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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지방시'…얻고픈 건 값싼 동정 말고 공감"



책/학술

    "내 이름은 '지방시'…얻고픈 건 값싼 동정 말고 공감"

    [노컷 인터뷰] 비정규직 노동 착취하는 대학의 맨얼굴 고발한 김민섭 씨

    지난 23일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카페에서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지은이 김민섭 씨가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그는 "제가 본 대학의 맨얼굴은 괴물이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괴물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세준 기자/노컷뉴스)

     

    '나는 서른셋.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출신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4학점의 인문학 강의를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강사료는 시간당 5만 원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20만 원. 한 달에 80만 원을 번다. 세금을 떼면 한 달에 70만 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오는데, 그나마도 방학엔 강의가 없다. 그러면 70만 원 곱하기 여덟 달, 560만 원이 내 연봉이다. 박사 수료 때까지 꼬박 받은 학자금 대출에서 한 달에 20만 원 정도를 떼어 가고, 이런저런 대출금 상환과 공과금을 더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만 원이 고작이다. 이걸로 남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신용 등급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전화가 오면 앞자리가 02-1588로 시작하는지 확인한 후 전화기를 돌려놓는다. 밀린 카드 대금을 독촉하는 전화일 것이다. 이런 생활이 몇 년째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다. 그들은 내가 88만 원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은이 309동1201호·펴낸곳 은행나무)의 첫 페이지에 적힌 글이다. 지난 11월 출간된 이 책은 온라인 신문·커뮤니티 등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엮은 것으로, 한국 사회 대학의 부조리한 노동 착취 시스템을 고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왔다.

    책 출간 뒤에도 '309동1201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지은이 김민섭(33) 씨를 지난 23일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대학 시간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주고, 강사의 임용 계약기간을 1년 이상으로 하도록 한 '개정 고등교육법'(일명 시간강사법)의 시행을 2년 더 유예하는 내용이 국회에서 논의되는 날이었다.

    김 씨는 "(시간강사법 시행은) 또 다시 미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 법은 애초 2013년부터 시행키로 했던 것으로 이번까지 세 차례나 미뤄진 셈이 됐다. 그는 "다시 생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학 시간강사들이 강의와 연구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309동 1201호라는 필명에 대해 설명해 달라.

    = 지난 4, 5년 동안 대학원과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한 뒤 시간강사로 살았다. 309동 1201호는 제가 살던 집 주소인데, 이 과정을 모두 보낸 공간이다. 연구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석사 논문을 쓸 때는 집에 2, 3일에 한 번씩 들어갔는데, 그 공간만은 저를 배신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 있었다. 저를 오롯이 품어 준 따뜻한 곳이었다.

    글을 연재할 때 직관적으로 '필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명을 쓰지 않은 이유는 제 이야기가 모든 대학과 대학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인물로 비쳐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저만 홀로 박복한 청춘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강사의 삶이 개인의 슬픈 이야기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란다.

    ▶ 글로 시간강사의 삶을 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 제가 글을 쓰면서 내린 결론은 '나는 그동안 대학에서 끊임없이 노동을 해 왔지만,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이었다'는 것이다. 저는 오랫동안 논문만 읽고 써 왔다. 하루는 수업을 마친 뒤 학생들 면담하고, 학과 회의에 참석하고, 또 다른 행사에 갔다가 연구실에 갔다. 몹시 고단한 날이었다. '대학 내 여러 공간에서 노동을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노동자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더라. 스스로를 대학의 노동자로도, 사회인으로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날 논문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무의식적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글을 쓰고 있더라. 쓴 김에 공부하면서 힘들 때 들르던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는데, 그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제 글을 보고는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써 주길 바란다'며 응원을 보내 줬다. 큰 힘이 됐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ㅣ309동1201호ㅣ은행나무

     

