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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 했을 때, 아프리카 마사이 마을의 축제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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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승 했을 때, 아프리카 마사이 마을의 축제 같았죠"

    • 2007-12-04 14:46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태양을 향해 쏴라, 청각장애아 야구부 만든 조일연 씨

     

    2004년도인가요, 순수 아마추어로 구성된 서울대 야구부가 199패 끝에 첫 승을 거둬서 화제가 됐었는데요. 서울대 야구부처럼 고등학교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팀이 있습니다. 충주에 있는 성심학교 야구부인데요. 이 야구부의 선수들은 듣지 못해서 말을 못하는 청각 장애인 학생들입니다.

    창단 6년째인 성심학교 야구부를 처음 만든 조일연 씨. 당시 이 학교의 교감이었던 그는 청각장애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주고, 사는 재미를 주고, 직업을 주기 위해서 야구를 가르쳤습니다. 들리지 않아 날아오는 공에 맞기도 하고, 야구공과 방망이도 부족했습니다. 수없이 콜드게임 패를 당했지만 야구를 통해 희망을 쏘아 올렸습니다.

    또 그는 국내 첫 농아인 야구대회를 만들어냈고, 내년 10월 아시아 농아인 야구대회를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야구는 갠지스 강물의 소리 같은 겁니다” 라고 말하는 조일연 전 성심학교 교감 선생님을 12월 3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전국적으로 농아인 야구팀은 단 네 곳뿐

    [BestNocut_R]▶ 충주에서 오신건가요? 충주도 아주 아름다운 도시죠?

    충주에 호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충주를 떠날 때마다 여기를 왜 떠나나 할 정도로 아주 아름다운 곳이고 좋습니다.

    ▶ 지난 11월 23일 국내 첫 ‘농아인 야구대회’가 있었죠. 어떤 팀들이 참가했나요?

    충주 성심학교 팀하고, 천안에 있는 STS 피닉스라는 팀과 청주의 드래곤 이어스, 시흥 장애인 복지관이 만든 로터스 팀이 있었습니다. 드래곤 이어스팀의 이름을 보면, 농아인의 ‘농’자가 한자로 보면 ‘용 용(龍)’자 밑에 ‘귀 이(耳)’입니다. ‘용의 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제가 지어준 이름이죠.

    ▶ 이 대회를 만드시느라고 뒤에서 애 많이 쓰셨죠?

    제가 8월말에 학교를 명예퇴직 했거든요. 그리고는 여기에 매달려서 어렵게 성사시켰죠.

    ▶ 그래도 네 팀이나 있다는 것이 아주 고맙게 생각이 되는데요.

    성심학교는 학교 팀이니까 원래 있었고요. 나머지 드래곤 이어스나 천안의 STS는 성심 졸업생들이 만든 팀입니다. 하나 고무적인 것은 로터스팀은 성심학교 출신이 아닌 순수한 다른 농아학교 출신들인데요. 농아인들도 야구를 좋아하고 저변에 넓어지다 보니까 이번에 팀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급격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농아인들이 하는 스포츠가 야구 말고 또 어떤 것이 있나요?

    야구를 취미로 할 수는 있겠지만 성심학교가 했던 것은 엘리트 스포츠를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농아인들이 일반인들과 같이 경기를 하는 것은 배드민턴 정도 있습니다. 탁구도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까지는 대회에 나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농아라는 핸디캡이나 제약이 있어도 어떤 스포츠라도 가능한 겁니까?

    농아인들은 원래 눈으로 보는 것을 잘하거든요. 그래서 운동 기능이 좋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스포츠는 농아인들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어울리고 잘 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 중에서도 축구 같은 경우는 제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안 가진 것은, 축구는 시합을 할 때 작전 지시가 언어로 되잖아요. 심판의 콜도 그렇고요. 그렇게 소리를 많이 듣는 것이기 때문에요. 반면에 야구는 싸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단 야구가 좀 더 가깝다고 생각을 해서 시작했죠.

