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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자처 코미디언의 미소…아픔 여전한 시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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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민' 자처 코미디언의 미소…아픔 여전한 시대 '위로'

    [나는 배우] 찰리 채플린…희극에 던지는 물음 "시대에 진실한가"

    찰리 채플린 (이하 사진=엣나인필름 제공)

     

    "산업화 되는 각박한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깨끗한 화질로 다시 태어나 19일 개봉한 영화 '모던 타임즈'가 시작할 때 뜨는 자막의 내용이다. 이 영화는 대공황으로 불리는 최악의 경기침체기를 거쳐 여전히 극심한 실업과 전쟁의 위협 탓에 전 세계 서민들이 신음하던 1936년 제작됐다.

    모던 타임즈를 만든 사람은 그 이름도 유명한 찰리 채플린(1889~1977). 영국 출신의 희극 배우,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음악가로 무성영화 시기에 크게 활약한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인물로도 이름 높다.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모던 타임즈다. 자본가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노동자 계급과 하층민들의 비참한 처지는 극중 희화화된 인물들이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여지 없이 드러난다. 이는 자신이 발 붙이고 사는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길어 올릴 수 없는 촌철살인의 우화다.

    관객들은 90분 상영시간 내내 포폭절도할 만큼 웃어 젖힐 테지만, 그 뒤에 밀려오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모던 타임즈가 나온지 80년이 흘렀지만 시대의 모순은 여전히 진행형인 까닭이다.

    ◇ 아이러니한 삶…지독한 가난에서 꽃피운 희극에 대한 열정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찰리 채플린의 삶은 영화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그의 부모는 뮤직 홀에서 공연하는 가수이자 배우였다. 채플린은 부모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와 지내면서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 9살이 되기 전까지 두 차례나 고아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한 극단에 들어간 그는 1910년 극단과 함께 5개월에 걸친 미국 순회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고는 2년 뒤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몇 편의 작품을 통해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 채플린은 할리우드에서 코미디 장르로 유명한 키스톤 스튜디오의 제작자 맥 세넷의 눈에 들어 정식 배우로 채용된다.

    첫 영화 '생활비 벌기'(1914)에 출연한 채플린에게 맥 세넷은 보다 더 코믹한 캐릭터를 주문했는데, 여기서 둥근 챙 모자와 꽉 끼는 웃옷에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를 신은 콧수염 사나이 '리틀 트램프'가 탄생하게 된다.

    영화 만드는 법을 빨리 터득한 채플린은 초기에 출연하던 영화부터 감독을 맡기 시작했다. 특히 여섯 살 소년 재키 쿠건을 발굴해 함께 찍은 최초의 장편 영화 '키드'(1921)로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세계가 주목하는 희극 배우를 넘어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채플린은 자기 영화에서 감독은 물론 각본을 썼고 제작, 편집, 주연, 음악까지 맡았는데, 고집스러운 완벽주의 때문에 항상 많은 이슈를 낳았다. 1926년부터 유성 영화가 인기를 끌지만 채플린은 이를 거부한 채 무성 영화 '시티 라이트'(1931)를 제작하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대성공이었다.

    ◇ 매카시즘 광풍에도 굴하지 않은 거인…"웃음과 눈물은 매우 가까워"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한 장면.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이자 리틀 트램프가 등장하는 마지막 무성영화가 바로 1936년작 모던 타임즈다. 전매특허인 슬랩스틱 코미디로 인간 소외를 낳는 산업화의 모순을 통렬한 풍자로 그려낸 바로 그 영화 말이다.

    모던 타임즈 이후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채플린은 1940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비판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위대한 독재자'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대다수의 평론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흥행 신기록을 세웠지만, 채플린은 각종 스캔들과 논쟁에 연루되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특히 '살인광 시대'(1947)에서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풍자한 이후 매카시(1950~1954년 미국을 휩쓴 반공주의) 광풍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진다. 당시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그에게 공산주의자 혐의를 씌어 소환했고, FBI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그가 했던 말을 샅샅이 뒤져 문제 삼기도 했다. FBI는 급기야 채플린이 1952년 '라임라이트'의 홍보 차 영국을 방문한 틈을 타 그의 입국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화려한 시절을 보낸 미국을 뒤로한 채 스위스 브베에 정착한 채플린은 20년 만인 1972년 미국 땅을 다시 밟게 된다. 지난 세기 동안 채플린이 만든 수많은 영화 기법이 이후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상식 무대에 오른 그를 위한 기립박수는 12분 동안이나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채플린은 미국에 머물지 않고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1977년 12월 25일 자신의 저택에서 드라마틱했던 삶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시대의 아픔에 공명한 채플린의 면모는 평소 그의 언행에서도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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