    ▶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

    = 하루는 수업에 들어갔는데, 이전 시간에 강의를 한 선생님이 컴퓨터에 자기 이메일을 켜놨더라. 로그아웃을 하면서 내용을 보게 됐다. '10만 원만 빌려 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시간강사야. 방학 때 월급을 받지 못해. 내가 빌려 줄 수 있는 돈은 5만 원이 전부야'라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추신으로 '꼭 갚아 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이를 본 누군가는 "찌질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다. 그날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전 타임에 수업을 하신 분은 제가 잘 모르는 40대 시간강사였다. '10년 뒤 나는 여전히 연구와 강의를 하겠지만, 친구에게 10만 원을 빌려 줄 수 없는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책에서 대학을 '신자유주의로 점철된 아카데미'라고 비판했다. 대학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 보통 '아카데미' '대학' 하면 가장 합리적인 공간을 떠올릴 것이다. 합리와 상식에 기반했을 거라는 믿음에서다. 저 역시 그것을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제가 바라본 대학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대학이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라고 본다. 강의와 연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행정이다. 그런데 이를 모두 비정규직이 지탱하고 있다는 현실이 충격이었다. 행정의 경우 대학 어느 부서에 가든지 맞이하는 사람은 재학생, 조교들이다. 재학생들의 학비를 감면해 주는 방식으로 대학은 운영된다. 대학을 지탱하는 노동력으로 재학생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노동자가 아닌 학생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노동을 시켰으면 노동자로 대우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강사의 경우 연봉 1000만 원 정도에 4대 보험도 되지 않지만, 강의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다.

    어느 20대 교직원과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가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더라. 이유를 물으니 "이 학교를 통틀어 20, 30대 누구도 정규직이 없다"고 답했다. 대학은 재학생, 학부생, 대학원생, 졸업생까지 동원해 비정규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많은 시간강사들이 강의와 연구로 생계를 해결하지 못해 거리로 나선다. 저 역시 사회보장을 받았던 곳은 거리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저는 최근 대학을 나오면서 패스트푸드 노동도 그만뒀다. 앞으로 다시 찾을 수도 있겠지만, 6개월 정도는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한다. 그런데 패스트푸드점은 이미 제게 퇴직금을 지금했다. 그렇지만 대학은 아니다. 아마도 대학에서 퇴직금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8년 이상 몸담았던 곳인데도 말이다.

    ▶ 학생들에게는 "교수님"으로 불리지만, 현실은 80만 원 세대로서 괴리감도 컸겠다.

    = 제가 강의실에 들어서면 학생들은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학생들에게 교수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이상의 이미지인데, 저는 30대 초반이다. 학생들의 눈에는 '연구성과도 뛰어나고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된 엘리트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수업에 들어가기 전 물류하차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바로 몸을 씻고 강의실에 들어간 시간들도 있었다.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감정적으로 괴리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에 들어서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물러설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괴리감은 제가 감당해야 할 고단함이었을 뿐, 강의실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수라는 호칭에 우쭐대거나 감사한 적은 없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학생들은 질 좋은 강의를 받을 권리가 있다. 시간강사여서 능력이 부족하고 정교수라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다.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학생들 앞에 서 있느냐의 문제다. 그래야만 학생들을 위한 강의실도 바로 설 수 있다고 본다. 4개월마다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는 존재들이 학생들 앞에서 서는 일은 서글픈 현실이다.

    ▶ 나이 서른셋, 자신이 속한 세대의 삶이 어떻게 다가오나.

    = 대학을 벗어나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데는 대학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나의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속한 세대로부터 "내 이야기"라는 수많은 공감의 메시지를 받았다. 소위 명문대로 불리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로부터 "당신의 삶에 공감한다"는 말을 들었다. 제 주변 친구들 가운데 연애, 결혼을 한 이는 드물다. 무엇보다 얼굴 보기가 힘들다. 제가 잠시 서울 본가에 와 있는데, 밤 11시가 돼야 퇴근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직장을 잡지 못한 친구들도 많다. 노력이 부족한 친구들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평범한 모습이다.