    ▶ 성심학교는 ‘엘리트 스포츠’를 한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입니까?

    보통 학교에서 아이들이 취미로 적성교육 차원에서 하는 운동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탁구반 아이들은 그냥 특별활동 시간에 일주일에 한 두 번 취미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에 반해서 정식 탁구부를 만들어서 직업스포츠 선수를 키운다고 하면 그것이 엘리트 스포츠겠죠. 농아학교 야구부는 엘리트 스포츠로 시작을 한 겁니다. 프로까지 바라보고 시작한 거죠.

    ▶ 충주 성심학교를 퇴직하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이유는 여러 가지였어요. 제가 학교에 교감으로 한 13년을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학교의 구조상 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으면 학교에서 순환의 문제도 있고요. 또 하나는 개인으로서도 물론 교육자로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이가 좀 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졌던 꿈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 그만 두실 때 아이들이 많이 울었을 것 같아요.

    아이들도 많이 울고, 저도 사실 제가 운다는 생각을 안 해봤었는데 그만두는 날 감정적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 다른 일반 제자들보다는 더 심정적으로 다른 마음이셨을 것 같아요.

    제가 성심학교를 처음 간 것이 대학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거든요. 시골에 있는 작은 중소 도시의 학교에 제가 처음으로 간 교생이었어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거의 30년 정도 있게 되었는데요. 제가 농아인들에 대한 애정, 어떻게 보면 제 삶의 가장 길고 깊은 것이었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 야구를 통해 아이들에게 사회에서의 적응력을 키워주고자 시작

    ▶ 왜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야구가 저의 꿈이었거든요. 어렸을 때 제가 야구를 잠깐 배웠는데, 그 당시에는 야구 같은 운동을 하면 굶어죽는다고 해서 제가 타의에 의해서 그만 두게 되었어요. 그래도 평생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길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러면서 야구에 대한 미련도 있고 야구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는데요. 나중에 농아학교에 가서 있다보니까 아이들이 야구 같은 운동을 접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운동이니까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농아인들이 듣지 못하고 언어력도 약하고 문장력과 학업능력이 떨어지니까 이 사람들이 일반인들과 똑같이 공부를 해서는 사회에 나가 설 때 성공하기 어렵거든요.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서 입증이 됩니다. 그

    래서 제가 이번에 쓴 책에도 그런 내용을 썼어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은 언어인데, 농아는 그 규칙 속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룰이 지배하는 경기를 마련하자. 그것이 야구였습니다.

    ▶ 학교나 부모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제가 아이들에게 일단 취미로 야구를 가르쳤는데요. 아이들은 야구를 해 본 경험도 없고, 제가 생각한 것은 엘리트 스포츠인데 학교 선생님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특수학교에서는 야구라는 운동을 감당할 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시작부터 쉽지는 않았죠. 축구 같은 것은 사실 공 하나 가져다주면 막 뛰어다니면서 재밌게 차는데, 야구는 규칙도 알아야 하고 다칠 염려도 있어서 아이들이 하기가 쉽지 않았죠.

    ▶ 학부모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제가 야구부를 창단한다고 학교운영위원회에 의제를 올렸을 때 부모님들은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그분들이 야구하는데 힘을 많이 모아주셨어요. 그렇지만 부모님들 중에는 농아인들도 많이 계시고 가정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다보니까 많이 도움을 주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선수들이 금방 모아졌습니까?

    저희가 2002년도에 창단했지만 사실 5-6년 전부터 준비를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교감을 했지만 체육수업을 직접 하겠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운동장에서 체육시간에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가르쳤어요. 그렇게 하면서 규칙도 가르치고 야구에 대한 흥미도 갖게 하고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하나 둘 준비를 시켰죠. 야구를 해서 야구 선수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죠. 야구부를 만든다고 공고를 했을 때는 아이들은 저와 묵계(黙契)가 되어 있었어요.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고 알고 있었죠.

