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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로 독일 갔다 25년 만에 돌아온 조국엔 정의가 없다"



문화 일반

    "광부로 독일 갔다 25년 만에 돌아온 조국엔 정의가 없다"

    ['국제시장' 밖 사람들] <上> 한국파독연합회 하대경 회장

    영화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모으는 동안 극장 밖 세상에서는 이 영화를 두고 숱한 논란이 빚어졌다. 소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반대어처럼 맞서게 하고, '애국'이라는 말과 산업화 세대를 동의어로 엮으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인 탓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는 편이 갈려 이념·세대 논쟁을 이어갔다. 누가, 무엇 때문에 영화를 발판 삼아 이러한 분열을 부추긴 것일까. 그 와중에 정작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이 땅 위에서 같은 상처를 품고 살아 온 국제시장 밖 '우리'의 모습을 전한다. [편집자 주]


    한국파독연합회 하대경 회장이 광부 작업모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파독 근로자들이 최근 큰 관심을 받는 것을 두고 그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표현을 썼다. (사진=박종민 기자)

     

    서른 살에 파독광부로 넘어가 쉰 넘어 귀국
    "국제시장 시작부터 흐르는 눈물 주체 못해"
    영화 덕 본 큰 관심에 "쥐구멍에도 볕들었다"
    "국가경제 헌신 말 들으면 솔직히 부끄러워"


    악수로 접한 한국파독연합회 하대경(74) 회장의 손은 굳은살 투성이었다. 그는 "우리 또래는 다 그럴 것"이라며 엷게 웃었다. 명함을 꺼낼 때 본 지갑도 몹시 낡아 있었다. "7년 정도 됐는데 편해서 계속 쓰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근 서울 양재동에 있는 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난 하 회장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는 내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영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눈시울은 금세 젖어 들었다.

    "이상하고 미묘한 감정이 북받쳐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눈물이 나더군요. 파독광부 생활이 나올 때는 주체할 수가 없었죠. 그때를 떠올리니 지금도 자제가 안 되네요. (웃음)"

    하 회장은 서른 살이던 1971년 광부로 독일에 갔고, 그곳에서 25년을 산 뒤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로부터 잊힌 줄 알았던 파독 근로자들이 최근 큰 관심을 받는 것을 두고 그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속담을 빌려 썼다.

    "1963년 12월 21일 처음으로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 독일에 파견됐어요. 그로부터 51년 만인 지난달 26일 대통령으로부터 감사 서한을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2008년 10월 13일 사단법인 허가를 받은 뒤 사랑방처럼 운영되면서 극소수가 모였다 헤어지고를 반복했던 조직입니다. 영화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모두가 감사하고 있죠."

    하 회장은 "지난 시절 국가경제를 위해 헌신했다는 말을 들으면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없지 않다"고 했다. 당시에는 각자 먹고 살려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인데, 세월이 지나니 "공이 있다"는 말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파독 근로자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때 칭찬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단순히 '우리 이렇게 살았다'는 걸 알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이 후대들이 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죠. 비범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 주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의로워지려면 보이지 않는 유산을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값진 것으로 여기고 지금보다 더 많이 쌓아가야겠죠."

    ▶ 지갑이 몹시 낧았다.

    = 새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이 지갑은 한 7년 정도 사용했다는데 편해서 계속 쓰고 있다. 아끼는 게 몸에 배 있기는 하지만, 연합회 대표가 돼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옷만은 깔끔하게 입으려 애쓰고 있다. (웃음)

    길 가다가도 쓸 만한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독일에 있을 때도 새것과 다름없는 좋은 물건들이 버려져 있는 걸 보면서 의아스러웠다. 제가 수리하는 데 재능이 있는지 망가진 것을 고치면서 희열도 느낀다. 지금도 버려진 다리미 같은 전자제품은 뜯어 보면 고칠 수 있는 것이 대다수다. 그런 것들을 고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는 한다.

