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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면서 지나친 150명 얼굴은 몰라도 옷은 다 기억해"



사회 일반

    "운전하면서 지나친 150명 얼굴은 몰라도 옷은 다 기억해"

    • 2008-01-21 10:35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국내 최초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 <2편>

     

    국내 최초 남성복 디자이너. 국내 최초 남성복 디자이너로 파리 컬렉션 참가. 국내 최초 남성복 디자이너로 홈쇼핑 진출. 패션디자이너 장광효 씨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요. 20년 동안, 그는 국내외에서 무려 50회가 넘는 패션쇼를 열며, 항상 새로운 디자인에 도전, 또 도전하고 있습니다.

    ‘돈을 좇지 말고, 일을 좇아라’는 패션디자이너 장광효 씨. 그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책상 밑에 전기밥솥을 갖다 놓고 일을 했을 정도로 자신의 일, 옷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데요. 장광효 씨는 남들이 잘 가지 않던 길, 남성복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하고 파리 컬렉션까지 진출하며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사업에 실패해 전기가 끊긴 반지하 창고에서 일하며 3년 동안 깊은 좌절의 시간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홈쇼핑에 진출해서 재기에 성공하기도 했는데요. ‘좌절의 시간이 세상을 넓게 보는 심미안을 갖게 해 줬다’는 장광효 씨. 20년 패션 인생을 담은 자전 에세이집도 곧 출간한다는데요.

    ‘옷 짓는 남자’ 장광효 씨를 어제에 이어 1월 18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연간 매출 300억의 카루소... 파리 컬렉션 진출까지

    [BestNocut_R]▶ 서태지 씨도 직접 찾아 왔습니까?

    네. 찾아와서 제가 직접 디자인했는데요. 서태지 씨는 조용필 씨와는 좀 다른 옷을 했죠. 조용필 씨는 좀 정적이라면, 서태지 씨는 좀 영(young)하면서 동적인 옷을 많이 했어요. 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다른 사고의 옷을 할 때 굉장히 만족도가 높거든요. 요즘도 계속 하고 있지만 이런 컨셉의 옷을 하다가 다른 컨셉의 옷을 했을 때 느끼는 희열감은 대단한 것 같아요.

    그래서 조용필 씨 옷을 쭉 하다가 서태지 씨 옷을 하니까 또 새로운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임하룡 씨 옷을 하니까 또 다른 재미가 있는 거예요. 또 소방차 옷을 하니까 거기에 또 다른 젊고 경쾌함이 또 있는 거예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어떤 새로운 세계를 맛보면서 옷을 하고 돈을 버니까 ‘아, 이렇게 해서 돈을 버나보다.’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그 사람들로 인해서 일반인들이 제 옷을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 당시 7-8년동안 강남의 고등학생들이 졸업할 때 카루소 양복을 입고 졸업식장에 가는 것을 1번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정말 그 때 나한테도 물질적인 축복까지 주어지는가보다 하고 약간 교만스러운 생각도 들었어요.

    ▶ 돈도 많이 버셨나요?

    큰 빌딩 몇 개 살 정도의 돈을 그 당시에 벌었었죠. 그런데 지금 내가 시작을 한다고 하면 어려울 것 같아요. 그 시대는 뭐가 인기 있다, 누가 입는다고 하면 전부 몰려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워낙 각자 스타일링이라든가 각자의 개념이 다 틀리기 때문에 너는 좋지만 나는 별로 안 좋아해 하는 그런 시대인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지금도 열심히 옷을 하고 있지만, 그 시대처럼 모든 사람들이 와서 옷을 입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 카루소를 연지 3년도 안돼서 대리점을 포함해서 백화점에 입점, 30개 이상의 매장이 생기게 됐네요. 연간 매출은 어땠나요?

    연간 전체 매출을 300억 정도 했죠.

    ▶ 그럼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셨나요?

    사실 제가 그 때는 부동산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그 때는 옷을 좋아하고 옷만 만드는 열정이 더 좋았지, 내가 이것을 어떻게 투자해서 어떻게 땅을 사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개념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죠.