    ▶ 농아인들에게 ‘열(10) 살의 벽’이라는 것이 있다고요?

    학문적으로 ‘열 살의 벽’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을 수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농아인들의 언어능력이나 문장능력이나 학업능력 발달에 대한 연구를 해보면,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대부분의 나라에서의 연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 고학력 농아인들의 평균적인 학업능력이나 문장 이해력이 초등학교 2학년 정도로 봅니다.

    결국 그것이 열 살 정도로 보는 것이거든요. 달리 말한다면 평균적인 선천적인 농아인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열 살 수준을 넘어서기가 어렵다고 해서 우리 교육자들이 ‘열 살의 벽’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 목표를 설정할 때도 농교육자들은 좀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아이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출발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 하일성 씨와도 만나서 이야기 하실 기회가 있으셨다고요.

    충주라는 도시라는 자체가 야구의 불모지거든요. 그래서 저와 야구를 먼저 하신 선배들 몇 분이 계신데, 그 분들이 1995년에 충주에서 사회인 아마추어 야구단을 만들었거든요. 거기에 계신 한 분이 하일성 KBO 사무총장과 친구가 되세요. 그래서 가끔 하 총장님이 내려오셔서 제가 그 때 몇 번 뵙고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 당시에는 KBS 해설위원이셨는데,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일본에 야구 때문에 가보니까, 일본의 농아인들이 야구를 하고 있는데 알고 있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전에도 야구팀을 한 번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어렴풋이 준비해왔는데, 일본에서 그런 야구가 이미 시작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습니다.

    ▶ 일본도 엘리트 스포츠랍니까? 아니면 취미로 하는 건가요?

    일본은 워낙 야구가 국기(國技)이기 때문에 야구는 오래전부터 했는데요. 지금도 일본에는 농아인 야구가 클럽활동으로 하고 있지만 엘리트 스포츠는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1980년대 초반에 오키나와 고등농학교에 저희 같은 야구팀이 한 번 생겼었어요.

    그 팀이 3년 정도 존속을 했는데, ‘고시엔’ 대회라고 일본 전국 고등학교 대회에 출전목표로 해서 3년 정도 도전을 하다가 결국은 1승을 올리지 못하고 나중에 팀이 해체 되었죠. 그런 스토리가 ‘머나먼 갑자원’이라고 하는 만화도 나왔고, 영화, 연극도 나왔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조일연 선생님이 처음 시도를 하신 거죠.

    그렇다고 볼 수 있죠.

    ◇ 처음엔 공과 배트도 다 얻어다 쓰기도

     

    ▶ 처음 시작하실 때 어떤 것이 제일 어렵던가요?

    제일 어려운 것은 주변에서 농아인들이 왜 야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저하고 공감대가 생기기 어려웠던 점 때문에 초반에 힘들었는데, 물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는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셨어요. 또 아이들이 복잡한 룰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또 가장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은 야구가 돈이 드는 운동인데, 야구공 하나 마련하는 문제, 유니폼이라든가 아이들 운동하면서 삼겹살이라도 한 번 먹이는 문제들이 저희들에게 많이 어려웠습니다.

    ▶ 가르치는 것에서는 어떤 것이 어려웠나요?

    야구 룰을 가르치는 것이 많이 복잡하거든요. 야구 룰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되는데, 일반인들도 복잡한 것을 단지 수화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처음에는 불가능 할 줄 알았어요. 농아인들이 수화를 가지고 있지만, 수화라는 것은 워낙 개념이 우리가 말하는 것에 1:1 대응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설명하는 개념을 수화로 설명해도 그런 언어적인 개념이 농아인들에게 심어져 있지 못한 경우는 이해가 절대 안 되거든요. 그런 것이 어려웠죠.

    ▶ 수화를 통한다고 해도 세세한 부분은 잘 전달이 안되는 건가요?

