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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효 "조용필·소방차·서태지 의상 제가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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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 일반

    장광효 "조용필·소방차·서태지 의상 제가 만들었죠"

    • 2008-01-18 16:04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국내 최초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 <1편>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디자이너 장샘’으로 출연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패션디자이너 장광효 씨. 그는 대다수 패션디자이너들이 여성복에 치중할 때, 불모지인 남성복 분야에 뛰어든 국내 최초 남성복 디자이너입니다.

    장광효 씨는 단조롭고 경직된 남성복의 틀을 깨고자 20년 전, 카루소라는 패션브랜드를 탄생시키고, 지금까지 남성복 패션디자이너로 정상을 달리고 있는데요. 댄스그룹 소방차의 승마바지를 유행시키고, 가수 조용필, 서태지, 지휘자 금난새 등 유명인들의 의상을 만들어서 유명해 지기도 했죠.

    그는 국내 뿐 만이 아니라, 무대에 오르는 조건부터가 무척 까다롭다는 파리 패션쇼에 진출해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며 전진만 하던 그에게 밑바닥부터 사업을 다시 시작할 정도로 큰 위기가 닥치기도 했는데요.

    20년 패션에 대한 열정! ‘옷 짓는 남자’ 장광효 씨를 1월 17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20년간의 디자이너 생활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출간

    ▶ 디자이너는 어떤 옷을 입고 오실까 궁금했습니다.

    오늘 날씨가 추워서 네이비 컬러의 코트를 입고 왔습니다. 안에는 마린 룩의 스트라이프 터틀넥을 입고 왔습니다.

    ▶ 마린 룩은 피카소가 좋아했다고 하던데요.

    그렇죠. 마린 룩은 여름철에 많이 입는데, 요즘은 겨울에도 두껍게 니트로 짜서 스트라이프로 응용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아까 잠깐 말씀하셨는데요. 디자이너들이 옷을 하니까 굉장히 멋을 많이 부리는 것으로 일반인들은 알고 있거든요. 제가 신입일 때는 굉장히 멋을 많이 부렸어요. 제가 입고 싶은 옷도 많이 입고요.

    그런데 연륜이 쌓이고 오래 활동하다보니까 그냥 편안한 옷, 항시 청바지에 티셔츠나 니트 같은 옷을 간단하게 입고 작업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죠.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보통 우리가 보는 패션모델처럼 멋을 부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 20년 동안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담은 책,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가 곧 출간된다고요.

    네. 어찌하다보니 책까지 쓰게 되었는데요. 사실 출판사와 얘기가 돼서 책을 쓸 무렵에 쓰고 싶지가 않았어요.

    ▶ 왜 그러셨나요?

    왜냐하면 보통 책을 쓴다고 하면, 세상을 다 살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정리하는 마음으로 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할 일도 많은데 책을 벌써 써?’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제가 이제 20년 동안 디자이너로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나니까 한 번 터닝 포인트라고 해야 하나요?

    과거를 한 번 정리해서 앞으로 한 20년 정도 활동을 한다고 하면 보람될 것 같고, 또 제가 열심히 해왔으니까 이런 것을 글로서 후배들, 패션을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참고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5-6개월 정도 준비해서 이 달 25일 책이 나옵니다.

    ▶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입히다’라는 단어가 친근하게 느껴지시겠어요.

    아무래도 옷 짓는 남자이고, 제가 처음에 ‘카루소’라는 브랜드 간판을 걸고 처음 옷을 시작했을 때 우리 대한민국 남자들이 어려운 시기를 겪어서 그런지 멋에 대해서 굉장히 둔했었어요. 그 때 제 목표가 구태여 잘사는 나라의 멋있는 남자를 들지 않더라도 그런 나라들의 남자들처럼 내가 한 번 바꿔봐야겠다, 내 열정으로 우리 남자들의 스타일을 한 번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을 했는데, 그런 뜻에서 ‘옷 짓는 남자’의 테마를 가지고 책을 쓰게 되었어요. 그래서 ‘감성을 입힌다’라고 표현을 한 거죠.

    ▶ 옷은 보온만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감성을 입는 거잖아요.