    ▶ 직장을 다니실 때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미친듯이 일하셨다고 하던데요.

    그 때 기억이 나는데요. 출근을 보통 8시까지 회사에 나가야 하니까 집에서는 6시 40분에서 7시 사이에 출발을 해야 했어요. 퇴근 시간은 보통 밤 9시였고요. 그런데 9시까지만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없었어요. 보통 11시, 12시 아니면 새벽 1, 2시까지 거의 매일 일을 했었어요.

    그 당시 논노가 많은 브랜드를 가지고 있고, 최고의 매출을 올렸던 이유 중의 하나가 물론 오너되시는 분도 열심히 하셨겠지만, 각 파트의 디자인을 맡고 있는 책임자들이 일에 미친 사람들만 뽑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11시쯤 퇴근을 하려고 하면 좀 미안할 정도였어요. 다들 각 파트마다 디자이너들이 퇴근할 생각도 안 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11시쯤 퇴근하려면 괜히 쑥스럽고 미안하더라고요.

    ▶ 그래서 전기밥솥을 책상 곁에 두셨던 거예요?

    밥을 먹으려 가려면 항상 시간을 놓치게 되고 일하다 보면 끼니를 거르게 돼서 아예 전기밥솥을 하나 사서 책상 밑에 놔두고 반찬만 식당에서 사다가 먹고 일한 적이 일주일이면 한 두 세 번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 남성복 디자이너로 국내 최초 컬렉션을 연 것은 언제였나요?

    1988년도에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치렀잖아요. 그 때 올림픽 기념으로 컬렉션을 7월에 하게 되었어요. ‘뉴웨이브 인 서울’이라는 타이틀로 지금도 컬렉션을 하고 있는데, 그 때 최초로 제가 디자이너로 선정되어서 하얏트 호텔에서 ‘뉴웨이브 인 서울’이라고 해서 ‘젊은 물결’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제가 남성복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컬렉션 같은 쇼를 하게 되었죠.

    ▶ ‘최초’로 하시는 경우가 많다 보니 힘든 점도 많지 않았나요?

    하다보니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게 되는데, 장광효는 최초만 쫓아다니면서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볼 수도 있는데요. 제가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고요. 제가 열심히 하다보니까 제가 하는 일이 최초가 되고 했던 것 같아요.

    ▶ 지금 생각해도 그 도전정신은 엄청났던 것 같아요.

    승부욕이라든가 한 번 하면 1등을 해야하는 그런 것이 저에게 짙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유명 디자이너 분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는데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요. 외국의 유명한 디자이너 옷이 우리나라 백화점에는 명품으로 걸려 있잖아요. 그런데 ‘앙드레 김’ 선생님 옷은 안 걸려있거든요. 만약에 어떤 분이 앙드레 김 선생님 옷을 만들어서 똑같이 백화점에 걸어놓고 판다고 했을 때 우리 국민들이 앙드레 김 선생님 옷을 살 것인가, 아니면 알렉산더 맥퀸이나 존 갈리아노의 옷을 살 것인가 제가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정말 죄송한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우리나라 것보다는 외국 것을 더 좋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수입개방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되기 전에 미리 예견을 하고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노력을 해서 개방에 대처해서 옷을 만들고 국민들에게 좋은 인식을 시키고, 또 우리가 외국에 수출을 많이 해서 우리의 인지도도 높였어야 했는데, 우리가 그런 점이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 후배들과 가끔 이야기를 하는데, “왜 우리 것이 안 되고 외국 것만 좋아하는지... 국민들 정말 나빠.”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우리 국민들한테 외국의 것을 선호하는 사상도 있지만, 수입개방화 되기 전에 우리도 노력을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노력한 것처럼 우리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해서 그 상품 못지않게 우리도 좋은 옷 상품의 질을 만들었어야 되는데 그런 점이 미흡하지 않았나 싶어요.

    ▶ 패션쇼는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행사인거죠?

