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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아들삼고, 한센병자와 죽음맞은 '성자' 손양원



경남

    원수를 아들삼고, 한센병자와 죽음맞은 '성자' 손양원

     

    -한센인의 고름을 빨며, 총살되는 순간까지 지키고자 했던 '성자'
    -신사참배 거부하며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
    -아들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들인 '예수처럼 산 인간'
    -경남 함안 생가터에서 20일 기념관 개관

    ■ 방송 : 경남CBS<시사포커스 경남=""> (손성경PD, 김성혜 실습작가, 106.9MHz)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팀장)
    ■ 대담 : 박시영 목사 (손양원 기념관 건립본부장)

    (사진=손양원기념사업회 제공)

     

    ◇ 김효영 : 오늘(20일) 경남 함안에서 '손양원 기념관'이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손양원 기념관 건립본부 박시영 본부장 만나봅니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 박시영 : 안녕하세요.

    ◇ 김효영 : 오늘 문을 연 손양원 기념관은 어떤 시설입니까?

    ◆ 박시영 : 네,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는 보훈선양시설이구요.
    기독교인으로서는 순교자이시면서 사랑의 성자이셨던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화해를 배우는 신앙의 학습장이 되겠죠.

    ◇ 김효영 : 어떤 점에서 애국지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 박시영 : 손양원 목사님은 3.1만세운동, 손종일 독립정신을 이어받은 민족을 사랑했던,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이 다시 살아나고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살았고요.

    또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으로 감싸고 자신마저도 그 원수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던 그 아름다운 사랑이 국가에서도 인정이 되었구요. 일제시대 때에는 1940년부터 신사참배 반대로 5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 국민훈장 애족장을 받았던 보훈훈장 추서자이기도 하시죠.

    ◇ 김효영 : 그렇군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감쌌다고요?

    ◆ 박시영 : 네, 여순사건이 있을 때 손동인, 손동신 두 아들이 그 당시에 좌익분자였던 안재선에게 총살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내가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사랑 표현하는 것은 그것은 보통사람의 수준이다.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고 내 아들로 삼아야 되겠다. 그래서 사형이 예정되어있던 이 사람을 구명운동을 해서 자신의 집에서 친아들처럼 돌보셨죠.

    ◇ 김효영 : 그렇군요.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도 치르시고요.

    ◆ 박시영 : 네, 광주형무소, 청주보호감호소에서 일제시대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한 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원래는 미확정형을 받았는데, 검사가 회유를 해요. 회유에 휘말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나라사랑하는 순국의 일념으로 끝까지 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으셨죠. 그래서 해방과 함께 극적으로 출옥하게 하신 귀한 분입니다.

    ◇ 김효영 : 손양원 목사님은 함안에서 태어나신 건가요?

    ◆ 박시영 : 그렇죠. 함안 칠원읍에서, 저희들이 기념관을 지은 그 자리에서 태어나셨고 한 19세까지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신학을 하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고, 특별히 손 목사님은 한센인들과 한 평생 같이했던 정말 사랑의 섬김과 희생의 수고를 대가로 지불했던 귀한 종이시죠.

    ◇ 김효영 : 그렇군요. 한센인들과 함께한 곳은 어디입니까?

    ◆ 박시영 :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센인 보호요양소가 지금 부산외국어대학 자리인 감만동에 있었습니다. 보호요양소에 외지전도사로 1926년부터 38년까지 있었구요. 손 목사님의 삶을 보고 여수에 있는 애양원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하죠.

    그래서 순교하실때까지 1950년 순교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 손양원 목사님은 전도사 신학 첫 발걸음부터 주님 앞에 귀하게 드려지는 순교의 순간까지 한센인과 한평생 함께 하셨죠.

    ◇ 김효영 : 아, 그러셨군요. 그야말로 낮은 곳으로 임하신 분이군요.

    ◆ 박시영 : 네, 예수님처럼 사셨습니다.