    그렇죠. 60-70년대 어려울 때는 정말 추위나 어느 부위를 가리기 위해서 옷을 입고 살아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이나 앞으로는 정말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멋을 부려야만 비즈니스나 자기 활동하는 데 어떤 성공의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큼 패션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요즘은 패션감각도 경쟁력이잖아요.

    그럼요. 입사시험을 보든지 비즈니스에서 미팅을 할 때 보더라도 깔끔하게 옷차림을 잘 입고 인상이 단정하면 아무래도 유리하게 되고 비즈니스 할 때 도움이 되는 거죠.

    ▶ 국내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라는 이야기를 들으시는데요. 남성복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좀 갑갑하지는 않으세요? 분야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사실 어떤 때는 여성복을 했었는데, 제가 남성복으로 처음 시작을 하다보니까 매스컴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라고 타이틀을 붙여주었어요. 그런데 사실 외국의 경우는 그냥 ‘디자이너 ○○○’라고 소개를 하는데, 이상하게 저를 소개할 때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라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제가 거의 남성복 디자이너 1호가 되버렸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단어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불리는 것 같아요.

    ▶ 그럼 우리나라에 남성복 디자이너가 많이 안 계셨나요?

    제가 처음 시작했던 20년 전에는 물론 몇 분 있었어요. 그런데 끝까지 활동을 안하니까 제가 1호가 되버렸어요. 그리고 사실 제가 오픈하기 전에 몇 분들이 했었는데, 그 분들이 여성복과 겸하거나 시장에서 좀 했던 분들인데 결국 하다가 중지하니까, 제가 최초가 되고 제가 대명사처럼 돼버렸어요. 그래서 책임감도 좀 따르고 제가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다행히 또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까, 지금 1년에 두 번 정도 컬렉션을 하는데 한 60명이 그 기간 동안 해요.

    제가 처음에 할 때는 저 혼자 했지만, 지금은 남성복이 절반, 여성복이 절반 정도 하거든요. 그리고 요즘 대학에 의상학과가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예전에는 의상학과에는 여학생이 거의 대부분이었죠. 남학생이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남학생이 더 많아지고, 더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 특별히 남성복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뭔가요?

    전에는 패션이 여성분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을 했고, 멋은 여자가 부리고 돈은 남자가 번다고 생각을 했는데,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니고 바뀌어서 그런지 지금 남자들이 오히려 멋을 부리는 경우가 많고, 특히 젊은이들은 굉장히 멋을 많이 부려요. 프랑스 파리나 미국의 뉴욕을 가지 않더라도 오히려 우리나라가 더 패션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빠르고 더 멋을 부리고 있어요.

    제가 20년 전에 직장을 다닐 때 일본 출장을 갔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 남자들은 멋을 안 부렸는데 일본 남자들은 굉장히 멋을 부리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그 반대로 일본 남자들보다 한국 남자들이 더 멋을 부리고 있고 더 즐기는 것 같아요. 아마 그래서 제가 거기에 일조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남자들도 이제는 자기를 가꾸는 시대니까 자신을 멋있게 표현도 해야하고, 우리가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정말 멋도 알고 능력도 부리고 일도 열심히 하는 그런 남자들이 성공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많아 디자인과 의상을 전공

    ▶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소질이 어릴 때부터 있으셨나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어요. 지금은 아파트 주위에 미술학원도 많이 있는데,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따로 레슨을 받거나 한 적이 없는데도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제가 제일 잘 그려서 선생님이 항상 칭찬을 해주셨어요. 또, 사생대회에 나가면 제가 꼭 최고상을 받곤 했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림 재주가 좀 많았던 것 같고요. 또 다른 남학생에 비해서 옷차림이나 외모에 좀 신경을 쓰지 않았나 싶어요.

    ▶ 어릴 때는 어떻게 자랐나요?

    제가 태어난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인데요. 제가 자란 곳은 평야도 있고, 뒤에 산도 있고, 조금 나가면 바다도 있어서 굉장히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그래서 도자기나 시, 문학, 음식이 굉장히 발달한 곳이죠. 그리고 저는 일찍 서울에 왔는데, 제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또 지금도 가끔 고향 생각을 하죠.