    사실 디자이너 하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새로운 룩의 디자인을 발표해서 그것을 바이어가 사가는 것을 목적으로 옷을 미리 만들어서 오더를 받기 위한 행위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패션쇼, 퍼포먼스를 위한 쇼를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정말 팔기 위해서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준비해서 쇼를 하는 사람이 있고, 두 가지 형태의 쇼가 있어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컬렉션을 하기위한 쇼를 하는데, 어떤 분들은 특이하게 퍼포먼스 행사를 위한, 쇼만을 위한 쇼를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디자이너라면 지향해야 할 것이 소수나 한 사람을 위한 옷보다는 전세계인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것이 우리 국민들이 지향해야될 목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파리 컬렉션도 하고, 국내의 컬렉션도 그 때를 대비해서 하는 거예요.

    ◇ 부도 직전의 사업 정리하고, 반지하의 작업실로...

    ▶ 파리 컬렉션 외에 패션계의 뛰어난 테마는 더 없는 건가요?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파리 컬렉션을 많이 나가고 있고, 뉴욕 컬렉션, 밀라노 컬렉션, 도쿄컬렉션, 서울 컬렉션이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5대 컬렉션이라고 해요. 각 나라 수도에서 컬렉션을 어떤 행사에 맞춰서 하는데, 가장 역사가 길고 유명 디자이너들을 많이 배출하는 나라가 파리 컬렉션이라고 해서 제일 권위가 있고, 모든 디자이너들은 파리컬렉션에서 자기 옷을 발표하기를 원하고 있죠. 디자이너들의 꿈이예요.

    그래서 저도 한창 잘 나가고 돈을 많이 버니까 눈이 국내시장 보다는 해외, 나도 파리 컬렉션에 나가서 내 브랜드를 전 세계에 알리고 상품을 팔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선배분들 중에 여성복을 하시는 몇 분은 이미 나갔었어요. 그 때 저한테 자극을 주더라고요.

    ‘아, 여성복 하시는 분들이 여성복 발전을 위해서 저렇게 나가는데, 내가 남성복에서 제일 잘나간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데 나도 뭔가 나가야 하지 않을까?’하고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준비를 해서 파리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죠.

    ▶ 파리에서 첫 무대는 언제였나요?

    1990년대 초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말 꿈도 많이 가지고 있고 준비도 많이 해서 쇼를 하고, 또 6개월 있다가 다음 쇼 준비를 해야 하고요. 또 그 때 이미 서울에서는 컬렉션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비즈니스 하랴, 서울 컬렉션 하랴, 파리 컬렉션 하랴, 또 갔다 오자마자 보따리 풀고 백화점이 서른 몇 곳이니까 디자인해서 옷을 매장에 출고하랴, 직원들 관리하랴, 돈계산 하랴, 제가 또 주말부부니까 지방에 가야했으니까, 제가 몸이 열 개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회사를 어느 분에게 좀 맡겨서 관리를 해달라고 해야겠다, 내가 다 움켜쥐고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고, 뭐 하나 제대로 못하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제가 지인 중에 맡아서 할 분을 뽑아서 책임자 CEO로 앉혀놓고, 저는 파리로 갔다, 서울로 갔다 하면서 열심히 했었죠.

    ▶ 6번의 파리 컬렉션에서 반응은 어땠나요?

    그 당시 국내 패션 잡지나 언론에는 도배를 했죠. 장광효가 최초로 파리 컬렉션을 가서 반응이 좋고, 오더도 받고, 대단했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면서 매스컴을 장식했어요. 하다 보니까 제 그 때 심정으로 좀 교만해졌던 것 같아요. 국내 시장이 너무 시시한 것 같고, 또 내가 한국 사람이고, 내가 서울에 사는 생활인이고, 또 가정에 가면 가장이고, 똑같은 평범한 사람인데, 눈높이나 사고는 파리에 가있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파리 쇼를 준비하게 되고 파리 룩에 맞추다 보니까 여기 한국에는 관심이 안 가는 거예요. 국내 시장이나 회사 내부의 재정이나 경영에는 관여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나태해지고 위험한 지경까지 가게 되었죠. 지금 제 후배들 중 몇 사람이 나가서 파리 컬렉션을 시작하고 계속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파리컬렉션에 올인을 하면 안된다고 얘기해줘요.