    ▶ 연합회 건물 1층 전시관에 새겨진 '그뤽 아우프'라는 독일어 문구가 눈에 띈다.

    = 독일어로 '그뤽'은 행운을, '아우프'는 바라는 것, 염원 등을 뜻한다. 지하 탄광에 내려갈 때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고받던 말이다. 광산촌에서는 광부가 아니어도 일상적인 인사말로 쓰였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파독광부 이야기를 할 때 나오더라.

    ▶ 한국파독연합회는 어떤 조직인가.

    = 정식 명칭은 '사단법인 한국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연합회'다. 처음에는 파독광부 단체만 있었는데, 2011년 고용노동부로부터 세 단체를 묶는 것이 어떠냐는 권고를 받고 연합회로 출범했다.

    ▶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의 독일 파견은 어떻게 이뤄졌나.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는 7936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만 1057명이 독일에 갔다. 하지만 우리 연합회에 가입한 회원은 900여 명에 머물고 있다.

    ▶ 2만 명 가까운 파견 인원에 비해 회원이 몹시 적다.

    = 당시 파독 근로자의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이 기간을 마치고 체류·노동 허가를 받아 현지에 남아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사람이 많고, 유럽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남미로 옮겨간 사람도 꽤 된다.

    한국에 돌아온 사람은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자신이 광부, 간호사로 외국에 갔다 왔다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들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고, 자녀가 결혼을 해도 사돈에게 알리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직업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저 역시 25년 만인 1996년 한국에 돌아왔지만 2013년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지냈으니까.

    하대경 회장 뒤로 광부들이 지하 탄광에 내려갈 때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고받던 인사말 '그뤽 아우프'가 보인다. 독일어로 '그뤽'은 행운을, '아우프'는 바라는 것, 염원 등을 뜻한다. (사진=박종민 기자)

     

    ▶ 어떻게 파독 광부로 가게 됐는지.

    = 제가 194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대학 다닐 때 고시를 준비하기도 했지만,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고향에서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 교장으로 계시던 선교사의 영향으로 해외 생활을 동경해 오던 차였다.

    군 제대 뒤 영국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려고 서류를 보냈는데 답조차 없더라. 그 와중에 파독광부를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접했고, 독일에 가면 해외 생활의 기회를 잡을 것 같은 생각에 지원했다.

    당시 제 몸무게가 58.5㎏이었는데, 신체검사 통과 기준이 60㎏이었다. 1차 때 체중 미달로 불합격됐지만, 2차 검사를 앞두고 수박 먹고, 물 먹고 해서 몸무게를 불려 통과했다. 그렇게 1971년 1월 3일 독일행 비행기를 탔고, 아헨 지역 탄광촌에서 일하게 됐다.

    ▶ 독일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 계약기간 3년 가운데 1년 반쯤 지났을 때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 갔더니 신장결석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지하에서는 더 이상 근무하면 안 된다더라. 당시 한국 광부들의 계약 조건은 무조건 지하에서 근무한다는 것이었다.

    현지인들도 지상 근무자는 상당히 제한돼 있었는데, 의사의 말이 얼마나 영향력이 크던지 지상에서 일하게 됐다. 6개월 정도 지났을까, 회사 측에서 남은 계약기간을 해지할 테니,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하더라.

    독일 생활 초창기에 알게 된 현지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의 소개로 기계 만드는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거의 쉬는 기간 없이 일을 계속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갔던 만큼 독일 대학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어학 코스를 마치기 위해 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동차를 빌렸는데, 차 한 대에 2년간 모은 짐이 모두 차더라.

    본에 도착했을 때 보게 된 시립병원에 들어가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그곳 간호원장이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부터 오전에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병원에서 일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자연스레 숙식이 해결되니 어학연수를 마치고도 본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었다.

    ▶ 결혼도 독일에서 했겠다.