    생각을 해보면 그 어릴 때의 감성이 지금도 많이 작용을 해요. 꽃밭에서 꽃을 본 것이라든가, 아니면 고즈넉한 들녘이라든가, 들꽃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추억으로 되살아나거든요. 지금은 전부 아파트나 도시지역에서 어린 아이들이 뛰놀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저런 자연과 어우러져서 자라면 훨씬 감성도 좋을 것 같고, 저처럼 예술이나 파인 아트(fine arts)를 하게 되더라도 그 온점은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어요.그런 면에서 저는 그 당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제가 대인 관계나 일을 하면서 지치고 힘들 때 가끔 고향 생각을 하면 맑은 하늘을 보는 것처럼 굉장히 깨끗해져요.

    ▶ 예전 부모님들은 보통 아들이 디자이너 보다는 판, 검사나 의사가 되길 바라곤 하셨는데요. 부모님은 어떠셨어요?

    제가 일찍 서울로 유학을 왔는데, 집에서는 디자이너가 되라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지는 않았죠. 너는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고 똑똑하니까 의사나 판, 검사가 되라고 하셨죠. 또 그 당시에는 그런 직업을 선호했었죠. 지금은 다르지만요. 그런데 저도 그런 꿈을 안고 서울에 와서 열심히 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야, 너는 그림을 그려야겠다. 수업 끝나고 내 방으로 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색깔 쓰는 것이라든가 그림 그리는 방법이 독특하다. 너는 다른 것 하지 말고 미대를 가라.”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네. 알겠습니다.” 해서 그 선생님께 레슨도 받고 미대에 갈 준비를 했는데, 제가 1차에서 떨어졌어요. S대 서양학과를 봤는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다시는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생각을 하고, 2차 시험을 본 것이 디자인 대학을 가게 되었어요. 제가 그 대학을 들어갈 때는 그래픽 디자인으로 들어갔어요.

    사실 제가 의상디자인학과를 지원하려고 했는데, 남학생을 안 뽑는 거예요. 오직 여학생만 뽑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측에서 미술학과로 시험을 보고 부전공으로 의상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부전공은 남녀가 상관이 없대요. 그래서 제가 부전공으로 의상을 이수했는데, 제가 졸업할 때쯤에는 남녀공학이 되어서 후배로 남학생이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해서 제가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을 했고, 부전공으로 의상을 했죠.

    ▶ 혹시 대학교 다닐 때 영화배우 되라는 말 안 들었습니까? 보니까 정말 미남이신데요.

    감사합니다.(웃음) 아마 키가 작아서 그런 쪽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하여튼 학교 다닐 때 여학생들이 저한테 관심을 많이 가졌고, 자주 저를 쳐다봤어요. 잘생겼다고 쳐다보기도 하고, “근데 키가 좀 작다.”하는 이야기도 하고 했는데, 귀엽게 잘 생겼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어요.

    ▶ 손석희 씨와 친구가 되었던 것은 언제인가요?

    제가 입시 전에 독서실을 다녔는데, 제가 나온 고등학교와 석희가 나온 고등학교는 같은 곳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같은 독서실에서 2차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바로 제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우연하게 알게 되었죠.

    ▶ 어떻게 두 미남이 나란히 옆자리였나요?

    석희도 정말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독서실에서 얘기하면서 후기 대학을 같이 시험을 보게 되어서 같은 학교를 다녔죠. 그리고 졸업 후에 MBC 시험을 같이 봤는데, 저는 미대를 나왔으니까 무대 미술로 시험을 봐서 합격은 했는데, 입사를 안 하고 대학원을 갔어요. 그리고 석희는 아나운서를 해서 계속 지금처럼 유명한 아나운서가 되었고요.

    ▶ 학창시절 때도 남다른 데가 있었나봐요. 카니발 파트너로 중년 부인을 모시고 갔었다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인가요?