    그것이 수화의 언어적인 한계인데요. 예를 들어 감독이 아이들에게 투구 요령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던질 때는 몸의 무게 중심을 이동해서...”라는 말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수화로 통역을 해주는데, ‘무게’라는 말이 물론 수화에 있고요. ‘중심’이라는 말이 수화에 있는데, 그 분이 말하는 ‘무게 중심’이라는 개념이 수화에는 없습니다. ‘무게’와 ‘중심’이 합쳐진 그런 뉘앙스의 말로 안되기 때문에 어려웠죠.

    나중에 그런 것들을 넘어선 것은 결국 아이들에게 그것을 언어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여러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어떤 통찰을 가지고 감독이나 선생님이 말한 것을 보면서 깨우치면 자기 나름대로 나머지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거든요. 수화로 자기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되더라고요.

    ▶ 그런 과정에서 팀원들끼리의 우정, 동료애가 생긴 것도 큰 가치가 있는 과정이었겠어요?

    사실 농아인들은 겉으로 봐서는 장애인 같지 않잖아요? 듣지 못하는 것은 이 아이들이 수화를 쓰거나 누구와 대화를 시작할 때 대할 수 있고, 겉모양 건강하고 잘 생겼기 때문에 장애인인지를 잘 모르는데요. 농아인들은 그런 겉모양과는 달리 굉장히 의지도 약하고 일반인들처럼 목적의식이나 그런 것들이 부족한 것이 있거든요. 그래서 힘든 운동을 오래 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없던 경험이다보니 어려워서 처음에는 그만 두는 아이들이 많았죠.

    또 함께 협동하고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워낙 생소했기 때문에 시작할 때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단체 경기를 하면서 함께 고락을 같이 하면서는 이 아이들이 전에 없던 것을 배우게 되었죠. 사실 교실에서 하는 교육도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우리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더 빨리 체득한 것 같습니다.

    ▶ 재정적인 문제로 많이 힘드셨을 텐데요. 그래서 “내가 야구공 도둑이었다” 하는 이야기도 하셨다고 하는데요.

    하나의 에피소드인데요. 처음에 감독이 없을 때는 제가 아이들을 가르쳤거든요. 그 때는 공도 없고 배트도 없어서 주로 얻어서 썼는데요. 공도 새 것은 본 적도 없었고 새까맣게 때 묻은 공을 얻어서 썼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사회인 야구회의 고문 노릇을 했는데요. 일요일날 야구 경기가 있으면 제가 가서 구경도 하고 심판도 봐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시합 하다가 새 공이 파울로 넘어가는 것을 봤는데 그것을 주으러 가는 사람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주워주러 갔습니다. 넘어간 공 몇 개를 주어서 그라운드로 던져주었는데 보니까 저쪽에 새 공 두 어개가 있더라고요. 그것을 보니까 우리 야구부 아이들에게 새 공을 좀 주고 싶은데,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오자니 꼭 훔치는 것 같아서 가지고 나오지 못하고 외야 펜스 너머에 있는 폐타이어 안에 넣어두었어요.

    오늘은 그냥 넣어두고 내일 야구부 연습 나왔을 때 꺼내서 쓰자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 날 밤에 밤새도록 비가 왔어요. 그래서 공이 물에 젖을 것 같았는데, 정말 그 다음날 우리 아이들과 같이 나갔더니 폐타이어 안에 물이 차서 공이 퉁퉁 불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실 도둑질 아닌 도둑질을 했는데 그나마 성공도 못하고 만 것이죠.

    ▶ 연습한 지 얼마만에 시합에 나가게 된 건가요?

    저희가 국내 고교팀 중 57번째 팀입니다. 정식 연습을 한 것은 2002년 봄부터 시작했고, 2002년 9월 달에 창단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1년 후에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다 참가하는 봉황기 야구대회에 나가겠다고 공언을 했는데, 결국 그 약속대로 2003년도 8월 달에 팀 창단 11개월만에 그 대회에 출전 했습니다.