    = 그렇다. 1985년까지 본 대학을 다녔는데, 한국의 집에 돈을 보태야 할 일이 생겨 박사 과정을 못하고 공부를 그만둬야 했다. 그래서 뒤셀도르프로 옮겨 취업을 했는데, 그곳 교회에서 음대를 다니며 성가대 활동을 하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와 3년을 마치고 성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1992년 결혼을 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나이 쉰이 넘어 얻은 늦둥이였다. 아내는 음대에 다니는 한국 유학생들의 레슨을 하고 있었는데, 그 덕에 한국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아내 일도 있고, 아이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에 1996년 한국에 돌아왔다.

    ▶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어땠는지.

    = 나이 쉰 중반을 넘기고 돌아오니 취업도 쉽지 않았다. 제가 아마추어 무선사인데 당시 유행하던 무전기를 아이템으로 자영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힘든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만 했다.

    파독광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하대경 회장은 "영화 속 파독광부로 간 주인공이 무너진 갱도에 갇혔을 때 동료들이 구해내는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고 전했다. (사진=JK필름)

     

    ▶ 연합회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 파독광부로 가기 전 청계천에서 중고 타자기를 한 대 사서 비행기를 탔다. 대학 시절 모시던 은사님의 편지를 타자기로 대신 써 드리면서 타이핑을 배웠고 군에서도 행정을 봤는데, 독일에 도착해 한인 선배들의 눈에 띄어 단체마다 다니면서 실무를 봤다. 독일 한인회 회장도 맡았었다.

    한국에 돌아와 사업을 하다가 2012년 접고 시골로 내려가 지낼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박근혜 대통령 취임준비위의 시민 초청자 공모에 사연이 채택돼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방송사와 인터뷰를 했고, 이 과정에서 파독 근로자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연합회를 방문했다.

    ▶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 자원봉사를 위해 연합회를 찾았을 때 이사들이 경계하더라. 독일에서 공무를 보면서 이래저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니 당연했을 것이다. 연합회는 2013년 4월 1일 초대 회장이 갑작스레 사망한 뒤, 이사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정관을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차기 회장을 선출하면서 내홍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저를 대표로 '연합회 바로세우기 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지난해 4월 14일 법원으로부터 회장 일시 직무 대행자로 제가 선임됐다. 그리고 두 달 뒤인 6월 5일 총회를 통해 회장에 정식으로 선출됐다. 몹시 힘겨운 싸움이었다.

    ▶ 애써 힘겨운 싸움에 뛰어든 이유는.

    = 법인 운영은 철저하게 정관에 따라야 한다. 먹고 살기 힘든 때 해외에 나가 일해 번 돈을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에게 보냈던 것이 최근 들어 높이 평가받자 '정부에서 뭐라도 베풀지 않겠냐'는 기대감을 가지는 회원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합회가 무슨 종갓집도 아니고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통령도 아무리 자리가 좋더라도 5년 뒤면 떠나야 하는 법이다.

    "지금까지 고생하면서 버텨 왔는데, 열매를 얻어야 한다"며 자리를 유지하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려면 합법적으로 정관을 고치든지 말이다.

    ▶ 영화 국제시장, 어떤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

    = 파독광부로 간 주인공이 무너진 갱도에 갇혔을 때 동료들을 구해내는 장면이 그랬다. 원칙적으로는 매몰된 탄광에 들어갈 수 없지만, 며칠 만에 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

    실제 제가 파독광부 생활을 할 때도 여러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보니 이런저런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노동자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통역에게 "이겼냐, 졌냐"부터 물어봤다. 싸움은 둘째 치고 동료들이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동지애는 타국에서 살아가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대통령이 감사서한을 전달했다는 보도 이후 매일 10여 명 가까이 가입신청이 들어 오고 있다. 영화에 감사한다.

    ▶ 극중 늙은 덕수(황정민)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막말을 하는 젊은이를 혼내는 장면을 보면서는 어땠나.

