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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백선엽, 일제시대 행적은?



정치 일반

    전쟁영웅 백선엽, 일제시대 행적은?

    일어 회고록 中 “...동포에 총 겨눈 것은 사실,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해방 이후 업적만으로 한 인물 평가할 수 있나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악명 높은 독립군 토벌대
    만주군 장교는 자원입대자, 강제징용 피해자 아니다

    백선엽

     

    [CBS 라디오 '시사자키 신율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방송일 : 2011년 6월 30일 (목) 오후 7시 30분■ 진 행 : 신율 (명지대학교 교수)■ 출 연 : 서민교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전문위원


    ▶신율> 시사자키 3부 문을 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주 이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백선엽 씨에 관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지난 주말 KBS는 백씨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를 방영했는데요, 한국전 당시 군인으로서의 업적은 집중조명했지만, 그의 친일행적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세간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굴곡의 역사를 지나온 인물에 대한 공정한 평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셨고요, 백선엽 씨에 대한 기록을 담당했던 서민교 선생님 모시고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서민교> 예, 안녕하십니까?

    ▶신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이게 특별법에 따라서 만들었던 대통령 소속 기관이었었지요?

    ▷서민교> 예, 그렇습니다. 2005년에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서, 여야가 국회에서 다 전원 찬성으로 만들어진 특별입법입니다. 이 법에 의해서 2005년부터 2009년 11월까지 활동을 했습니다.

    ▶신율> 예, 그렇군요. 그러니까 이제 여기는 이것이 이제 정부기관이지요, 그러니까? 그렇지요?

    ▷서민교> 그렇습니다.

    ▶신율> 그런데 이 위원회에서 이제 서 선생님 같은 경우에 전문위원으로 활동을 하셨는데요, 주로 이 위원회에서 어떤 일 하셨습니까?

    ▷서민교> 제가 맡았던 일은 주로 일본 지역과 그 다음에 일본군입니다. 조선 출신 일본 군인들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신율> 그러니까 역사적 사료를 다 뒤지시고 이러면서 이제 조사를 하셨을 텐데요, 여러 가지로 참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서민교> 예, 워낙 시간이 많이 지났었기 때문에요. 특별법에 의하면 저희들이 살펴봐야 할 시기가 1904년 러일전쟁 발발에서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 시점이었기 때문에 적게는 65년 전에서 많게는 거의 105년 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과거에 옛날의 사실, 사람들의 어떤 친일적인 행적 자체를 사료를 통해서 조사한다고 하는 게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지요.

    ▶신율> 그렇군요. 서 선생님 오늘 모신 것은 백선엽 장군의 친일행적, 이런 부분도 조사를 하셨기 때문인데 맞습니까?

    ▷서민교> 예, 그렇습니다.

    해방 이후의 업적만으로 한 인물 평가할 수 있나

    ▶신율> 그런데 이제 이 논란이 된 이유가 왜 그러느냐, KBS가 최근에 특집 다큐 방송으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KBS 쪽에서는 인물을 미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을 조명하려는 차원에서 백선엽이라는 인물을 조명한 것이다, 이런 입장인데, 자, 이 논란, 이 논란을 이제 좀 차근히 알아보지요. 분명히 어떤 공과 과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은, 전체적으로?

    ▷서민교> 예, 그렇습니다. 백선엽이라고 하는 개인... 물론 아직 현재까지 생존해 계십니다만, 이 분의 어떤 일생을 반추해볼 때, 해방 이후의 반생만을 반추하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 전체 일생을 공과 과를 냉정하고 명확하게 판단을 하고 있다, 라고는 할 수가 없겠지요.

    ▶신율> 예, 그렇지요. 자, 그러면 이제 시간별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물론 답변하신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자료를 토대로 말씀을 해주시겠지요?

    ▷서민교> 예, 물론 그렇습니다.

    ▶신율> 그렇지요. 그러면 일단은 지금 백선엽 장군의 일제 시대 때의 행적이 대략 어땠는지 말씀을 해주시지요.

