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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이 위태롭다, 비정규직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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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존엄이 위태롭다, 비정규직의 겨울

    [변상욱의 기자수첩]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박재홍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지난 2008년 구로역 광장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CCTV탑 꼭대기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던 모습. (자료사진)

     

    동지를 지나는 한겨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누이고 어떤 이들은 칼바람 부는 고공 철탑에 올라 외친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소속회사가 있던 서울 신대방동에서 1년 가까이 농성을 벌여왔다. 회사가 '야반도주'하고 남은 것 없는 그 자리이다. 그러다 358일 만에 농성장을 정리하고 지난 주 청와대까지의 오체투지 행진을 시작했다. 세 걸음을 걷고 온 몸을 눕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청와대로 향했다.

    사측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농성을 시작한 것이 2005년 7월부터다. 1895일을 투쟁한 끝에 노사 합의가 이뤄지고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아 복직했으나 복직자에게는 8개월간 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월급과 4대 보험 등도 지급되지 않았다. 사업주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회사 자산을 처분한 뒤 몰래 도망쳐 다른 곳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10여 년을 살며 단식농성, 고공농성, 연행, 벌금, 구속, 오체투지까지 죽는 것 빼고는 다 해보는 셈이다. 그래도 대통령에게까지 기어가면 무슨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겠지 기대하며 그들은 기어서 청와대로 향했다.

    [변상욱의 기자수첩 전체듣기]

    그러나 그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5시간동안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경찰이 청와대로는 가지 못한다고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기어가야 하는 걸까? 그들이 경찰에 막혀 멈춘 곳은 세상 떠난 지 6백년이 넘은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박 대통령은 어디 가고 세종대왕에게 빌라는 것일까?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고발한다.
    "비정규직제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짓밟고 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 세종대왕이 한국의 대통령인가?

    씨앤엠 하청업체 해고 노동자 2명이 서울 태평로 파이낸스 빌딩 앞 30미터 높이의 광고판에 올라가 지난 7월 해고된 5개 외주업체 노동자 100여 명의 복직과 고용보장 등을 요구, 농성을 했다. (사진=윤성호 기자)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기어서 가던 길에 씨엔앰 노동자들을 격려하러 들렀다. 성탄절이었다. 반년 째 노숙농성을 하다 이제는 고공농성과 집단단식을 하고 있는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은 하청업체가 바뀔 때마다 고용과 노동조건이 뒤집어지며 고용승계는 사라지고, 원청업체는 법대로 하면 자기들은 아무 책임 없다며 외면하는 비열한 노동현실에 떠밀려 거리에서 투쟁 중이다.

    이 겨울 거리 차가운 길바닥에 몸을 의탁한 노동자들은 많다. 에스케이브로드밴드 비정규 노동자들도 한 달 째 농성 중이다. SK브로드밴드 인터넷 개통과 A/S를 담당하는 기사들인 이들은 지난 26일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수감된 의정부교도소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평소 윤리경영을 강조해 온 최 회장은 정작 자신은 교도소에 들어 가 있고 경영상의 지시도 여기서 내리고 있다 한다. 불법편법 하도급으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고 4대보험·산재가입 등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것이 노동자들의 요구이다.

    엘지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사람으로 대접 받지 못하고 사람의 그림자처럼 취급당하고 있다며 함께 파업 중이다.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0년을 싸워 소송 끝에 1심 판결에서 이겼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노동자만 현대 노동자가 아니다. 공장 안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도 현대차가 직접고용한 것으로 봐야 하니 소송에 참여한 994명의 사내하청 노동자 모두를 현대차가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사측은 이리저리 피하며 실행을 미룬다. 부평에는 콜트 악기 노동자들이 천막 농성을 한다. 2,900 일 되도록 싸우고 있다. 햇수로 9년째이다. 9년 세월의 사연은 풀어놓자면 책으로 몇 권이다. 노동부가 있고 법이 있는데도 어쩌지 못하는 이 현실을 노동자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완벽한 절망"

    이들 뿐일리가 없다. 이 겨울의 절망을 밀어내며 견디고 있는 노동자들은 도처에 있다.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는 굴뚝 고공농성이 20일 째 이어지고 잇다. 성탄절을 맞아서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의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잊지 않고 찾아왔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당신들의 정리해고는 무효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이들은 평택공장 70m 높이의 굴뚝에 올라가야 했다. 하늘이 조금 더 가까워지면 하늘이라도 호소를 들어줄까 해서다.

    코오롱 해고 노동자들은 2005년 정리해고 이후 이어 온 복직 투쟁 농성을 지난 28일 10년 만에 접었다. 사측과 협상 끝에 실마리를 풀게 된 거다. 물론 원직복직 결정은 어림없었다. 다만 사측이 노사관계의 개선을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하는 정도에서 마무리 됐다. 이들도 지난 2005년 2월 경영 위기를 이유로 82명이 정리해고 된 뒤 삼보일배 행진, 고공 농성, 단식 농성 안 해 본 것이 없다.

    ◈ 인간의 존엄이 위태롭다

    (자료사진)

     

    이런 노동상황에서 노사정 위원회는 모인다. 그리고 등장하는 말들은 우아하고 그럴 듯하다. 노동시장의 구조개선, 노동의 이동성 제고, 임금체계의 유연화… 말이 번지르르해서 그렇지 대놓고 말하면 쉽게 해고하고, 쉽게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쉽게 임금을 깎아내리게끔 정비하자는 이야기이다.

    업무성과를 따져 이를 근거로 노동자에 대한 해고를 쉽게 하는 것,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5년으로 연장하는 것, 생산제조공정에까지 비정규직 사용을 전면 허용하는 것, 지금 적용하고 있는 연공급제는 성과직무급제로 바꿔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 등이다. 세상은 노동자에게 자꾸만 가혹해진다.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갑질만 쉬워지는 세상이다. OECD의 '비정규직 이동성 국가별 비교'(2013)를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가 될 가능성에서 우리나라는 가장 취약한 나라에 속한다. 고치고 넘어서야 하지만 정부는 귀를 닫고 경찰은 길을 막는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시작하며 내놓은 성명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 사회의 빈곤과 차별의 뿌리는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오늘도 땅을 기고, 굴뚝 높은 곳에서 위태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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