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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명의 장정을 굶어죽든 말든 남쪽으로 끌고가라"



책/학술

    "50만명의 장정을 굶어죽든 말든 남쪽으로 끌고가라"

    [임기상의 역사산책 109]죽음의 길을 밟은 '해골의 행렬' 국민방위군

    거창양민학살사건에 이어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진 이시영 부통령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초순, 언론인 우승규는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다녀갈 수 없겠느냐는 이시영 부통령의 전갈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마주 앉은 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긴 담뱃대를 빨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보게 우군~ 난 부통령 자리를 내던질거야. 그러니 날 도와주게."

    당시 부통령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국민방위군 사건'의 비참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대구와 경주, 울산 등지를 두루 돌아다닌 직후였다. 장정들의 갈기갈기 찟어져 헐벗은 옷차림들, 며칠동안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야윈 모습들, 살아있는 송장이나 다름없는 젊은이들의 참상을 본 80대의 노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부통령 자리를 내던짐으로써 국민들에게 사과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항의이자 도전이었다. 5월 9일 이시영 부통령은 우승규가 작성한 부통령직 사직 성명을 발표했다.

    "탐관오리는 도비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 국가의 존경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영향을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것을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 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막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 워낙 무위무능 아니치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어떻길래 초대 부통령이 격분하여 사직하는 길을 택한 것일까?

    대구훈련소에 집결한 국민방위군. 한 달안에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한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승만 정부는 서둘러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했다. 6.25 발발 직후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청장년들이 의용군에 끌려간 가슴 아픈 상처가 크게 작용했다.

    적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장정을 한강 이남으로 피신시켜 국군의 예비대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세가지였다.

    1.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2.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을 받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3.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발상은 좋은데 2가지 조치가 사태를 최악으로 몰고 갔다.

    먼저 국민방위군의 책임자로 현역 군인이 아닌 극우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간부들을 앉힌 것이다. 대한청년단이 어떤 단체인지는 선언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치어 남북통일을 지급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의 도구배를 남김없이 말살하여버리기를 맹세한다"

    이런 단체에 50만 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청장년들을 맡겼으니 이승만이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한 친위대로 키우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 장정들의 의식주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국민방위군은 병력 수송과 훈련, 무장 등에 필요한 예산도 없이, 행정적인 지원도 없이 무작정 남쪽으로 걸어갔다.

    1950년 12월 21일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 소집돼 죽음의 행렬을 시작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50만여 명의 장정들이 걸어서 경상남북도와 부산, 제주도로 끌려갔다.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이었던 이병국은 이렇게 회고했다.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차량은 물론 쌀 한 톨 군복 한 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지시도 없이 막연하게 '착지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받았다. 대신 양곡권이라는 것이 지급됐다. 걸어가다가 시장, 군수에게 제출해서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엄동설한에 겨울 의복을 갖추지 못한 채 제대로 밥을 못먹고 걸어가니 쓰러지는 장정들이 속출했다. 제대로 된 숙소도 없고 잘 때는 2명당 가마니 1장이 이불의 전부였다.

    이들을 가리켜 주민들은 '죽음의 행렬'이니 '해골의 행렬'이라고 불렀다. 당시 미군에 배속된 통역장교였던 이영희는 이 참상을 <분단을 넘어서="">란 저서에 기록했다.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목격한 고 이영희 교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예비병력으로서의 국민방위군의 최종 남하 목적지의 하나가 진주였다. 진주에 주둔한 날로부터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청장년들의 행렬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만 명은 훨씬 넘었다. 진주시내의 각종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해골 같은 인간들로 꽉 들어찼다. 인간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느닷없이 끌려나온 그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고, 천리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 신발은 헤어져 맨발로 얼음길을 걷고 있었다. 혹시 몇 가지 몸에 지녔던 것이 있었더라도 굶주림 때문에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개와 바꾸어 먹은 지 오래여서 몸에 지닌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교실 안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실의 작은 틈이 채워진 뒤에 다다른 장정들은 엄동설한에 운동장에서 몸에 걸친 것 하나로 밤을 새워야 했다. 누운 채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으면 그대로 거적에 씌워지지도 않은 채 끌려 나갔다."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리리에도 중대 규모의 국민방위군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 지역 주민 이산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이라는 사람들이 이 동네에 마구 몰려들었어요. 동네 몇몇 사과창고에 50~100명씩 수용했는데, 밥을 못 줘가지고 봄이 되자 거기서 기어 나와서 '밥 좀 줘요~ 밥 좀 줘요'했어요. 원래 창고를 일본 사람들이 지었는데, 함석으로 만든 거에요. 거기서 살아나간 사람이 얼마 없어. 거의 다 죽었어. 내려올 때는 다들 괜찮았어. 그런데 좀 있으니 죽기 시작하는데, 다 죽어가는데 누가 그걸 치우겠어?"

