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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으로 조작하라"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책/학술

    "간첩으로 조작하라"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1963년 12월 14일 오전,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소리와 함께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한 남자가 확 고꾸라지며 무릎을 꿇었다.

    일생을 외세의 압제와 침탈에 저항해 투쟁했던 한 남자의 최후이자, 1950년 한국전쟁에 이은 60년대와 70년대 극단의 증오와 불신으로 점철된 남북관계를 여는 서막이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17일,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의 취임식이 중앙청 앞마당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어떤 이는 그를 ‘북한의 간첩’이라고 단언한다. 또 다른 이는 그가 ‘북한의 밀사’였다고 확신한다. 과연 그는 북한의 간첩이었을까, 아니면 북한의 밀사였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박정희와 5․16쿠데타 세력은 그를 '간첩'으로 몰아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총살해버렸다. 이로써 남에서의 그의 행적은 미스터리가 되었으며, 그를 둘러싼 진실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의 이름은 황태성(黃泰成·1906~63)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숱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박정희 집안과 가까웠던 사이, 일제강점기 서울과 경북 지방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항일운동가,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 1946년 10월 대구 인민항쟁 직후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피해 북으로 올라간 사람.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황태성사건의="" 전모="">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남한의 군사정권과 남북의 협력과 통일 문제를 타진하기 위해 김일성의 명령으로 북에서 밀파되어 내려왔으나,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비밀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된 소위 '황태성 간첩 사건'을 다룬 책이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소개하고 한국현대사에서 통일·진보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활동을 발굴하는 데 힘써온 저자 김학민·이창훈은 이 책에서 북한의 밀사로 내려왔으나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한 '인간 황태성'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본다.

    관련자들의 증언, 재판 기록, 언론 기사 등을 토대로 황태성이 남한에 내려온 후 쿠데타 세력과 접촉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연행, 재판, 처형 등을 찬찬히 되짚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제강점기 항일투쟁과 1946년 '죽음을 피해' 북으로 올라간 그가 15년 후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남으로 내려오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의 근저 또한 세세하게 살핀다. 나아가 그의 죽음이 6, 70년대 남북관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추론한다.

    황태성은 북한정권 수립 후 무역성 부상(남한의 차관급)을 지낼 정도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족과 일신의 안락을 뒤로 한 채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러운 남행길을 택하도록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일까?

    총살형을 당하기 전까지 2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남에서 누구와 어떻게 지냈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벌이려 했던 것일까. 이 책은 이처럼 숱한 질문의 답을 찾는 자그마한 시도다.

    황태성은 1906년 4월 27일 일제의 조선 침탈에 맞서 반봉건·반외세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에서 넉넉했던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상산제일학교 시절 고향에서 3․1운동을 겪으면서 민족문제에 대해 어렴풋이 눈을 떴던 황태성은, 1921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고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에 천착한다.

    1924년 동맹휴학사건으로 제일고보에서 퇴학당하고부터는 일제 강점이라는 외부 모순과 계급 문제 등 민족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서울청년회 활동과 '조선청년총동맹' 결성(1924)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1925년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미 양적·질적으로 성장한 학생운동의 경험을 발전시켜 좀 더 새로운 차원의 실천적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박상희(박정희의 형), 임종업과 함께 경북 지역의 '사회주의자 3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던 황태성은 임종업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창건과 당 재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이 공산주의 관련 조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주요 인사 300여 명을 구속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사건'에 연루되어 1935년 투옥된다.

    1940년 출옥 후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다가 해방 후에는 경북 지역의 좌파세력을 이끌며 좌우합작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그러나 1946년 10월 식량난으로 대구 인민항쟁이 벌어지고 미군정이 '폭동의 배후'로 대구·경북 지역의 남로당을 지목하면서 수배령이 내려지자 1946년 11월 월북한다.

    5․16 쿠데타 직후 남한의 정세 변화를 놓고 관망하던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는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통일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시점이 되었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에 사람을 보내 쿠데타 세력이 장악한 남한 정부에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타진키로 결심한다. 이는 남측의 밀사가 북한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의 성격이기도 했다.