    대학을 다니면서 축제가 있었는데요. 여학생이 대부분이고 남학생이 몇 명 안 됐어요. 그래서 특별히 여자친구를 안 사귀어도 주위가 다 여학생이니까 같이 놀고 작업도 하고 MT를 가도 여학생들이 항상 있기 때문에 별로 여학생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3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축제기간 중에 댄싱파티가 있었는데, 파트너를 꼭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사귀던 여학생도 없었고 우리 과 여학생한테 대신 해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제가 그 당시 정릉에 살았는데 저희 집 근처에 유치원이 하나 있었어요. ‘금잔디 유치원’이라고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그 때 학교 오고 가면서 그 유치원 앞을 지나서 가는데 유치원을 이렇게 보면 40대 후반 정도의 중년 여자분께서 그 병아리같은 아이들과 같이 무용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가끔 봤어요.

    그 모습이 제 눈에는 너무 완벽하고 멋있는 여자인 거예요. ‘참 괜찮다, 우리 어머니 보다는 젊으신 것 같은데. 저렇게 나이 들어도 멋있게 늙는구나.’ 하는 것을 제가 느꼈죠. 그러다가 축제 때 제가 ‘아, 이 분한테 내가 프러포즈를 해서 축제 때 파트너로 한 번 모셔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 취향이 나이든 분을 좋아하거나 한 것은 아닌데, 단지 축제 파트너로 한 번 내가 부탁을 하면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고 갔어요.

    다행히 흔쾌히 승낙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축제 날 제가 모시고 학교에 가려고 금잔디 유치원을 갔는데, 그 분이 까만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머플러를 목에 메고 머리는 쪽을 하고 준비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학교까지는 걸어갈 정도의 거리니까 같이 걸어가면서 저는 어디서 태어났고, 형제는 어떻게 되고, 부모는 누구고, 지금 무슨 과를 전공하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파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학교를 갔는데, 여자 교수님들이 그 분을 다 알아 보시는 거예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유명하신 분이었어요. ‘전혜금’ 여사께서 말이죠. 그래서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죠.

    ▶ ‘전혜금’ 여사는 작곡가 금수현 선생님의 사모님이시죠?

    네. 그리고 지휘자 금난새 선생님의 어머니시고요. 그래서 그 때 기억으로는 정말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어요. 다른 학생들은 다 우리 또래의 여학생, 남학생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데, 저는 어머니 같은 분과 춤을 추니까, 다들 너무 좋아하시고 여자 교수님들도 나와서 박수치고 좋아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 어릴 때부터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남과는 좀 다르게 보는 특성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지나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 당시 여학생을 소개 받아서 갈 수도 있는데, 어머니 또래의 너무나도 멋있고 훌륭하신 사모님을 파트너로 했다는 아이디어가 좀 당돌했죠.(웃음)

    ▶ 그래서 금난새 씨와도 좋은 인연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네. 오랫동안 제가 해 준 옷을 입고 지금도 지휘를 하시죠.

    ▶ 돈은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죠.(웃음) 제가 선물한 옷도 있고, 아무래도 비즈니스니까 돈도 받아야 되고요. 또 제 와이프가 성악가이다 보니까 연주회를 같이 하는 기회가 있어서 무대 뒤에서 전혜금 여사님과 아들인 금난새 선생님, 또 저와 와이프랑 만나서 “사모님, 그 때 우리가 파트너였죠.”하면서 웃고 했던 적도 있어요.

    ▶ 양방언씨도 장광효 씨의 디자인에 매료된 분들 중의 한 분이신가요?

    양방언씨는 한국인인데 일본에서 활동하고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교포 음악가죠. 1년에 대여섯 번 정도 한국에 와서 좋은 연주회를 하고, 잡지 인터뷰도 하는데요. 올 때마다 저희 사무실에 들러서 저와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제가 해준 옷을 굉장히 좋아하면서 입어요.

    그리고 저의 감성이 양방언씨의 음악 세계와 맞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물론 저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양방언씨도 저의 감성을 이해하고 굉장히 소중하게 제 옷을 좋아하세요. 그래서 답답할 때나 음악을 듣고 싶을 때, TV 배경음악으로 양방언씨의 음악이 나오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제가 이런 일을 하다보니 장르는 틀리지만 좋은 분들과 내 옷으로써 공유하는구나 하고 굉장히 행복하게 생각을 하죠.