    국내에서 수입이나 장사하는 경영, 디자인을 충실히 하고, 여기에서 에너지나 모든 자금이 나와서 파리에 가서 능력 발휘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저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으니 꼭 명심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아니면 아예 보따리를 싸서 파리로 가서 거기서 비즈니스를 하고 살면 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는데, 다행히 지금 젊은 후배들 중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좀 보여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정말 별탈없이 잘 해줘서 5년, 10년 후에는 우리나라 디자이너가 세계의 디자이너 대열에 합류해서 애국을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사업의 위기가 찾아온 것은 IMF 때였나요?

    제가 어느 날 정신이 들어서 한 번 점검을 하니까, 회사에 돈이 없는 거예요. 제가 파리에 가서 돈을 써야 하는데 말이죠. 또 들어보니까 경영도 엉망이고 말이죠. 그래서 내가 계속 파리 컬렉션을 해야하나 하고 굉장히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스톱을 하고, 백몇십명 되던 직원도 다 정리하게 되었죠.

    ▶ 백 명이 넘는 직원을 둘 정도면 완전히 중소기업이네요.

    네. 정말 잘 키웠다면 패션의 대기업이 될 수 있었죠. 또, 백화점에도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매장도 있었는데, 한 날 한시에 스물여덟 개 되는 매장을 다 철수했어요. 그 때 제가 너무 겁이 나더라고요. 이러다가 부도가 날 것 같아서 말이죠. 전에 다니던 회사도 부도가 나는 것을 제가 봤거든요. 그래서 이쯤에서 내가 다른 도움없이 사업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줄여야겠다고 생각해서 규모를 확 줄였죠. 줄이고 나니까 IMF가 터진 거예요.

    ▶ 줄이지 않았다면 더 큰일 날 뻔했네요.

    그렇죠. 그래서 정말 잘나갔던 사람이, 매장도 많고, 파리 컬렉션도 하고, 온갖 스타들이 다 와서 옷을 해가던 그런 디자이너였는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제가 빌딩이 아닌 반 지하에 있는 작업장에 가 있는 거예요.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제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전기도 끊기고, 촛불에 의지해서 단추를 달기도 하셨다면서요.

    그런 적도 있었죠. 공과금을 제 때 못 내니까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경험이 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 때 지금 생각하면 좌절했을 것도 같아요. 그런데 태연하게 대처를 하면서 파리 컬렉션만 안 했을 뿐이지, 서울컬렉션은 쉬지 않고 했었거든요.

    지하에서 한 2년간 있었는데 그래도 컬렉션 다 했고, 어려운 상황을 제가 어렵다고 해석하지 않고 내가 한 번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나, 또 어느 과정에서 이런 것을 겪어야만 더 큰 사람, 큰 그릇이 되지 않나 생각하니까 마음이 사실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직원이 많고, 나갈 돈이 많고, 그 날 디자인 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사실 제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포화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사이즈를 줄이고 편안하다보니까 정신적으로 굉장히 맑아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 실수라든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마음가짐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웠던 그 시기가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더 튼튼한 기반 속에서 다시 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너무 축복 가운데 내 인생이 놓여 있는 것 같고, 늘 감사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제가 거뜬히 대처할 능력과 마음이 되는 것 같아요.

    ◇ 힘든 순간에도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음... 홈쇼핑을 통해 재기에 성공

     

    ▶ 그렇게 힘든 시절에 심지어 화재까지 났었다고요.