    ▶ 첫 시합은 어느 구장에서 하셨나요?

    동대문야구장에서 했습니다.

    ▶ 아이들이 그 구장에 처음 들어갈 때, 그 표정들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아이들보다 제가 더 감격을 했고요. 사실은 1년 후에 대회에 나간다는 공언을 한 다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이 ‘정말 공수표다’, ‘안 되는 것을 내가 이야기 했구나’ 하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처음에는 빠르게 실력이 늘어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지부진하고, 나중에 2003년도 상반기에 일반 아마추어 사회인 야구팀과 했을 때도 그냥 게임도 안되게 졌거든요. 그래서 2003년 8월 대회를 앞두고 5월, 6월까지도 저희가 대회를 나가야겠는가 회의를 많이 했고요.

    그래서 저희와 연습경기를 하는 팀의 감독들에게 대회를 나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야구라는 것이 차이가 많이 나는 팀과 경기를 하면 100:0이나 200:0도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야구를 시작하는 이 아이들에게 정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어서 싹을 꺾는 것이 아닌가 하더라고요.

    저도 그런 생각 때문에 고민을 했지만, 나중에 대회 앞두고는 감독님의 특별한 지도로 인해서 짧은 기간에 많이 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변의 만류, 걱정, 어려운 가운데 도와준 분들의 도움으로 왔는데 만약에 여기서 대회를 나가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농아인들이 전국대회에 나간다는 그 꿈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나가는 것으로 결행했습니다.

    ▶ 첫 시합을 어느 팀과 했습니까?

    성남서고와 했거든요. 성남서고는 전국대회 4강도 올라가고, 아주 저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팀이었는데 저희와 첫 경기를 했습니다. 그 첫 경기는 저희가 10:1, 7회 콜드로 졌습니다. 열 점을 주고 한 점을 얻었죠.

    ▶ 그 1점 득점 했을 때의 환희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요.

    그 때 저희 아이가 안타로 1루 나가서, 2루 도루하고, 땅볼로 3루까지 왔다가, 나중에 번트로 해서 한 점을 들어오게 되었죠. 그 날 우리 아이들이 안타 5개를 때려냈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정말 기대 이상의 굉장한 성과였습니다.

    ▶ 1점 득점의 의미가 컸을 것 같은데요. 팀원이나 학부형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오키나와 농학교가 첫 번째 고등학교 대회에 나가서 첫 회에는 1루를 밟아보지 못했거든요. 퍼펙트로 졌던 거죠. 그래서 저희도 1루를 포볼이나 운좋게 안타로 나간다면 저희로서는 아이들에게 그 자체가 의미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날 안타를 5개를 때려내고 득점까지 해서 정말 저희가 기대했던 것의 몇 배 이상의 성과였죠. 아이들도 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스스로 찾게 되었고, 자기 자신에게 놀랐죠. 저도 물론 그랬고요.

    ◇ 창단 3년 만에 연습경기에서 첫 승 이뤄내

    ▶ 연습경기에서 첫 승을 거둔 것은 언제였나요?

    2005년도였다고 기억하는데요. 그것도 저의 모교인 선린상고와의 연습경기에서 첫 승을 거두었어요. 그러니까 선린상고가 저희한테 졌다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저희 아이들이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서 비기는 경기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선린상고에 한 번 이겼고, 강릉고등학교인가 두 번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두 팀이 실력으로 봐서는 우리보다 앞섰겠지만, 상대방을 가볍게 본 것 같아요. 충주 성심학교는 청각장애인이고, 워낙 1승도 못해봤으니까 적당히 해보자고 해서 선발투수가 올라오지 않고 2선발, 3선발이 올라왔는데 저희 아이들이 타격이 좋으니까 초반에 대량득점을 해서 그 팀들이 부랴부랴 쫓아왔지만 뒤집지 못하고 끝난 거죠.