    ◇ 파리 유학, 직장생활 끝에 ‘카루소’ 남성복 브랜드 출시

    ▶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프랑스를 가신 건가요?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비행기 티켓을 끊어서 프랑스 파리를 가는데, 그 때 공부를 하다보니 프랑스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었어요.

    ▶ 그 때가 몇 년도였나요?

    1980년대 초반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였죠. 에펠탑도 가보고 싶고, 샹제리제도 걷고 싶고, 거기서 살고도 싶은 그런 욕망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렵게 갔죠. 가서 파리지엥이 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 곳에서 아트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도 했고, 패션의 본고장에 대한 이해도 정말 피부로 느꼈고, 또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것도 느꼈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왔어요.

    ▶ 거기서 얼마동안 공부를 하신 거예요?

    1년 정도 했죠.

    ▶ 명품이 많은 프랑스인데, 정작 프랑스인들은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프랑스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는 건 왜 그런 건가요?

    물론 동양인에 비해서 체형이 우수한 편이죠. 얼굴이 작고 다리가 기니까요. 그런데 유럽인 중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좀 동양인처럼 키가 작은 편이예요. 제가 거기서 보고 나중에 파리 컬렉션 때문에 다녀보면서 관여를 하다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명품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글에도 그런 내용을 썼어요. 우리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명품으로 휘감는 것은 사실 꼴사납다, 물론 명품은 좋죠. 저는 가격대비해서 명품이 좋다는 생각은 하는데, 너무 명품을 치장을 하면 멋자랑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 않고 멋이 없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본인만의 개성이라든가 스타일이라든가 라이프스타일을 문화적으로 많이 축적을 시켜서 본인이 세련되면 구태여 명품을 안 둘러도 그 몸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라든가 문화가 명품이 되거든요.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정말 멋이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 배선생님처럼 목소리가 좋다든가 아니면 정말 옷을 명품이 아닌 빈티지하게 입었지만 그 옷과 본인의 느낌이 맞아 떨어져서 상대방에게 멋으로 보이게 한다든가, 아니면 그 사람의 생활철학이라든가 좋아하는 기호라든가 취미라든가 하는 것들이 굉장히 고상하고 멋있게 보였을 때 멋이 더욱 더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프랑스 사람이나 이태리 사람들이 꾸미지 않아도 멋있게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디자인 하는 제가 스스로 느꼈거든요. 그래서 이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이 멋을 좀 부린다고 한다면 꼭 물질적으로 명품을 사서 멋을 부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본인의 건강이라든가 운동이라든가 본인의 기호라든가 좋아하는 취미라든가 친구들과의 대화라든가 그런 것을 좀 더 품위있고 멋있게 꾸미면 거기에서 우러나왔을 때 진정한 멋이 되지 않나라고 제가 자신있게 이야기 하고 싶어요.

    그래서 프랑스나 유럽의 선진국 사람들을 보면 정말 부자집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정말 검소하게 멋을 부리거든요. 그리고 그런 명품을 과연 누가 사는가 하면 그 쪽의 왕족이나 귀족, 스타나 동양인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여기서 돈 안쓰고 거기서 쇼핑을 해와서 멋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것도 나쁘다고는 생각안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하고 거기서 터득하는 품질이라든가 센스라든가 깐깐한 안목이 우리의 실력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실력을 갖춘 대한민국 국민들이 많이 있는 한 우리나라 디자이너들도 거기에 맞게 노력을 해야하지 않나 싶어요.

    ▶ 그럼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남성복 디자인을 하신 건가요?

    그렇죠. 제가 여성복도 할 수 있고 여성복 업체에 취직할 수도 있었지만, 제가 선진국에서 봤던 남자들의 옷차림이라든가 우리나라 남자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남성복 업체에 취직을 했어요. 거기서 제가 테일러링, 남자 옷을 정확히 배우면서 시작을 해서 오늘날 장광효가 탄생을 한 것 같아요.

    ▶ 거기서는 얼마동안 근무를 하신 건가요?