    집을 작은 곳으로 옮기고 그 짐을 이삿짐센터 창고에 맡겨 두었는데, 그 창고에 불이 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20년 넘게 모아온 앤틱, 골동품, 귀중한 그림, 작품 등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린 거죠. 그래서 제가 그 때 뭘 느꼈나하면 ‘아,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다 사라지는구나.’하고 너무 절망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그럴 때 좌절하지 않고, ‘나는 잘 살 수 있어. 이건 나한테 일시적으로 찾아온 채찍질이야. 나는 좌절하면 안 돼. 나는 분명히 잘 살 수 있고, 능력이 있어.’하는 생각이 편안하게 들더라고요. 정말 밑바닥까지 가보니까 말이죠. 그래서 혹시 이 방송을 들으신 분들 중에 본인도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면 절대 좌절하지 마세요.

    우리가 삶을 살다 보니까 제일 어려울 때가 그런 시기인 것 같아요. 그 시기가 지나가 다시 오르막이거든요. 그러니까 제일 밑바닥이 제일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상승세를 탄다고 생각해요. 그 때 화재가 나고 얼마 지나서 제가 홈쇼핑을 통해서 비즈니스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너무 장사가 잘 돼서 그 동안 잃었던 것을 단기간에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한 2년 동안 남들은 고생했다고 표현을 하는데요. 사실 심적으로는 참 많이 암울했지만, 결과가 좋으니까 저는 그것이 그렇게 힘들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그것이 다 인생살이의 경험이 아닌가 싶어요.

    ▶ 최고의 자리에서 한 순간에 나락을 떨어졌는데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잃지 않으셨던 건가요?

    자기가 정말 극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떤 사람은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가장 편안하게 느껴서 그것을 돌파구로 삼고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마다 다 틀릴 것 같은데요. 저는 긍정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 물론 그런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는 데는 옆에서 도와준 분들이 계셨다고요.

    있죠. 저희 몇 명 안 되는 직원들 중에도 있었고, 저를 지켜봐준 고객분들 중에도 있었고요. 가장 큰 것은 제가 힘들 때 뒤에서 정말 제가 걱정 안하게 와이프가 말없이 지켜주는 것도 아마 제일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가정이 소중하고, 대인관계도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 역시 부인이 가장 큰 힘이 되신 거로군요.

    그렇죠. 주말부부다 보니 제가 지방에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는 거예요. 또, 와이프가 올라오는데,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은데 정말 사줄 돈이 없을 때가 있었고요. 또, 제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데, 고양이 사료를 살 돈이 없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또 다 돈이 마련되더라고요. 어떤 분이 와서 옷을 해달라고 해서 돈을 받아서 해결했고, 제가 정말 돈이 없을 때 돈을 들고 와서 옷 해달라고 할 때 정말 기뻤어요. 그러니까 절대 좌절은 금물인 것 같아요.

    ▶ 너무 모든 것을 크게 키워도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큰 능력을 요구하니까 그렇게 되면 전문 경영인을 모셔와서 경영을 맡긴다든가 하는 방법이 대두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아이디어는 없었고, 만약 지금 그런 상황이라면 지혜가 있어서 잘 대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또 그 때 그렇게 했기 때문에 IMF를 잘 겪었고, 다시 대처를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디자이너 장샘’으로 출연도 하셨는데요. 작가가 아예 장광효 씨 이름과 비슷하게 한 거죠?

    예. 현직에 있는 디자이너로 이름도 ‘장샘’이고, 또 촬영 장소도 저희 작업실과 매장이었고요. 그래서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좋았던 것 같아요.

    ▶ NG도 많이 내셨나요?

    아니요. 그렇게 많이 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연기자도 아니고, 거기에 대한 식견이나 경험도 없고, 좀 어색하고 미흡했는데, 그것이 컨셉이었기 때문에 NG를 낸 듯한 그런 것이었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하다 보니까 연기도 좀 느는 것 같고, 대사도 잘 되고 했는데, PD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냥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장샘’연기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가 보통 3-4일 전에 나오는데, 저한테는 연습하지 말라고 당일 날 주고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컨셉이 더 자연스럽고 꾸밈없이 더 인간적이었던 것 같아요.

    ▶ 출연 승낙은 선뜻 했던 겁니까?

    처음에는 한다고 해놓고 겁이 났었어요. 제가 제 와이프에게 항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니까 극구 말리더라고요.

    ▶ 말리는 이유는 뭐였나요?