    ▶ 그럴 때 느끼는 보람은 참 대단하셨을 것 같아요.

    예. 저희처럼 가르치는 교사들이 볼 때는 상대방 팀의 작전 미스였던 것 같아요. 감독의 배려일 수도 있고요. 저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에게는 이긴 것이 굉장히 커다란 성취였어요. 이긴 날 저녁에 식사를 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여흥시간이 있었는데요. 아이들이 열광하고 뛰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그 1승의 의미가 굉장히 컸습니다.

    ▶ 어떤 면을 보셨길래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느끼셨나요.

    책에다가 그런 장면을 ‘아프리카 마사이 마을의 축제’라고 썼는데요. 아이들도 이겼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으면서 굉장히 열광했어요. 보통 농아 아이들이 감정 표출에 있어서 소극적인 면이 있는데 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봤습니다. 성취에 대해서 자기 자신들도 믿지 못할 정도로 즐거워했습니다.

    ▶ 부모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에 창단했을 때 지지해주신 분들이 부모님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이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자라면서 학업이나 언어도 그렇고 뭔가 일반 아이들과 비교해서 대등하게 경쟁하고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야구라는 것을 통해서 이 아이들이 절대 약자가 아니고 당당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 많이 지지해주셨고, 마지막까지도 아이들에 대한 기대로 상당히 행복해 하셨습니다.

    ▶ 서울대 야구부와도 경기를 하셨어요?

    서울대 야구부 학생들이 2003년도에 학교로 연락을 했어요. 왜냐하면 저희가 워낙 약한 팀인데 연습경기할 팀이 별로 없거든요. 저희 같은 팀이 다른 고등학교 팀에게 연습경기를 해달라고 하면 그 팀도 대회 나가기 바쁜데 저희와 경기를 잘 안해 줍니다. 비유하자면 아주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열등생들과 같이 해주는 것이니까요.(웃음)

    그래서 그런 것을 서울대 야구부 학생들이 감안해서 먼저 연습상대를 해주겠다고 해서 충주에도 오고 저희가 서울대에도 가고요. 서울대 선수들이 참 다정하고 감사했죠. 보니까 서울대 선수들은 정말 야구를 사랑하는 선수들입니다.

    ▶ 그 경기에서 홈런도 나왔다고요?

    네. 그 때 서울대학교와 시합을 하다가 저희 학교 4번 타자가 때린 공이 첫 번째 홈런이 되었죠.

    ▶ 공이 펜스를 넘어갈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그 아이는 긴장한 탓도 있고 타구음도 듣지 못하니까 때리고 난 다음에 무조건 1루로 뛰었죠. 1루에서 2루로 가면서 슬라이딩을 했는데, 서울대 2루수가 일으켜주면서 홈런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홈으로 걸어들어 왔는데, 그 장면이 어느 기업체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광고를 만들었는데 그 장면이 아주 감동적으로 나왔습니다.

    ▶ 그 때의 박수갈채가 대단했죠?

    네. 그 아이는 못 들었지만, 굉장히 멋진 장면이었죠.

    ▶ 아이들이 때로는 회의에 빠지거나 좌절할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네. 농아 아이들이 일반 학생들처럼 낮에 훈련하고 야간에 게임도 하고 동계훈련도 하고 정말 인내력있게 운동을 하는 것이 아마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목표 의식이 부족한 아이들은 야구를 떠난 아이들도 있고요. 그런 아이들을 달래고 다시 운동장으로 데려오고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각성시키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죠. 그래서 감독과 야구부장 선생님 분들이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 충주 성심학교를 모델 삼아 다른 학교에서도 시도해보고자 조 선생님을 찾아온 경우는 없었나요?