    1년 좀 넘게 했어요. ‘캠브리지’라는 남성복 업체에서 정장을 제대로 배우면서 제가 직장생활을 시작했죠.

    ▶ ‘카루소’를 탄생시킨 것은 언제였죠?

    캠브리지에서 첫 직장을 다니다가, 삼성에서 저를 스카웃해서 삼성에서도 좀 근무를 하다가, ‘논노’에서 남성복을 출시한다고 해서 또 스카웃을 해갔어요. 그래서 저는 그 당시 남성복 디자이너가 드물기 때문에 브랜드를 하나 만들면 아마 스카웃 제시 1순위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업그레이드해서 스카웃해서 제가 논노까지 가게 되었죠. 논노에서 남성복을 출시하는데 좀 와달라고 해서 제가 논노에서 마지막으로 근무를 하고, 그 다음에 ‘카루소’라는 제 브랜드를 탄생시켰죠. 그 때가 1987년 9월이었어요.

    ▶ ‘카루소’라는 브랜드는 테너 카루소와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 시대에 브랜드 네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음악용어에서 많이 하는 유행 경향이 있었어요. 특히 일본 브랜드를 보면 음악용어에서 많이 따와서 하는데, 제 처가 음악을 하니까 남성복에 어울릴 만한 브랜드 이름이 없을까 물어봤더니 바로 “카루소”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금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엔리코 카루소’라고 파바로티나 도밍고보다 더 노래를 잘한 선배라고 보면 되죠. 발음도 정확하고 음악용어 치고는 세 단어가 딱 떨어져서 저도 그냥 주저없이 ‘카루소’로 했죠. 그런데 그 단어에 포함된 의미는, 카루소가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했고, 노래로 생을 마친 그 열정을 제가 이어받아야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뜻에 맞게 ‘카루소’옷도 했고, 열정적으로 제 삶을 거기에 맞춰 살고 있지 않나 싶어요.

    ◇ 조용필, 소방차, 임하룡, 서태지 등 스타들이 찾는 매장으로 성장

    ▶ 1987년 이때쯤만 해도 프랑스에서 ‘오뜨 꾸뛰르’라고 맞춤복의 형태가 많지 않았나요?

    네. ‘프레타 포르테’, ‘오뜨 꾸뛰르’ 2가지의 형태로 컬렉션을 하는데, 오뜨 꾸뛰르 라고 하면 맞춤복이라고 하고, 프레타 포르테는 많이 생산해서 대중들이 많이 입을 수 있는 산업화시킨 옷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지금도 꾸뛰르 컬렉션이 있고 포르테 컬렉션이 있죠.

    ▶ 우리나라도 그 때 이미 남성들도 기성복 쪽을 선호하던 때 아닌가요?

    우리나라 패션 역사를 간단하게 이야기 한다면, 1960년대, 1970년대까지 프레타 포르테 형태의 옷은 거의 없었어요. 물론 일부 있었지만, 거의 맞춤복이었다고 보면 되죠.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맞춤복을 하던 디자이너 분들이 외국에 맞춰서 기성화를 시켰죠. 그래서 매장 하나만 가지고 단골들과 맞춤형태로 하던 디자이너 분들이 1970년대말부터 백화점이나 대리점으로 영역을 넓히다 보니까 기성복화해서 대량생산하게 되어서 대중화가 되었죠.

    ▶ 그 때 우리나라 남성들의 패션감각은 어땠나요?

    제가 직장을 좀 다니다가 제 브랜드를 했는데요. 직장 다닐 때 정말 남성복 옷장사가 잘 되었어요. 물론 그 전에 좀 어렵게 살다가 점점 잘 살게 되니까 아무래도 옷에 신경을 쓰게 되고 옷차림에 돈을 투자하게 되는데 옷이 없었어요. 그래서 남성복을 만들면 정말 옷이 불티나게 잘 나가던 시대였죠.