    본인이 직업적으로 교수니까, 남편이 TV에 나와서 망가지는 것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제가 연기를 못한다는 것을 제일 잘 알죠. 어색하고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뭘 하겠냐고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망가지지만 절대 그것이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잘 하겠다고 저를 안심시켜서 하게 되었죠.

    ▶ 결과적으로는 더 친근감을 주게 되었죠?

    네. 하면서는 몰랐는데, 그 드라마가 방영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까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죠. 그 얘기를 듣다보니까 제가 거기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울고 어린아이처럼 속내를 많이 보였는데, 그 점이 인간적으로 해석을 해서 좋다, 친근하다라는 느낌을 준 것 같아요.

    그리고 디자이너라고 하면 좀 카리스마 있고, 또 제 직업이 약간 화려하고 잘못 보면 가까이 하기에 좀 먼 직업이잖아요. 그런데 그 출연을 계기로 해서 굉장히 이웃집 아저씨 같고, 편안하고, 인간적으로 해석을 해주셔서 저는 그 이후에 활동하기가 편하더라고요.

    ▶ 심혜진 씨, 신해철 씨, 정려원 씨 등 출연진들과도 잘 지내신 거죠?

    제가 사실 옷으로 인해서 인연을 맺었지, 드라마에 출연을 해서 인연을 맺은 경우는 사실 전무한데요. 같이 드라마에 출연하고 나니까 식구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거의 안정이 되었지만 드라마 끝나고 한 6개월은 굉장히 보고싶고, 허전하고 그런 아우라가 있더라고요. 제가 탤런트나 배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물어봤어요.

    내가 탤런트도 아니고 배우도 아닌데 한번 출연하고 나니까 한 6개월은 생각도 나고 내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배우인지 디자이너인지 구분도 안 간다고 했더니, 많게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그런 기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몰입을 하다보니 그 역과 본인의 모습에 혼동이 와서 그것을 떨치기까지 꽤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 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 다 디자인과 연결되죠

    ▶ 디자인은 ‘영감’이라는 표현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런 창작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게 되나요?

    제가 인터뷰를 하거나 하면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사실 꿈에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는 것은 아니고요. 제 생활은 거의 디자인이잖아요. 아침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거의 디자인을 하게 되고, 퇴근해서도 집에서 TV를 본다든가 디자인에 관련된 서적을 본다든가 음악을 들어도 거의 디자인에 연관을 시키는 것 같아요. 누구를 만나도 디자인 얘기를 하고 말이죠.

    제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그 분야에 있는 사람 아니면 집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면서도 꿈에서 단추 고르고, 원단 색상 고르게 되고, 길에서 운전을 하다보면 사람의 얼굴은 기억을 못하는데 옷은 다 기억하는 경우가 있어요. 시속 30km로 달렸을 때 내 시야를 거쳐간 사람이 한 150-200명이라면, 사실 얼굴은 기억이 안나요. 그런데 옷은 다 기억이 날 정도로, 옷 속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쁜 꽃을 봤는데 그 색깔이 독특하다고 하면, 그 색깔이 지금 트렌드 칼라와 맞는다면 제가 옷 만드는데 분명히 반영될 것 같고요. 또, 드라마를 봤을 때 정말 감동을 받는 스산한 짠한 느낌을 받았다면, 분명히 제가 만드는 옷에 그런 정서적인 느낌이 배어나올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이 아마 영감처럼 되어서 옷이 나오지 않나 라고 생각하니까, 제 생활이나 제 사고, 제가 보는 것, 느끼는 것이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좋은 것을 보려고 하고, 좋은 사람 만나고 싶고, 좋은 경험을 해서 정말 내 옷을 입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옷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책임감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쓰레기장을 보면 어떤 사람은 지저분해서 안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저는 쓰레기장이나 시장 골목, 시각적으로 좋지 않은 것을 입력하면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해요. 그 어수선한 곳에서도 그 미학이 있거든요. 빈티지함이 있듯이 저는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마술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하여튼 모든 것들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면 아름다움으로 바뀌어서 표현이 되어야 제가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 그럼 좀 짓궂은 질문인데요. 모든 디자인이 다 성공했나요?

