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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한국사 연구에 평생 바친 외곬인생, 논문 8번 거부당해…왜?

한국사 연구에 평생 바친 외곬인생, 논문 8번 거부당해…왜?

 

평생 연구실에 틀어박혀 책만 들여다보고 논문만 써온 학자가 있다.

30대 초반부터 80대 중반까지 50여 년의 세월 동안 300여 편의 논문, 50편의 준연구논문, 30권의 단행본을 쓰고 구순을 눈앞에 둔 노학자가 있다.

50여 년을 오롯이 연구에만 몰두하여 한국사회사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최재석 교수.

그의 학문 인생을 돌아본『역경의 행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회고록' 하면 우리는 대개 담담한 에세이를 떠올린다.

그러나 『역경의 행운』은 담담함보다는 구순을 눈앞에 둔 저자에게 청년 같은 열정과 패기가 남아 있음이 엿보이는 격정적인 회고록이다.

저자가 지나온 시간을 격정적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의 내용을 보면 공감이 간다.

개정판은 한국사회학 연구 이야기,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 이야기, 기억에 남는 사람들, 내가 겪은 학계의 부조리 등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학문연구에 관련된 이야기를 쓴 1, 2장과 학계에 관련된 이야기를 쓴 4, 5장이 핵심이다.

이 저서가 일반적인 회고록이라기보다는 한국 학계에 대한 일종의 준엄한 '고발장'으로 읽힐 수 있음은 4장 '사대주의와 편견으로 가득한 학계의 풍토'와 5장 '상식을 벗어난 학계의 부조리'라는 부제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평생을 학문에 몰두해 온 외골수 학자답게 모든 논쟁과 고발 역시 '지면'을 통해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20세기 한국의 학계가 민주적이고 학문적인 풍토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일화들이 펼쳐진다.

학문의 세계에서 다양한 주의·주장이 충돌하고 치열한 논쟁을 하는 가운데 학문이 발전한다는 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론을 실어주지도 않는 학술지, 교수 승진 심사를 둘러싼 음험한 뒷거래, 정확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게나 기술한 국사 교과서, 수십 년 연구 결과물보다 유학 가서 받아온 학위서 한 장을 더 높이 평가하는 풍토, 연구활동보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 등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학계의 뒤틀린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저자는 개정판 머리말에서 "내가 겪어온 적지 않은 시련이나 구한말의 비극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개인도 집단도 사회도 그리고 국가도 위기에 대처하는 힘을 평소부터 기를 때 비로소 거기에 대처하는 힘이 강해진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 비교 결과를 지금으로써는 짐작할 수 없으나 발표된 연구논문의 질이나 수량에 있어서 이웃 나라 학자들에 지지 않으려고 50여 년간 노력해 왔다"라고 밝혔듯이, 오로지 학자의 본분인 연구와 논문쓰기에 평생을 걸었다.

그러나 그 연구 결과 새로이 밝혀낸 눈부신 진실들이 널리 알려지기는커녕,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기도 하다.

저자의 학문인생은 한국사회사와 고대 한일관계사, 두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이다. 저자의 가장 주요한 주장은 압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한국사회사 분야
- 조선중기까지 아들, 딸, 사위 간의 차별이 없었다.
- 한국 사회에서 전국적 규모의 동성동본 조직체인 씨족이 형성된 것은 19세기 중엽이다.

◇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
- '임나일본부' 따위는 없었다.
- 고대 일본은 한국(백제)의 식민지였다.

한국사회사에서 우리는 장자 우대, 씨족 중심의 사회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일관된 풍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조선 시대의 족보와 분재기 등의 연구를 통해 '조선중기까지 아들, 딸, 사위 간의 차별이 없었고, 17세기 중기까지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을 했다'는 사실과 한국 사회에서 전국적 규모의 동성동본 조직체인 씨족이 형성된 것은 19세기 중엽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저자는 한국사회사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고대사회사를 연구하려다 일본인 학자들이 우리 고대사를 심각하게 왜곡, 훼손해 놓았음을 발견하고 고대사회사까지 연구영역을 확장했다.

1985년에 발표한 획기적인 논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과연 조작된 것인가: 소위 ‘문헌고증학’에 의한 삼국사기 비판의 정체」를 통해 그동안 한국 고대사학계에 만연하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 이래, 『일본서기』 등 고대문헌의 해석을 통한 왜곡된 고대 한일관계사의 올바른 복원에 몰두했다.

그러나 주류 한국사 학계는 '전공자가 아니다', '한 가지 분야만 연구해야 한다' 등의 이유로 배척하기 일쑤였다.

문제는 이것이다.

학자가 어떤 주장을 해도 한국 학계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론(異論)을 제기한 학자가 매장되곤 한다는 것.

그럼에도 학술지에 게재 요청을 한 논문을 8번이나 거부당한 쓰라린 경험, 자신의 책을 모조리 베껴서 책을 낸 '파렴치한 표절범'인 외국인 학자를 오히려 떠받드는 우리 학계의 사대주의적 태도 등 저자 스스로 '역경'이라 표현한 일들이 오히려 자신으로 하여금 연구와 논문에 더욱 매진하게 한 '행운'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일반 회고록처럼 에피소드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서 술술 읽히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학문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아온 노학자의 학문성과를 집적해 놓은 책이다.

동시에 학계의 부조리를 준엄하게 비판한 책이라는 점에서 젊은 후학들에게 '학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연구자의 자세란 무엇인가'에 대한 귀중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만권당 간/최재석 저/344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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