    다른 학교에서 야구부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 그 예가 없었던 것 같고요. 물론 간접적으로 저희 학교가 빌미가 되어서 다른 농아학교에서는 탁구부가 생긴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약간 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농아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성심학교로 아이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야구를 통해서 아이를 키워보겠다고 하셔서요. 지금 현재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 중의 약 3분의 2 정도가 외부에서 온 아이들입니다.

    ◇ 아이들이 졸업 후에도 계속 야구할 수 없는 사회 환경 아쉬워

    ▶ 첫 해 야구부 아이들이 졸업하면서 선수들이 줄어서 재학생한테도 문제가 있었고, 졸업생들의 진로문제도 있었나봐요.

    처음에 제가 아이들에게 야구를 시킬 때 아이들에게 늘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구를 통해서 너희들이 이 사회의 스타가 될 것이다. 박찬호나 이승엽 같은 선수들이 농아인이라고 한들 그 누가 그 사람들을 무시하겠는가” 그러면서 잘 하면 프로도 갈 수 있고 야구를 통해서 평생 명예롭고 보람있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했거든요.

    졸업하면서 이제 그것을 이루어주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상황이 농업 실업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해도 부모님들이 뒷바라지 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됐거든요. 그 때 제가 충북도청에도 농아인 야구팀을 만들 수 없겠는가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또 서울시와 강원랜드에도 부탁을 했고요. 여기저기 부탁을 하면서 다 뛰어다녔는데,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정말 아이들이 그런 것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그 아이들의 선배들이 한 것처럼 공장 생산직으로 갈 때 아주 절망이었습니다.

    ▶ 장왕근 선수 같은 경우는 실업팀에 갔다가 팀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요.

    그 때 ‘국제 디지털 대학’에서 야구부를 창단했는데요. 그 팀이 한 1년을 가지 못하고 해체되어서 모처럼 한 아이가 야구의 길로 갔는데 다시 돌아오고 말았죠.

    ▶ 졸업 후에도 계속 야구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이들도 상심이 컸겠는데요.

    아이들도 그 3년 동안 힘든 가운데 참고 한 것은 제가 제시한 목표를 아이들이 받아들인 것이거든요. 정말 굉장히 어려운 노력을 해서 3년만에 일반 학생들 수준으로 올라갔는데, 제가 그 아이들의 바램을 결과적으로는 이루어주지 못한 것이죠.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단기적으로 봐서는 성공하지 않은 것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일반 사회에 나가서 농아인 사회에 야구를 퍼뜨리고, 직장에 클럽팀이 생기고, 이번에 또 한국 농아인 대회가 열리고 하는 것이 농아인들의 사회와 생활에 변화를 주는 보람있는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러 기업체나 사회관련단체에 도움을 청했지만 쉽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관심 가져주시고 도와주신 단체는 어떤 곳이었나요?

    야구팀은 학교에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외부에서 굉장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컸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저희가 처음에 시작할 때 충청북도 교육감으로 계시던 김천호 교육감이신데요. 한 2년 전에 집무 중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그 교육감님이 농아학교에 야구부가 생긴다는 것을 굉장히 뜻깊게 생각해주셔서 사립학교지만 저희에게 순회지역 코치를 배정해주셨어요. 참 어려운 것인데 그런 힘든 역할을 해주셨죠.

    그리고 그 밖에도 프로야구 송진우 투수가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서 1승을 할 때마다 50만원을 적립하고, 송진우 투수를 아끼는 분들이 50만원씩 해서 그 때 천 몇 백만원을 저희에게 기탁해주셔서 저희 아이들이 난생처음 제주도까지 전지훈련을 가는 호강을 맛봤습니다. 정말 감사한 분이죠.

