기록한 점이 돋보인다.

    여정남의 삶과 사상을 온전하게 기록, 복원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만으로는 부족하다.

    저자는 여정남의 유가족을 비롯하여 경북대 학생운동권의 선후배들, 이철·유인태 등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 그 외 관련 재야인사 등을 두루 인터뷰하였다.

    이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두 사건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여정남의 존재와 활동상을 비롯해 그간 논란이 돼온 많은 사실 등에 대해 재확인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의 주축은 "한강 이북은 서울대, 한강 이남은 경북대"로 불릴 정도로 경북대는 학생운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그간 학생운동사 역시 서울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경북대의 학생운동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정사회-정진회-한풍회로 이어지는 경북대 학생운동권의 계보를 관계자의 증언과 자료들을 통해 복원해냈다.

    해방 후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혁신계(더러는 좌파) 인사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특히 대구지역은 한국전쟁 때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아서 혁신계 인사들의 맥이 이어져온 땅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으로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통일논의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오던 이들은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한 후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소위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은 대개 혁신계와 관련됐던 사람들로 박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이들에게 용공혐의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거나 혹은 오랜 감옥살이를 강요했다.

    인혁계는 과연 공산주의자였는지, 소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는 과연 실존했는지, 그리고 '경락연구회'는 과연 인혁계의 위장조직이었는지 등을 자료와 증언을 통해 밝혀냈다.

    아울러 인혁계의 인맥과 계보도 증언을 통해 그려냈다.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받아낸 허위진술서,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불법적으로 진행된 군법회의와 대법원 재판, 유언 조작 등 형 집행 과정에서의 의혹 등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그야말로 불법 투성이였다.

    그러나 역대 정권하에서 명예회복이나 재심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가족들과 사회단체의 줄기찬 노력 덕분에 2005년 12월 27일 서울지법은 사후 30년만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을 결정하였다.

    이로부터 1년여 만인 2007년 1월 23일 법원은 '인혁당 사형수' 8인에 대한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이들에 대한 응당한 국가배상이 뒤따랐으며 이를 토대로 추모사업이 추진돼 오고 있다.

    여정남 등 인혁당 사형수 8명의 명예회복과 재심, 추모사업 등 그간의 과정을 추적하여 소상히 기록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정운현 저/다락방 간/496 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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