    그런데 제가 디자인을 하다보니까 너무 무난한 옷만 하는 거예요. 그냥 기본 정장, 기본 캐주얼만 하는데,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보통 우리가 캐릭터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라고 하는데요. 그런 옷을 제가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제가 1987년 9월에 압구정동에 매장을 열어서 윈도우에 캐릭터 있는 옷을 걸어놓았더니, 지나가다가 와서 너무 좋다면서 사가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인들이 입기 어려운 색상이나 어려운 패턴이었어요. 무대에 올라가서 입기에 괜찮겠다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들이 소화하기 너무 힘든 색상이라든가 디테일이었는데, 그것이 입소문이 나서 방송가와 연예계에 금방 소문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 ‘조용필’씨 하면 지금의 ‘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말 가창력과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남성복 디자이너로서 그 분 옷을 해준다면 정말 원이 없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 분이 오셨어요. 와서 대화하면서 옷을 하게 되었죠.

    그 당시 조용필 씨가 한류의 원조였죠. 일본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한국에서 도 활동을 했는데, 일본에서 방송을 하면 방송국의 조명이 무슨 색상이니까 어떤 색상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서로 상의해서 옷을 한꺼번에 한 10벌 정도를 하게 되죠. 그렇게 십 몇 년을 쭉 하다보니까 그 사이에 정말 우리나라 연예인들은 거의 90% 이상 제가 옷을 하게 되었고요.

    ▶ 어떻게 보면 스타마케팅을 패션계에서는 최초로 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런 용어도 없었죠. 그리고 지금은 코디네이터나 스타일리스트가 와서 거의 협찬으로 하는 것이지 연예인을 직접 만나서 옷을 할 수는 없어요. 친분이 있거나 큰 무대가 아니라면 직접 만나서 옷을 하기는 어려운데, 그 당시에는 연예인이 직접 와서 구매를 했던 시대예요. 그래서 전시매장 앞에 한 열댓 명 정도는 항시 서서 연예인을 기다리고 있고 했었죠.

    ▶ 가수 ‘소방차’의 승마 바지도 그 때 나온 건가요?

    그 때 초창기에 소방차 멤버들이 대전에서 합숙을 하면서 노래연습도 하고 춤연습도 하는데, 그 대표 되시는 분이 저한테 와서 이러한 컨셉을 가지고 그룹이 나오는데 옷을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와서 보니 하나는 늘씬하고, 하나는 뚱뚱하고, 하나는 적당하게 생긴 귀여운 아이들이 왔는데 지금의 ‘소방차’였죠.

    곧 방송을 시작하는데 옷을 좀 해달라고 해서 제가 보고 저희 매장에서 한 번 춤을 쳐보라고 했어요.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구상을 해서 승마바지를 제가 디자인해서 입혀서 정말 그 때 젊은이들에게 대단했었죠. 그래서 전국각지에서 멋 좀 부리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다 저희 매장에 와서 소방차가 입었던 옷, 구두, 악서세리 다 달라고 했어요.

    ▶ 서태지 씨도 오셨다면서요.

    서태지 씨도 대단했었죠. 그 옷을 제가 거의 다 했고, 개그맨 임하룡 씨도 처음에 뵈었을 때는 정말 더벅머리에 너무 빈티지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좀 바꿔서 개그맨 출신의 베스트드레서는 아마 그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어요.

    ▶ 그럼 의상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신 건가요?

    디자이너가 옷만 그냥 팔면 안 되었어요. 인간관계도 같이 갖고, 저녁도 같이 먹으면서 대화도 하고 했었죠. 그러면서 “헤어스타일이 좀 그런데 내가 아는 디자이너가 잘하니까 한 번 가서 해보라.”고 하면서 머리 스타일도 좀 바꿔주고 하는 가교 역할을 했죠. 그렇게 하다보니까 제가 어느새 유명해진 거예요. 비즈니스도 잘 되고요.

    그런데 디자이너로서 복이 있는 것이, 같은 옷을 하더라도 유명한 사람을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자연스럽게, 제가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유명한 사람들이 서로 해달라고 할 정도로 와서 제 디자인 생활을 하는데 즐겁고 풍요롭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까지도 주위에 연예인 스타들이 항시 들끓어서 저는 좀 복이 많은 디자이너가 아닌가 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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