    ▷서민교> 예,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백선엽 씨는 1920년 출생입니다. 1920년에 지금의 평양 부근이 되겠는데요,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라고 하는 곳에서 출생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평양 사범학교를 나왔습니다. 당시에 사범학교라고 하면 굉장히...

    백선엽, 사범학교 다니다 만주군관학교로

    ▶신율> 굉장히 인텔리지요.

    ▷서민교> 예, 굉장히 인텔리이고 바로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고, 그 당시 이제 소학교 훈도라고 하는 것은 공무원입니다. 총독부 산하 공무원이었는데, 이 자리를 박차고 군인이 되겠다고 1940년에 봉천에 있었던 만군군관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신율> 그게 이제 만주군관학교라고 알려져 있는 그거지요?

    ▷서민교> 예, 만주국이라고 하는, 만주국이 1932년에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일제가 만든 식민지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것을 위만주국이다, 라고, 만주괴뢰국가라고 부르고 있지요.

    ▶신율> 그런데 거기를 이제 들어갔나요?

    ▷서민교> 거기의 사관학교지요. 거기에 있던 군관학교에 자원입학을 해서 이 학교를 거쳐서 이제 1941년에 만주국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을 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을 했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만주국군이라고 하면은 실질적으로는 일본군하고 똑같이 봐야 됩니다.

    ▶신율> 예, 제 기억으로도 그 만주군관학교에서 공부 잘하면 일본 육사로 유학도 보내고 그랬던 것 같은데요?

    ▷서민교> 예, 그거는 조금 시기가 다른데요, 백선엽 씨 같은 경우는 봉천 9기이고요, 그 다음 해부터 이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모방한 4년제 대학이, 군관학교가 새로 바뀌게 되는데, 그걸 이제 구분을 해서 봉천군관학교, 그 다음에 이제 새로 4년제로 만들어진 것을 신경군관학교,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경군관학교의 1기 졸업생으로 조선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정일권 전 총리, 그리고 2기 박정희 대통령이 그쪽 출신이었고, 여기는 이제 4년제로 바뀌면서 2년 동안 다니는, 예과라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일본에 유학시켜주는 특전이 있었습니다.

    ▶신율> 아, 그게 이제 지역에 따라 시기가 나눠지는군요?

    ▷서민교> 시기에 따라 좀 다르지요. 그러니까 백선엽 씨의 경우에는 봉천군관학교 출신입니다.

    ▶신율> 그런데, 예를 들면은 그렇게 해서 이제 소위로 임관을, 장교로 임관한... 일본군이 아니라 만주군 장교지요, 정확히 얘기한다면.

    ▷서민교> 정확히는 만주군 장교지요.

    소위 이상의 계급으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경우 친일

    ▶신율> 그런데 그렇게 임관이 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꼭 친일행적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서민교> 그렇지요. 저희들이 사실 저희 위원회 활동을 할 때 군인에 관한 규정에 관한 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법이 저희들이 어떤 행위에 의해서 이 사람이 어떤 친일행위를 했다, 라고 하는 것을 판정을 해야 되기 때문에, 당시 특별법 제2조에 보면 스무 개 항목이 있습니다. 그 스무 개 항목 중에 군인이 관련되는 항목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2조 제10호에 보면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가 있는 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율> 침략전쟁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예를 들면?

    ▷서민교> 그러니까 러일전쟁 이후부터 사실 일본이 대외전쟁을 했을 때, 특히 이제 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 그 다음에 동남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이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사례로 말씀을 드리면, 1931년 만주사변도 그렇고요, 1937년부터 45년까지 진행이 되었던 중일전쟁도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 다음에 태평양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도 궁극적으로는 일제의 침략전쟁이었다, 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신율> 아, 그렇군요. 그런 데에 관여를 하면은 그것을 친일행위로 본다, 그런 거군요?

    ▷서민교> 그렇습니다. 당시 법에는 그렇게 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율> 특별법에는?