    제가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건 동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평범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00명 중 85명이 지방대를 다니는 현실에서 절대다수를 패배자로 낙인 찍는 끔찍한 사회를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지방'이라는 말을 들으면 경계 밖을 생각하기 쉽다. 선을 긋는데 익숙한 까닭이다. 우리는 그 선의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고, 선 위에 안착한 사람은 아래 있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인식한다. 지방이라는 공간이 패배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이러한 편견을 깨고 싶었다. 결국 지방대생은 이 시대를 사는 평범한 청춘의 모습이다. 저 스스로를, 제가 가르친 학생들을 단 한번도 패배자로 생각한 적 없다. 저는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성골' '금수저'가 아니지만, 그렇게 제 이야기를 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 글로 대학의 부조리를 고발한 데는 구조적인 모순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 제 글은 사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대한민국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제 사적 경험이 공적 비판으로 이어지기를 바랐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어떠한 사적 경험이든 개인의 슬픈 이야기로 머물면 안 되는 법이다. 우리는 공적 비판을 사적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제가 대학의 구조적인 모순을 느낀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거리의 페스트푸드점에도 노동자를 위한 매뉴얼이 있다. 하지만 대학에는 관습화된 시스템이 있을 뿐, 그러한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대학이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니까. 이것은 지도교수가 좋은 사람이냐, 동료가 선한 사람이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에 대학 하부구조의 노동자를 위한 매뉴얼로서 시간강사법은 중요하다.

    ▶ 책 출간 뒤 주변 동료들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했냐" "우리가 거쳐가야 할 일 아니냐"라는 불만의 목소리를 들었다던데, 같은 입장에 있는 이들과의 공감, 연대가 힘들었나.

    = 연구자들, 강사들의 연대는 쉽게 이뤄질 수 없다. 대학이 구축한, 합리와 상식이 아닌 관습의 시스템이 그것을 무력화시킨 탓이다. 사실 한 인간이, 노동자가 자신을 위한 투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하다. '고용안정'이 그 최소한의 근거일 것이다. 시간강사들은 4개월 단위로 고용이 된다. 3월에 계약서를 쓰고 6월에 퇴직한다. 다시 9월에 임용이 되면 다시 3개월 조금 넘게 고용을 보장 받는다. 고용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강사 자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셈이다.

    연대가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료의식·공감대는 만들어져 있지만, 실체화 돼 있지 않다. 비정규직 교수 노조가 있는 걸로 알지만, 그 기능에 의문이 든다. 시간강사들끼리 자조적으로 '우리처럼 모래알 같은 인간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 책에서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을 '구원자'로 표현하고 있다.

    = 처음 대학 강단에 서던 날 몹시 두려웠던 기억이 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있나'라는 질문이 저를 괴롭혔다. 강의실의 문을 열 때 문의 무게가 상당했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그때 문을 열 수 있었던 힘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이후 토론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갈까'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더라. 순간순간 선을 뛰어넘는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집단지성을 목격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은 저를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게끔 해 준 구원자였다. 여전히 제게 강의실은 소중한 공간이며, 학생들은 제 지도교수다.

    ▶ "동정이 아닌 공감을 이끌어내고 싶었다"는 글귀가 인상적이더라.

    = 제 삶이 혼자만의 박복한 삶이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다른 일을 찾았겠지…. 제가 몸담았던 대학이라는 곳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품은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책도 많이 읽고, 강의도 많이 들었다. '인문학이 뭘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학의 바깥에서, 그리고 학생들에게서 답을 찾았다. 제가 정의한 인문학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는 것, 그리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다. 서로를 갑으로 존중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인문학인 셈이다.

    이러한 것이 선행될 때 비로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시간강사법 유예 등 제도 개선을 미루는 현실은 서로의 삶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저는 다시 강단에 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가 겪은 대학에서의 삶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 과정을 통해 대학에도 바람직한 제도와 매뉴얼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대학의 시간강사들이 노동자로서 자존감을 갖기를 바란다.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지은이 김민섭 씨(사진=김세준 기자/노컷뉴스)

     

    ▶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회적 연결의 끈을 느끼고 있나.

    = 저는 대학 연구실에서 따뜻한 인간이 아니었다. 먼저 "밥 먹자"는 말을 안했다. 상대를 봤을 때 먼저 인사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 작은 것조차 못했다. 돌이켜보면 가장 부끄러운 일이다.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고,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부터라도 따뜻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이유다. 제가 쓴 글이 이렇게 큰 공감을 얻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제 글에 보내 주신 많은 분들의 응원을 통해 서로를 잇는 끈을 느낀다.