    북한 지도부는 여러 논의 끝에 당시 무역성 부상(副相)직을 마치고 폐병으로 요양 중이던 황태성에게 대남 밀사의 임무를 맡긴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한 형 박상희와 막역했던 황태성을 젊은 시절 한동안 멘토로 삼았다고 한다. 또 황태성은 일제하 경북 김천에서의 독립운동 활동 중 알게 된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소개했고, 둘은 혼인하게 된다. 나중에 이 부부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했으니, 중앙정보부의 창설자 김종필은 박상희의 사위이자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렇게 박정희가(家)와 안팎으로 친분이 두터운 황태성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 남한의 쿠데타 핵심에 조심스레 접근했던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잡자, 그 주도세력의 면면을 파악하고는 긴장과 함께 깊은 생각에 빠진다. 겉으로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쿠데타를 주도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김일성은 여러 경로를 통해 쿠데타의 배후에 박정희 등 과거 남로당 전력자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5․16 쿠데타 초기 북한 정권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소위 혁명공약 제1조를 들어 쿠데타 세력을 맹렬히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은 쿠데타 세력의 허수아비 지도자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개인을 겨냥한 힐난일 뿐이었다.

    북한 정권은 당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던 쿠데타의 막후 실세인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렇게 강도 높게 비난하지 않았다. 이같은 북한의 박정희 인식은 황태성의 밀사 파견으로 이어진다.

    남으로 내려온 황태성은 조카 임미정·권상능 부부와 김민하 등의 협조를 받으며 박정희를 만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의 불안한 정세 하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쟁투하고 있던 박정희와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았다.

    황태성은 고심 끝에 조카 부부를 박상희의 미망인 조귀분에게 보내 박정희나 김종필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황태성의 등장에 당황한 조귀분은 이 사실을 갓 창설된 중앙정보부 요원에 알리게 되고, 며칠 후 황태성은 중앙정보부로 연행된다.

    황태성의 연행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5․16 쿠데타 세력도 처음에는 황태성을 간첩이 아닌 북한의 밀사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중앙정보부가 임시 본부사무실로 쓰고 있던 반도호텔로 황태성을 여러 번 불러 남으로 내려온 이유와 요구사항을 파악하려 했던 것은 이 같은 추측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황태성의 존재가 언제까지나 비밀로 유지될 수는 없었다. 우선 미국의 정보기관이 황태성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미국은 박정희와 그 일파의 남로당 전력을 의심하고 있던 차에, 북한에서 밀사가 내려오고, 또 그 밀사가 쿠데타 핵심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정황에 큰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중에 미국 정보기관은 한국 정부를 압박해 황태성을 직접 심문하기도 했다.

    야당 인사들도 황태성에 대한 소문을 어슴푸레 알고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무기로 일대 사상공세를 펼치는 한편, 황태성 문제를 중요 선거 쟁점으로 삼아 박정희를 거세게 몰아쳤다.

    미국으로부터 사상을 의심받고 있는 차에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황태성을 남파 간첩으로 몰아버린다. 그러고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을 언도, 미국과 국내 보수 세력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의 친구이자 북한의 밀사인 황태성을 처형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 16만 표 차로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다.

    황태성 사건은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되고 나서 만든 첫 '작품'으로, 정보기관에 의한 공안 조작 사건의 '원조'다. 그리고 이 '원조'는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1967년의 동백림 간첩단 사건, 1973년의 김대중 납치 사건과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 1974년의 문인간첩단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최근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등 크고 작은 숱한 공안 조작사건으로 끝 모르게 진화한다.

    '황태성 간첩론'의 근원지는 당연히 중앙정보부이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 김종필은 언론 인터뷰나 회고록에서 황태성이 '북한의 간첩'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황태성이 김일성의 명령을 받고 북에서 내려와 박정희나 김종필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황태성의 조카 임미정과 그의 부군 권상능의 증언, 친손녀 황유경의 증언과 감옥에서 그와 접촉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은 김종필 등의 '황태성 간첩론'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권상능, 김민하, 임미정, 황유경의 증언은 황태성이 밀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미정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북에서의 황태성의 행적을 증언했고, 권상능, 김민하는 황태성의 남에서의 활동을 지근거리에서 도왔기 때문에 황태성의 행적 일체를 사실대로 증언했다. 그중에서도 친손녀 황유경의 증언은 특별했다.

    황유경은 어린 나이였지만 황태성의 체포 초기 중앙정보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사실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박정희와의 대면도 극적이었다.

    저자들은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 육군고등군법회의, 대법원 등의 황태성 재판 판결문도 '황태성 밀사론'의 줄기를 잡는 데 유용했다고 말한다. 판결문에서 황태성의 '죄상'으로 든 사실들이 너무나 허술하고 구체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태성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처형당한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황태성은 지금 경상북도 상주시 외곽의 비탈진 산자락에, 북으로 올라가기 전 한때 함께했던 아내와 같이 묻혀 있다. 그가 목숨을 빼앗긴 12월 14일이 되면, 그 무덤에 아직도 그 남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매년 모여든다.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한 인간의 비극적 삶을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이어가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김학민·이창훈 저/푸른역사 간/412 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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