    2006년 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이 새로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과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시인 신동엽과 정진석 추기경도 이때 차출됐다. 신동엽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민물게를 잡아 날로 먹었다가 간디스토마에 감염돼 간암으로 악화되어 요절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이때 겪은 죽음의 경험이 사제의 길로 안내했다고 한다. 추기경의 회고를 들어보자.

    "1950년 12월 말인 것 같아요. 청년들을 강제 피란시키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냥 피란을 보내지 않고, 동네마다 국민방위군 조직을 결성했어요. 서울 창경원에 모여 대오를 지어 괴나리 봇짐 같은 것을 하나씩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에 경기도 남양주 덕소 쪽으로 갔는데 한밤중에 폭설이 내렸어요.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눈 위에 쓰러져 잠을 청했습니다. 한참 자는데 누가 발로 걷어차요. '눈 위에서 자면 얼어 죽는다'고. 그래서 다시 걸어 남한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얼음 위를 건넜으니 얼음이 견디질 못했어요. 제가 건너간 뒤 얼음이 그만 꺼져 버렸어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 뒤에서 아우성치며 빠져 죽는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게 됐습니다. 겨우 몇 분 차이로 그렇게 된 겁니다. 그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첫 체험이었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걸었는데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감지덕지했지요. 경북 안동인지, 의성인지를 산길을 타고 가는데 제 앞에 가는 사람이 지뢰를 밟았어요. 제가 목격했습니다. 지뢰가 터지니까, 몰려가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지요. 이제는 제 앞에 가던 사람들이 죽은 겁니다. 그래서 또 한 번 죽음을 체험하게 됐습니다."

    야당의원 시절의 이철승(맨 왼쪽).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폭로했다.

     

    1951년 1월 15일 이철승 의원이 국회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면서 국민방위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철승 의원은 우연히 거지꼴이 된 국민방위군 친구를 만나 참상을 전해듣고 열을 받아 폭로한 것이다.

    여러 갈래로 소식을 전해 들은 국회의원들은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한 달여에 걸친 조사 끝에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

    이승만 정권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국회에 출석한 신성모 국방장관은 "여러분은 제5열(간첩)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고 훈시를 했다. 국민방위사령관 김윤근은 기자회견을 통해 "100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는 것은 실로 유감이다"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 와중에 거창에서 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폭로돼 국제여론까지 악화되고 이시영 부통령까지 전격 사직하자 이승만은 궁지에 몰렸다. 이승만은 결국 국면 전환을 위해 신성모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측근 이기붕을 새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그저 목총 하나만 들고 남하하는 국민방위군. 상당수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었다.

     

    신임 이기붕 국방장관과 국회, 헌병사령부의 조사결과는 참혹했다.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유령 병력을 조작해 3달동안 55억원이나 착복했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했다. 국민방위군 고위간부 5명은 8월 12일 대구 근교 야산에서 공개 총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장병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객관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1951년 첫 조사 당시 군당국은 국민방위군 사망 확인자를 1,234명으로 발표했다. 그후 5만 명설, 10만 명설만 떠돌 뿐이다.

    2002년 경북 영천에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사망자가 5만 명이든 10만 명이든 누구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보고서 말미에 이렇게 서술했다.

    "두 차례에 걸친 수사와 재판 끝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을 포함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으나 피해를 입은 국민방위병과 그 유족들에게는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정부가 취한 최선의 구호사업이 바로 1951년 4월 15일에 시작된 '귀환장정환자 치료사업'이다. 이 사업 결과 11,298명의 국민방위병 환자를 전국 10개 진료소에서 치료하여 결국 575명은 치료 도중 사망했고, 퇴원자 10.371명과 환자 352명이 잔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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