    ▷서민교> 예.

    ▶신율> 그렇다면은 이 백선엽 장군 같은 경우에 구체적으로 그런 행위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나요?

    ▷서민교> 예, 그 중에서도 특히 저희들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군인들의 유형에 대해서 몇 가지로, 크게 유형별로 나누어 봤습니다만, 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었는데, 그 중의 한 유형에 해당되는 것이 만주국군, 조선출신의 만주국군 군인으로서 특히 간도특설대라고 하는 곳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은 굉장히 주목을 했습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악명 높은 독립군 토벌대

    ▶신율> 간도특설대? 왜 주목하셨어요? 그게 어떤 부대길래요?

    ▷서민교> 간도특설대라고 하는 것은 대개 규모로 보면 한 800명에서 900명 정도의 규모니까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닙니다만, 거의 일개 대대가 좀 안 될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특수부대였습니다. 그 부대 대장과 상급 장교들은 일본인이었지만, 중대장 급 이하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거의가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이들의 활동을 보면은 이게 간도특설대가 38년에 창설이 되어서 39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을 하게 되는데, 주로 43년도까지는 만주국 내지요, 그러니까 만주에서 이른바 당시에 동북항일연군대, 독립군 부대들, 물론 거기에는 예를 들어서 공산당 계열의 군대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어떤 독립군 부대들을 토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44년, 45년에는 중국전투, 그러니까 열하성으로 들어가서 하북성이라든지 하는 지역에서 이른바 팔로군과 전투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결국 일제의 어떤 침략전쟁에 앞서서 나서서 전쟁을 수행하는 그런 어떤 특수부대로서 굉장히 악명을 떨쳤던 부대였습니다.

    ▶신율>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독립군하고도 전투를 주로 벌인 부대다?

    ▷서민교> 예, 했습니다.

    ▶신율>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시기에 백선엽 장군이 그 부대의 소속이었었다?

    ▷서민교> 예, 엄밀하게 시기 구분을 하면은 백선엽 씨의 경우는 1941년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이 됩니다만, 1943년 2월에 간도특설대로 배속이 됩니다. 그래서 1943년 2월부터 1945년까지 간도특설대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신율> 그때 당시가 그러면 간도특설대가 상당히, 사실 전쟁이 마지막 기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서민교> 예, 그렇습니다.

    ▶신율> 그러니까 더 굉장히 활동을 더 활발히 했을 시기인가요?

    ▷서민교> 예, 43년 이 시기는 사실 이제 동북항일연군 세력들이 거의 와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세력들의 중심들은 전부 노령으로 넘어가 있거나 아니면 잠복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항일 세력들의 활동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43년 당시에도 간도 지역에서, 만주에서 간도특설대가 활동을 했었고요, 토벌활동을 했었고, 특히 43년 말부터 해서 44년부터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열하성 지역으로, 특히 팔로군이 굉장히 활동을 하고 있었던 열하성 지역으로, 북경의 바로 위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쪽 지역으로 투입이 되었고 여기에서 전과를 올리게 되니까, 간도특설대가 전과를 올리게 되니까 그 밑에 북경이 있던 지역, 하북성 지역까지 들어가서 거기에서 대규모 탄압이라든지 토벌과 같은 전쟁행위를 수행을 한 부대가 간도특설대였습니다.

    만주군 장교는 자원입대자, 강제징용 피해자 아니다

    ▶신율> 그런데 일부 일제 당시에는 이제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서 뭐 강제징용도 당하고, 비록 이제 만주군관학교를 나왔다고는 하지만 뭐 할 수 없이 부대에 배속됐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서민교> 강제동원된 부분은,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예를 들어서 지원병이라든지 학도병이라든지 그 다음에 강제징병이 되었던 케이스가 그런 데에 속하는 것이고요. 이 당시에 일본군 장교나 만주국군 장교라고 하는 것은 직업군인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것이지, 강제로 갔던 것은 절대 아니고, 이것은 직업 군인의 길, 일제에 충성을 하는, 일제 천황에게 충성을 하는 일본군 장교가 되겠다, 라고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본인들이 스스로 갔다, 라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신율> 그런데 이제 간도특설대 같은 경우에 아까 아주 상급자만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우리나라, 조선인, 소위 말하는, 그때 당시의 표현으로 이야기한다면 조선인 출신이라고 이야기하셨는데, 그럼 백선엽 씨 말고도 다른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었겠네요?