    (사진=손성경 PD)

     

    ◇ 김효영 : 1950년 순교하는 순간은 혹시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 박시영 : 그렇습니다. 1950년 9월 13일날 6.25 동란으로 남침한 인민군에서 체포를 당하세요. 그 때도 여수 애양원에서 성도들이 작은 나무배를 준비해서 목사님이 잠시 경상도 지방으로 피신하라고 배까지 준비했는데 양을 버리고 떠나는 목자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양과 함께 마지막까지 내 양떼를 지키겠다 하시면서 성도들이 준비한 피난선을 외면하고 순교할 줄 알면서도 애양원 교회를 지키시다가 9월 13일날 체포되시고 후퇴하는 인민군 의해서 9월 28일날 여수 과수원에서 총살로 순교당하셨죠.

    ◇ 김효영 : 그렇군요. 손양원 목사님 말씀을 듣다보니까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이태석 신부가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 박시영 : 그렇죠. 이태석 신부의 삶도 참 아름답고 귀하지만 손 목사님이 정말 악성 한센병을 앓고 있던 '14호실'이라고 있어요. 사람의 형체로는 보기 힘든 몸이 성하지 않은 분이신데 그 병실에 들어가서 피고름을 빨아내셨던. 정말 인류역사에 이런 분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셨고 그 사랑을 받은 분들이 지금도 증언하고 계시죠.

    ◇ 김효영 : 요즘처럼 좌와 우로 갈라진 시대에 울림이 크네요.

    ◆ 박시영 : 손양원 목사님은 좌파도 아니시고 우파도 아니셨고 좌우를 끌어안으셨던 분이시거든요. 영남사람으로서 호남에서 봉사하다 순교하셨고, 남한사람이면서 자기 아들을 죽인 총을 겨누고 있는 그런 사람을 용서하셨던 분입니다.
    정말 손양원 목사님이 기독교계뿐만 아니고 모든 정치, 사회,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이제는 이데올로기 종언을 선언하고 한마음이 되는 그런 화합의 장으로 기념관이 활용되었으면 좋겠구요.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포럼의 장을 마련해서 종교를 초월하고 이념을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고 계층을 초월하는 그런 아름다운 화합의 장이 우리 함안칠원에 세워진 손양원 기념관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진=손성경 PD)

     

    ◇ 김효영 : 기념관에는 어떤 시설들이 있습니까?

    ◆ 박시영 : 네, 기념관에는 생가가 잘 복원이 되어있구요. 어릴 때 손양원 목사님이 자라셨던 향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구요. 기념관에는 나라사랑방, 인간사랑방, 하늘사랑방이라고 해서 이곳에 오면 나라를 사랑도 보게되고 인간을 사랑했던 인간사랑도 느끼게 되고요. 하늘의 사랑을 이땅에 실천하는 그런 것들로 아주 잘 꾸며져 있습니다.

    ◇ 김효영 :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요. 손양원 목사님을 오랫동안 연구해 오셨으니까요.
    지금 우리사회가 좌우대립 물론이고, 가진자와 못가진자, 세대간 갈등이 많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런 현실을 보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 박시영 : 저는 손 목사님이 만약에 오셔서 우리를 보시면 꾸짖으실 것 같아요. 우리는 용서하는 것만으로 안된다. 정말 사람을 이해하고 그냥 관용을 베푸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저는 경남지역에 있으면서 좌우의 이념적인 표현들이 정치계에서 많이 나오는데요. 스스로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정죄하는 이런 것들이 함안칠원의 손양원 목사님을 보면서 '그건 허상이야, 안개야, 사람을 사람으로 봐야 해' 하는 그런 교훈들을 손 목사님 오시면 '인간을 사랑하는게 이것이야' 이러시면서 우리에게 교훈하실 것 같아요.

    (사진=손성경 PD)

     

    ◇ 김효영 : 알겠습니다. 국회의사당에 계신분들부터 좀 배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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