    = 저 역시 독일에서는 이방인이었다. 몇몇 현지인들로부터 차별 대우도 받았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파독 근로자로 갔던 우리가 독일 국민들로부터 천대 받았다면 한국과 독일은 분명히 거리가 멀어졌을 것이다.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독일에서 절감했다.

    동남아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것을 우습게 보다가는 반 세기 뒤에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우리가 느꼈듯이 그분들이 이곳에 와 일하는 것을 평범하게만 바라봐도 자기 나라에 돌아갔을 때 "한국 최고"를 외칠 것이다. 우리 연합회도 안정을 찾으면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데 힘쓸 계획이다.

    하대경 회장은 한국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했다. 그는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대가가 돌아가지 않다보니 불평, 불만도 많아지고 세대간 갈등도 조장되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사진=박종민 기자)

     

    ▶ 요즘 여러 행사에 초청받는 것으로 아는데.

    =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이 맞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길이 열리는 것 아니냐"며 기대를 거는 회원들도 있다. 반면 "그 당시 자기 살자고 경쟁을 뚫고 독일에 간 것도 고마운 일인데, 지금 와서 굳이 나라에 요구할 필요가 있냐"는 목소리도 있다. 주변에서 "국가유공자가 되기를 바라냐"는 말을 들으면 '우리나라가 못 살았으면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국가유공자로서 대우 받는 것보다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우리 회원들 평균 연령이 광부는 74세, 간호사는 65세다. 함께 모여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임대주택, 죽으면 묻힐 공동묘지는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국가 경제를 위해 헌신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가.

    =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우리가 "나라 살리겠다"고 독일에 간 것은 아니니까. 나 하나, 가족들 먹여 살리자고 간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도전 차원에서 공직에 있던 사람들도 파독 광부로 많이들 지원했던 걸로 안다. 여기에는 나라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불안도 작용했을 것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분들도 파독 광부로 다시 간 경우가 많았다.

    ▶ 본인이 속한 세대를 스스로 어떻게 보고 있나.

    = 산업화와 민주화는 같이 굴러가는 바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는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지만, 산업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 세대를 동반자로 인정했으면 한다.

    우리는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 대다수여서 절약하는 게 몸에 배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무절제한 문화를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됐다. 이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도적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세상 돌아가는 데 대한 걱정이 커 보인다.

    = 상상도 하기 싫은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제가 서울시 학교운영위원을 8년 동안 하면서 비뚤어진 교육 풍토를 많이 접했다. 학교 폭력의 경우 제도적으로 조장하는 모습이었다. 제가 그 피해자다. 학교 측은 "저 아이 아버지는 뭐를 한다"는 식으로 학생들을 분류하고, 소위 잘 나가는 아버지를 둔 학생은 잘못을 저질러도 일체 내버려 두는데, 그것도 모자라 은폐한다.

    학생들은 "쟤는 아버지를 잘 둬서 잘못이 있어도 빠져나간다"는 것을 다 안다. 교사들도 다 안다. 하지만 일체 건드리지 않는다. 교사들의 양심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리 제도를 잘 만들어도 학교폭력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벌을 제대로 받지 않는 걸 보면서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마다 어떤 형태로든 한 번쯤은 당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른 게 선진국이 아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공정한 사회가 돼야 한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공직자의 윤리가 땅에 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도 안 되는 모습이다.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한 자에게 대가가 돌아가는 게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가만히 앉아서 수십 억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들이 생기면 안 된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보니 불평, 불만도 많아지고 세대간 갈등도 조장되는 것 같다.

    ▶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제안이 있다면

    = 우리 한 명 한 명이 잘못을 봤을 때 적극적으로 알리고 바로잡으려 애써야 할 것이다. 불의를 외면하면 안 된다. 또한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발이 고자질로 인식되지 않는 세상. 우리 기성세대가 먼저 이를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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