    ▷서민교> 많이 있었지요.

    ▶신율> 그 명단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다 파악을 했었나요?

    ▷서민교> 거의 파악이 됐습니다.

    ▶신율> 아, 그렇군요. 그러면 나중에 여기에서 보고서 형식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그 명단이 거기에 다 나왔었겠네요?

    ▷서민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희들이 사실 연인원으로 따지면은 매년 규모가 사병까지 포함하면 한 800에서 900명 정도가 됐다, 라고 하는데, 활동 기간이 39년에서 45년이니까 사실은 꽤 연도가 되지 않습니까? 한 오륙년 정도...

    ▶신율> 6년 정도 되지요.

    ▷서민교> 6년 정도 되지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 연 참가인원은 한 2천여명 정도, 2천100명 정도라고 파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저희들은 법에서 규정해놓은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법에 의해서 주로 이제 소위 이상의 장교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신율> 그렇군요. 그 장교로 활동했던 사람 숫자가 대충 몇 명 정도예요?

    ▷서민교> 장교로 활동했던 사람 숫자도 저희들이 파악했던 것은 150명 이상 정도가 파악이 됐습니다.

    ▶신율> 굉장히 많군요.

    ▷서민교> 그렇지요.

    ▶신율> 그런데 물론 이제 사료를 보시고 이제 또 예를 들면 증언도 좀 부분적으로 들으실 수 있었을 것 같고, 그런데 그런 증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증언이나 사료 같은 것들, 간도특설대에 관한, 이런 기억나시는 부분들이 있으세요?

    ▷서민교> 많이 있지요. 이 간도특설, 만주국군, 그 다음에 간도특설대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만, 간도특설대에 관해서는 중국의 지금 연변대학교 쪽에서도 연구가 좀 진행이 되고 있고요.

    ▶신율> 아, 그렇군요.

    ▷서민교> 그 다음에 한국의 학자들도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도특설대에 관련된 논문이라든지 연구자료가 10여 건 정도가 지금 현재 성과가 나타나 있고요, 그 다음에 이제 특히 백선엽 씨 같은 경우는 사실 한국전쟁의 영웅으로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미국이라든지 일본 쪽에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저희들이 조사를 하다보니까 백선엽 씨가 한국에서도 회고록을 출판을 했습니다만, 일본에서도 회고록을 출판을 했어요.

    “동포에 총 겨눈 것은 사실,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신율> 언제요?

    ▷서민교> 무려 5종류나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해서. 그래서 일본어로만 된, 그런 회고록 자료에 보면은, 오히려 한국에서 나온 자료에는 해방 이전 상황이 굉장히 소략하게 기술이 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나온 회고록에는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이 오히려 저희들 보고서에서도 반영을 했습니다만, 백선엽 씨의 회고록 자체도 많은 증거자료로 저희들이 채택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은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백선엽 씨가 직접 쓴 글인데요, 일본에서 나온 회고록 내용입니다만,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 이제 오랑캐를 통해서 오랑캐를 제압한다고 하는,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신율> 자서전 얘기군요?

    ▷서민교> 예, 자서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게릴라라고 표현한 것이 이른바 항일독립군들이지요.

