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오늘은 구식군대의 반란, 임오군란 이야기를 전합니다.
1882년(고종 19)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발단은 구식군대 장병들에 대한 차별 대우였습니다.
신식군대에게는 좋은 대우를 해주면서도 구식군대 군졸들에게는 1년이상 봉급을 주지 않는 등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고조돼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렵사리 한달치 봉급으로 받은 쌀에 모래가 절반 넘게 섞여 있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식군대 병사들이 월급을 관리하던 선혜청으로 몰려가 관리들을 폭행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사건을 주도한 병사 4-5명이 체포됐는데, 이들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사형까지 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병사들은 더 격분했고, 결국 선혜청 책임자 집을 찾아가 가재도구를 모두 부수면서 본격적인 폭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개화파의 보복을 두려워해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폭동은 더 조직화됐는데,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의금부를 습격해 개화파에 반대하다 투옥된 척사파들을 탈옥시켰습니다.
또 일본 공사관을 불태운 데 이어 일본 군인과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했습니다.
이어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명성황후까지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난입했는데 명성황후는 궁녀로 변장해 탈출했습니다. 다급해진 고종은 결국 대원군에게 반란 수습의 전권을 부여하면서 대원군은 다시 국정의 전면에 나서는데 성공했지만, 민씨 일파의 요청으로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반란은 곧바로 진압됐습니다.
이후 대원군은 중국으로 끌려 가야 했고, 일본의 강요로 주동자 처벌과 거액의 손해 배상이 명시된 제물포 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결국 임오군란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 세종 14년 (1432) : 집현전에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올리다
⇒ 건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보급 하기 위해 삼강행실을 만들었다
■ 광해 12년 (1620) : 영건도감에서 쓸 부채를 빨리 정밀하게 만들어 오도록 지시하다
■ 광해 13년 (1621) : 군사와 농민이 엄격하게 구분돼야 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비할 수 있다며, 군사와 농민을 구분해 설치하는 일을 조속히 진행하라고 지시하다
■ 고종 19년 (1882) : 수백명의 군사들이 의금부에 난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백난관을 데려감(임오군란)
도움말 : 김덕수 (통일농수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