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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국악계 후원자, 박석기를 아시나요?



공연/전시

    전설의 국악계 후원자, 박석기를 아시나요?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전통의 명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국악운동가 박석기의 우리음악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담아낸 공연이 열린다.

    국립국악원(원장 김해숙)은 오는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민속악단의 정기공연 <박석기를 생각하다="">를 무대 위에 올린다.

    이번 공연은 1930년대 중엽부터, 담양 지실마을에 초당(草堂)을 짓고 우리 소리와 가락을 후학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했던 박석기의 일대기를 거문고 연주와 판소리를 중심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이 한 편의 음악극으로 재구성했다.

    박석기, 그는 누구인가?

    나라의 국운이 다해가던 1899년 전라남도 창평 옥과에서 출생한 박석기는 일본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서 수학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대학 졸업 이후 작가를 지망할 정도로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는 우리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방학에는 학생 신분으로 거문고를 습득하면서 전통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냈다.

    1920년대 말 고향으로 돌아온 박석기는 암울한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담양 지실마을(지곡리)에 사재를 털어 초당을 짓고 당대 최고의 거문고 명인 백낙준(1884~1933)을 초빙해 극진히 후대하며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 가락을 익혔다.

    또한, 당대 최고의 명창 박동실(1897∼1968)을 선생으로 초빙하고, 그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김소희, 박귀희, 장월중선, 한애순, 박송희, 김녹주, 박후성 등 신진 소리꾼들에게 판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지실마을에서 판소리 후원자 역할을 도맡아 하던 어느 날, 거문고를 배우고 싶다는 소년 한 명이 그에게 찾아왔다.

    훗날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로 일가를 이룬 명인 한갑득(1919~1987)이었다.

    1931년부터 7년 동안 박석기는 소년 한갑득에게 풍류음악 ‘영산회상’과 가곡, 산조를 전수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박석기를 두고 우리가 거문고의 대가로도 일컬을 수 있는 배경이다.

    1940년, 박석기는 조선창극단을 창단해 순회공연을 열었다.

    3년 뒤 ‘심청가’ 공연으로 일본 천황의 황후를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구류처분에 고문까지 받아야 했던 그는 민족정기의 본질이 우리말과 가락에 있다는 평소 신념에 따라 이후에도 변함없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전통 음악인 양성에 몰두했다.

    이 외에도 함화진과 함께 한국국악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 서는 등 그는 우리 음악 발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을 정도로 헌신한 국악 운동가였다.

    이번 <박석기를 생각하다=""> 무대에서는 이런 박석기의 삶과 음악 정신을 한 편의 음악극으로 소개한다.

    서곡 ‘거문고 산조’ 독주, 합주를 시작으로, 공연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일본에서 귀국한 박석기가 품었던 희망을 ‘남도 들노래’로 표현한다.

    2장은 지실 초당을 설립한 그의 모습을 ‘거문고를 위한 줄풍류’, 현존하는 판소리 음원(김소희 SP판)과 합창 ‘노래에 빛이 있어라’로 표현한다.

    3장에서는 지실 초당에서 일본의 금지령을 받은 암울했던 상황을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와 창작곡 ‘비념(悲念)’으로 전하고, 화랑창극단 활동을 담은 4장에서는 판소리 ‘흥보가’ 중 ‘돈타령’이 흘러나온다.

    5장에서는 조선창극단 공연 연습에 매진한 박석기와 일행들의 열정이 단막창극 ‘심청가’ 중 ‘뺑덕이네와 심봉사’, 창과 관현악으로 구성한 ‘심청가’ 중 ‘범피중류’로 형상화된다.

    마지막으로 박석기의 최후를 담은 6장에서는 합창곡 ‘박석기는 국악의 등대’가 울려 퍼지며 공연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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