    물론 실패한 것도 있죠. 제가 컬렉션 할 때 보통 50-60벌 정도 쇼장에 선보이는데, 옷을 만드는 것은 몇백벌 만들죠. 그 몇백벌 중에서 빼고 정리해서 한 50벌 정도를 무대에 올리는데, 또 옷 만들기 전에 스케치도 많이 하고, 옷을 하는 중에도 바꾸기도 하고, 다시 하기도 하고, 그런 작업을 많이 하거든요. 디자이너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이너들이 그런 시행착오 속에서 완벽함을 극복해내지 않나 싶어요.

    ▶ 책을 보면 ‘성공하고 싶다면, 돈을 좇지 말고 일을 좇아라’라고 쓰셨던데요.

    네. 맞습니다. 돈은 분명히 필요해요. 디자이너 생활을 영위하려면 분명히 금전적이 필요한데, 돈을 벌기 위해서 디자인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수십년 동안 그 성실과 열정을 가지고 붕어빵 장사를 했더라도 지금보다 더 잘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하는 일에 열정이나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지금까지 온 것이지, 돈 벌기 위해서 한 것 아니죠. 열심히 옷을 좋아해서 만들고 하다 보니까 그 옷이 잘 나가서 돈을 벌게 되거든요. 그 다음에 돈 관리는 디자이너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무분별하게 나둬 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 디자이너 장광효 씨 인생에서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뭔가요?

    제가 디자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 거기에는 건강도 있을 것이고, 가정도 있고, 주위에 저를 믿고 잘 따르는 직원, 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잘 돼서 제가 좀 더 진지하게 옷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계속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 ‘동안’이라는 말이 요즘 최고 칭찬인데요. 정말 동안이세요. 아주 부럽습니다.

    제가 어떤 분을 보고 느꼈는데요. 그 분은 배우신데, 70이 다 되신 여자분인데요. 제가 청소년 시절에 굉장히 좋아했던 배우예요. 그런데 그 분은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 분은 어떻게 전성기 때보다 더 아름다움과 미모를 가지고 있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자연스럽게 늙은 것, 그리고 녹슬지 않고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자기의 생활을 잘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요.

    사실 마음은 굉장히 편안하게 가져요. 잠도 잘 자고요. 무리한 욕심 가지지 않고 살다 보니까 동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나이가 70인데, 30대 얼굴을 가지면 굉장히 재수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고 멋있게 늙는 것은 굉장히 좋을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 해주세요. 우선 이번에 쓰신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라는 책이 잘 되는 것도 계획에 포함되나요?

    제가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의 사고로 글을 쓴 것은 아닌데,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진솔하게 직접 썼고, 책디자인도 전문가에게 맡겨서 예쁘게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의상을 공부하는 의상학도나 젊은 친구들, 아니면 인생을 좀 사신 분들이 이 책을 보면, 분명히 제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감성으로 옷을 입히듯이 책을 읽는 분들도 아마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입힐 수 있는 여유와 희망이 베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진솔하게 썼습니다. 관심 많이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앞으로의 계획은 제가 좀 더 건강해서 70대까지 왕성하게 디자인 활동하고, 그 다음에는 제가 문화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요. 제가 여행을 하면서 미국에서 느낀 것인데, 대체로 우리나라 재벌들, 돈 많은 사람들은 자식한테 다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잖아요.

    그런데 미국에서 봤는데, 박물관도 만들어 주고, 공원도 만들어 주고, 자식한테는 정말 조금 살 수 있을 정도만 주고 다 사회에 좋은 일로 기증하는 문화를 제가 보았어요. 사실 여행하기 전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는데, 가서 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사회에 환원하는 그런 의미, 진정한 부자사회에 대한 인식도가 제 스스로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부는 아니겠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무언가를 해놓고 마무리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더 열심히 활동해서 갤러리나 의상 박물관과 같은 문화공간을 제 명성에 걸맞게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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