    어떤 어머니께서는 '유아용품을 보내 주겠다(그는 지난해 8월 아들을 얻었다)'고 하시고, '이민 오면 대학을 소개해 주겠다'는 분도 계셨다. '계좌번호를 달라'는 분들도 계신데, 그런 분들께는 '책을 한 권 사 주시고 주변에 소개해 달라'고 말씀 드린다. 저를 향한 아주 작은 반응들이 제게 손을 내미는 따뜻한 공감으로 다가온다. 제 글이 시간강사라는 특정 직업을 위한 이기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한국 사회 모든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으로 작동하는 기제가 되길 바란다.

    ▶ 최근 대학을 그만 둔 것으로 안다.

    = 대학을 나온 가장 큰 이유는 대학 밖에서도 인문학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있는 동안 연구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 1년간 거리의 패스트푸트점에서 1000시간을 일했다. 대학에서 배운 것과 패스트푸드점에서 노동하면서 배운 것 중 어느 것이 더 값지다고 말할 수 없다. 거리에서의 노동은 대학 밖에서도 학문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도록 했다. 인문학은 두꺼운 철학책이나 명문대 강의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가능성을 믿고, 삶의 태도로 삼아 살아갈 것이다. 조금 시간을 두고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찾을 생각이다.

    ▶ 시간 강사법, 왜 중요한가.

    = 시간강사법을 시행하느냐, 유예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시간강사법 시행이 여러 차례 미뤄지는 동안 이를 아무도 손보려 하지 않았다는 데 주목하고 반성해야 한다. 수년 전 '법이 시행되면 대량해고 사태가 우려된다'는 문제로 유예를 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다. 이는 결국 지난 3년간 아무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 하지 않았고, 공감을 이끌어내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시간강사들 사이에서도 '법을 시행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 얻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로 갈리는 것으로 안다. 무엇보다 시간강사 당사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앞으로 주어진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반드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간강사들이 강의와 연구만으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하는 환경에서, 대학의 역할은 사회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를 더디게 하거나 역행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이를 부추기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시간강사법이 대학의 발전 가능성을 끌어올릴 거라 믿는다.

    ▶ 뒤돌아보면 지방대 시간 강사의 삶은 무엇이었나.

    = 삶에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이 있다. 대학에서의 삶은 그런 것을 포기하고 검열하도록 강요했다. '대학에 남겠다'는 것을 핑계로 작별했던 게 많다. 제가 스스로 괴물이 됐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대학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대학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학위를 받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냐"고 걱정했다. 저는 행복하게 "아깝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박사학위로 얻을 수 없는 삶의 태도를 배웠고, 인문학이 뭔지에 대한 답을 조금은 낼 수 있었으니까.

    대학 바깥에서도 학문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대학을 나왔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지난 시절의 감정을 왜곡하거나 미화시킨다. 제가 책을 낸 데는 제 삶을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자는 의미도 컸다. 이제는 타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먼저 손을 내밀 용기가 생겼다.

    ▶ 아들 앞에서 어떤 아버지, 어른으로 서 있고 싶은지.

    = 최근에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한 선배가 "우리는 네가 대학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함께 하자. 다만 교수님께 용서를 빌고 오라"고 말하더라. 너무 감사한 말이었다. 저를 걱정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해 줬을 것이다. 저는 그 선배에게 "요즘 많이 힘들다. 하지만 아들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 부끄럽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답했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고 싶다. 제 아들이 자라 글을 읽게 됐을 때 제가 쓴 책의 1쇄를 건내주려 한다. 아들이 제 삶을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충분할 것 같다.

    모든 시간강사의 부모님들이 '내 자식은 교수가 될 것'이라 믿는다. 자식이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만족스런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도 여기신다. 저 역시 부모님께 대학을 그만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냈다. 아버지께 연락을 받았다. "잘했다. 우리 가족은 너를 믿고 응원한다"고 하시더라. 소중한 사람은 제가 고민해 내린 결정을 응원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젠 주변 핑계를 대면서 옳다고 믿는 일을 하지 않는 일을 않겠다.

    ▶ 구조와의 싸움은 힘겹다.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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