    ▶신율> 예, 표현이, 글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듣기에는 선뜻 이해하기는 좀 힘든 표현이라는 느낌을 제가 좀 강하게 받는데요. 뭐, 이분이 물론 전쟁 영웅이라는 사실 자체는 분명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전력 역시도 우리가 충분히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일본에서는 왜 자서전을 출판했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서민교> 예, 저도 그 배경까지는 정확하게 이해를 못했습니다만, 여하튼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하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한국 전사에 대한 연구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있습니다. 거기에서 상당히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율> 그렇군요. 그런데 이렇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활동도 하시면서 진짜 이 사료, 역사학을 이렇게 쭉 하시면서, 역사적 인물, 어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한다, 라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느낌을 받으실 때가 많으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십니까, 인물 평가에 대해.

    ▷서민교> 바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어떤 인물의 일생에 대한 평가라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저희들이 특히 이제 이 사람이 친일행위를 한 사람, 우리가 말하는 친일파라고 하는 용어가 있습니다만, 사실 사전적인 용법이랑 우리 국민들 정서에서 받아들이는 친일파의 개념은 다르거든요. 여기에서 말하는, 저희들이 말하는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결국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규정을 해야 되는데, 거기에 이제 이 사람이 그런 행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점에 저희들은 주목을 했던 것이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 문제로 바로 직결을 시킨다, 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율> 그렇지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쭉 보거나 했을 때, 어떤 면에서 아주 그 질곡의 역사를 살 때 어쩔 수 없이 느낄 수 있는 부분, 그래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했다, 라고 하는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을 수 있는데, 아까 말씀 중에 왜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한 그 부분은, 어떤 면에 있어서 그런 사회에서 내가 정말, 이거는 지금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상황을 좀 이해해달라, 라는 뜻보다는 좀 너무 강한 표현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서민교> 예, 그렇습니다. 어떤 시대적인 어떤 상황을 상당히 좀 당위화시키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라고 하는 당위론적인 논리 전개가 되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역사적 사실을 적확하게, 명확하게 적시하는데 있어서는 채용할 수 없는 판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율> 그렇지요. 지금 우리가 친일역사에 대해서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를 하는데, 친일역사가 아직 청산이 되지 않았다고 보십니까, 청산이 어느 정도 됐다고 보십니까?

    ▷서민교> 완벽한 청산은 되지 않았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부에서도 그렇게 애를 써서, 물론 해방 직후에 반민특위가 구성이 됐다가 와해됐던 과거도 있고요, 그래서 그것을 다시 한번 청산을 하기 위해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특별법을 만들어서 우리가 활동을 했었습니다만, 실제로 저희 위원회가 활동할 당시에 친일파로 규정을 했던 사람의 숫자는 굉장히 소수입니다. 천여 명 정도밖에 저희들이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어떤 면에서는 민족화해라고 하는 역사적 청산 작업을 통한 민족의 화해라고 하는 화두에 집중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어떤 정부가 했던 작업이라든지, 아니면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데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작업이라든지, 하는 이런 여러 가지 작업이 있겠습니다만은, 정부가 다 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민간이나 학계에다가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말하자면 위임하거나 부탁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연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되겠지요.

    ▶신율> 독일어로 vergangenheitsbewaltigung 과거 역사를 극복하다, 라는 단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청산, 이건 완전히 깨끗이 만든다는 건데, 사실 그건 굉장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지금 아직도 제가 이렇게 오늘 쭉 말씀 들어보면서 느낀 건데, 역사에 대한 극복도 아직 지금 제대로 안 되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저는 오늘 그 자서전 내용도 이렇게 듣고 이런 걸 봤을 때, 사실 저는 오늘 처음 알았거든요. 굉장히 놀랍고 충격을 받았는데, 하지만 역사는 계속 남는 거고, 우리 기억 속에 있는 거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많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노력을 해주셔야 될 것 아닙니까?

    ▷서민교> 예, 저도 역사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계속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앞으로 연구를 해나가면서 좀더 역사적인 진상을 규명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율> 잘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KBS 다큐멘터리로 논란이 되었던 백선엽 씨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들어봤는데요, 지금까지 서민교 선생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CBS 시사자키 신율입니다. 오늘 순서는 여기에서 줄이겠습니다. 저는 내일 저녁에 여러분 다시 찾아뵙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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