    ▶ ‘아시아 5개국 농아인 대회’가 내년에 열린다고요? 유치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동안 일본과 대만은 제가 듣기에 서로 농아인 야구 교류가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저희와 연락이 되어서 지난 4월 달에 충주에서 일본, 대만, 저희까지 해서 세 나라가 농아인 야구 국제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야구 대회를 우리 한국에서 유치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내년도 대회에는 그 세 나라 이외에 호주와 중국도 참가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렇게 야구에 매달리다보니 혹시 부인께서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야구부를 창단하고 지금까지 야구부에 매달리다 보니까 나머지는 아주 엉망이었죠. 집에 아이들보다는 야구부 아이들을 더 신경쓰고 그 아이들과 함께 있고, 감독, 코치선생님들이 저와 함께 아이들과 하루 24시간을 함께 있었죠. 그런 것이 사랑이죠. 그런 관심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농아 야구부 선수들이 단기간 동안에 선수로서도 컸고 인성도 훌륭한 학생으로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도 사모님한테 많이 미안하셨나요?

    많이 이해해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 홈페이지를 통한 응원의 메시지도 많았다면서요. 기억에 나는 글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지금 기억나는 것은 2003년도 봉황기 대회에서 지고, 그 날 저녁에 충주로 돌아왔거든요. 돌아왔을 때는 쌓인 피로 때문에 가자마자 잠이 들었어요. 자다깨서 새벽에 홈페이지를 열어보니까 정말 엄청난 글들이 쏟아져 올라오는 것을 봤거든요. 제가 나중에 홈페이지에 댓글을 쓰면서 ‘우리가 저지른 일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언론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신나는 일보다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이 많다보니까 그런 와중에 성심학교의 농아인 야구부 아이들은 그런 분들에게 정말 목말라하던 어떤 기뻐하고 흥분하는 거리를 주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그런 분들의 관심과 성원이 우리 야구부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그러고 보면 조일연 선생님이 저지르지 않았다면, 성심학교 야구부는 없었겠는데요.

    사실 저질렀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협의를 통해서 공감대를 만들어서 해야 하는데요. 사실 공감대를 만든다는 것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울 때가 있잖아요. 어른들에게는 시간이 완만하게 흐르지만 교육자로서 보다보면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년, 2년, 3년은 휙휙 지나가거든요.

    정말 될성싶은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도 바라고 있는데 제가 어른들 설득하고 될 때까지 간다는 것은 정말 어느 세월에 될지 모르고, 아이들은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허비하고 넘긴다고 생각하니까 제가 그 절차를 따를 수가 없었죠. 그 절차를 넘어선 것 때문에 어려움이 좀 있었습니다.

    ▶ 처음에 본인의 만족감으로 시작하신 겁니까, 아니면 아이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주자는 마음이었습니까?

    제가 야구를 사랑한 것이 물론 동기가 되겠습니다만, 제가 교육자로 한 25년 농아인들과 있으면서 그냥 속된 말로 앉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하면서 어제 오늘 내일 그러다가 정년을 맞으면서 그렇게 있고 싶지 않았거든요. 평생에 제가 알게 된 이 제자들과 농아인들의 사회에 제가 개입해서 살았던 자취를 남기고 이 사람들의 삶에 뭔가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야구로 나타난 것이죠.

    ▶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고,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학교를 퇴직한 이후에는 책을 출판하는 일에 매달렸고요. 그래서 <태양을 향해="" 쏴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도 굉장히 바빴어요. 제가 학교를 그만 두니까 어느 후배가 저한테 전화를 해서 “선배님, 요즘은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데, 너무 바쁘게 사시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요. 이번에 잠실야구장에서 했던 전국 농아인 야구대회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사무실에 인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혼자 뛰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자체로 굉장히 바빴고요. 앞으로의 계획은 물론 농아인 야구대회가 시작되었으니까 내년에 아시아 농아인 야구대회, 또 세계 농아인 올림픽에 야구 종목을 넣는 문제들이 해야 할 공적인 의무라고 생각하고요.

    그 외에도 한 가지 중요한 계획이 있습니다. 야구와는 전혀 다른 것인데요.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버림받은 동물들, 유기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공간, 시설을 만들고 싶고, 그런 운동을 하는 사회단체에 참여하고 싶어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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