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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이라는 '하시마섬', 그곳은 지옥이었다"



책/학술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하시마섬', 그곳은 지옥이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104]사할린에 이어 나가사키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노무자들

    '군함도'라는 불리는 일본 하시마섬은 가장 적은 조선인 징용자들이 동원된 곳이지만 가장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8월 25일부터 일본의 최북단에 있는 사할린의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무자 3천여 명은 영문도 모른 채 차례차례 배에 실렸다.

    이들은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 속에 후쿠시마, 이바라키, 큐슈 등지에 있는 탄광으로 끌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린다. 이 사건을 가리켜 '이중징용'이라고 부른다. 많은 조선인들이 한번은 사할린으로, 또 한번은 일본 본토로 두 번이나 강제 징용당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왜 사할린에서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본토로 끌고 갔을까?

    이는 패전을 거듭하던 일본이 최후 방어선을 좁히면서 사할린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공습이 강화되자 일제는 사할린에서 생산한 석탄을 본토로 가져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급기야는 1944년 8월 사할린과 본토간의 선박 운항이 중단되었다.

    결국 일제가 선택한 것은 사할린의 탄광 문을 닫고 여기서 일하던 일본인 6천명과 조선인 3천여 명을 본토로 끌고 간 것이다.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 본토로 들어간 조선인 가운데 이른바 '지옥섬'으로 불리는 하시마섬으로 간 이들의 상황이 가장 처참했다.

    하시마섬의 탄광 안에서 일하고 있는 광부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수없이 죽어갔다

     


    하시마섬은 나가사키현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초목이 거의 없이 회색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섬에서 침략전쟁에 쓸 석탄을 캐기 위해 조선인 노무자 122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사할린과는 달리 대량 채탄과 수송을 위한 기계설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설도 낡고 모든 작업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야 했다. 섭씨 4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는 해저 1,000m의 갱도에서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는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다.

    일부 생존자들은 "그당시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고 전했다. 많은 노무자들은 구타에 시달렸다. 철사줄로 맞아 살 속까지 상처가 생겼다고 한다.

    경남 의령 출신인 서정우 씨는 "하시마섬 생활은 좁고, 덥고, 졸리고, 고달팠다. 몸이 아파 작업이라도 빠지면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외길뿐인 제방에 올라가 고향 땅을 바라보며 죽을 생각을 여러 차례 했다. 살아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 섬에서 일했던 김영길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채굴 현장에 들어가면, 그 속의 온도는 40도 이상으로 더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셔츠는 벗어버리고 훈도시(성기만 가리는 좁고 기다란 끈) 뿐입니다. 그마저도 덥고 훈도시 안에 석탄이 들어가거나 소금물이 스며들면 아파서 그것조차 필요없었습니다. 채탄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시간이 되어도 못 올라오게 했기 때문에 10~12시간, 때로는 15시간도 일했습니다. 탄광에는 음료수가 없어서 섬까지 배로 싣고 와서 배급했지요. 밥 먹기 전에 한 컵뿐, 더 마시고 싶어도 주지 않았어요. 미국 비행기가 날아와서 공습경보가 울리면 며칠 동안 물이 없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일본인을 포함해 총 9천여 명의 노무자들이 사할린을 떠났을 때 함께 동반한 가족은 단지 918명이었다. 이 가운데 130명 정도만 조선인 가족이었다.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 가족은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가족과의 이별이 길어지자 한때 가족을 보내달라고 파업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러면 가장을 잃고 사할린에 남은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생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안명복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 4월 당시에는 사할린의 식량난이 극심했어요. 일제가 실어온 예비쌀은 동이 났는데 소련은 제대로 보급을 하지 않아 배가 고파도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생각해보세요. 피난 갔다가 나가야(숙소)에 돌아왔는데 아무 것도 먹을 게 없는 거에요. 아~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나은 형편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와서 먹이고 했으니까. 우리는 공부도 못하고 겨우 소학교 과정을 끝내고 노동판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이런 고된 생활 속에서 당시 14살짜리 여동생과 7살 되는 여동생은 결국 먹지 못해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죽었다고요…"

    조선인 노무자 가족들이 이처럼 양쪽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중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다.

    ◇ 운명의 1945년 8월 9일…원폭투하, 소련군 침공 그리고 영원한 이별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을 싣고 이륙한 B-29폭격기 '복스카(Bockscar)' 는 폭탄 투하를 위해 후쿠오카현 고쿠라로 날아갔지만 짙은 구름이 깔려 폭격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번째 목표인 나가사키로 향했다. 여기도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구름의 틈 사이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보일 정도로 큰 맑은 구역이 나타났다.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폭격기는 가차없이 원자폭탄을 발사했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도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하시마섬 맞은 편에 있는 나가사키라는 도시의 당시 인구 24만 명 가운데 7만 3,884명이 숨졌다. 이 가운데 1만 여명이 한국인으로 추정된다. 하시마섬에 있던 조선인 노무자들은 불지옥으로 변하는 나가사키의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모습이 바다에 비춰지자 바다가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이 원폭이 투하된 직후 일본 정부는 패전을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조선인 노무자들은 탄광에서 빠져나와 가족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려고 했던 사할린은 또다른 전쟁터로 바뀌고 있었다.

    일본의 쿠릴열도에 상륙한 소련군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다급해진 소련군은 같은 날 일본에 선전포고를 내리고 비행기와 탱크를 앞세워 남사할린을 침공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항복하고 철수하자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들은 소련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소련군은 해안을 봉쇄하고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시켰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기에 당연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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