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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 씨의 영화사랑 "포스터 전시회만 10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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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화 씨의 영화사랑 "포스터 전시회만 101번"

    • 2007-10-19 15:23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영화에 미친 50년, 영화 연구가 정종화 씨

    걸어다니는 영화 백과사전, 충무로 넝마주이, Mr.시네마…. 영화연구가 정종화 씨의 별명입니다.

    영화가 개봉한 날, 극장, 감독·주연, 이들의 다른 영화 등에 대해서 꿰뚫고 있죠. 지난 54년 동안 국내외 영화자료를 2만 여점이나 수집한, 영화 관련 기록을 수첩에 일일이 적고 암기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사람. 영화 서적을 15권 낸 그의 별난 인생을 10월 19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영화인생 50년, 모든 것은 ‘기록’에서 출발

     

    ▶ ‘걸어 다니는 영화사전’, ‘움직이는 영화박물관’이라고 하는데 매번 기록을 하시나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영화기록과 야구기록을 꼭 해놓습니다. 영화기록은 지금으로부터 40년을 했고 제가 67년에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서부터 미국의 야구연감이라든지, 일본 야구연감 등 모든 책을 다 봤어요. 그리고 야구기록은 프로야구가 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했던 그때부터의 모든 기록을 갖고 있어요.

    ▶ 우리나라가 기록에 참 약한데요?

    우리나라가 기정학적으로 외국의 침범도 많았고 특히 6.25 등 재난이 많아서 모든 기록이 분실되고 소실되었죠. 더군다나 교육열이 위로 보고 걷자가 돼서 밑에 걸 잘 모릅니다. 지금 제가 포스터를 취미로 모으고 있지만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이 자료가 없어서 저보고 복사해 달라고 해서 없는 걸 복사해 줄 때 느끼는 뿌듯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죠.

    ▶ 원래 하시는 일은 어떤 일이었어요?

    아까 소개하셨듯이 넝마주이, 영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영화연구가입니다. 그래서 95년도 조선일보사에 ‘영화 100년’을 연재할 때 그분들이 제 직함을 갖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영화평론가는 비평을 해야 하고 또 저 같은 충무로 사람은 한국 영화의 여러 이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평 할 수가 없어요. 그 고충을 알기 때문이에요.결국 조선일보사에서 영화연구가라고 직함을 만들어 줬습니다.(웃음) 영화연구가로는 제가 유일할 겁니다.

    ▶ 그럼 수첩이 있으시겠어요?

    그럼요. 항상 수첩을 갖고 다녀요. 금년에 본 영화는 1월 1일부터 수첩에 다 기록해 놓았어요. 개봉날짜도 다 적고.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58편을 극장에서 상영했어요.

    ◇ 취미로 모은 포스터만 2만점, 자료 분실이 가장 큰 고민

     

    ▶ 처음 보신 영화가 어떤 영화였나요?

    1953년 7월 27일이 6.25 3주년 휴전협정일이에요. 제가 부산 피난시절에 방학 때 동네 꼬마들이 같이 돈을 모아서 부산 광복동 거리를 갔어요. 그때 광명극장에서 ‘역마차’라는 영화를 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개구쟁이 3명이 들어가서 영화를 봤어요. 그날 날씨가 더워서 2층에 올라가니까 수돗물이 있어요. 점심시간에 수돗물을 많이 먹고 보니까 벽에 역마차 포스터가 붙여져 있어요. 존 웨인, 역마차, 인디언이 나오는데 이 멋있는 걸 집에다 갖다 붙였으면 했던 게 오늘 날 포스터를 모은 계기가 되었어요.

    ▶ 그때 포스터를 보면 종이나 인쇄도 굉장히 초라하던데요.

    종이 원본을 만지면 자꾸 마모가 돼요. 그래서 슬라이드 같은 건 전부 집어넣고 복사를 했어요. 그 당시에는 포스터가 유일하게 영화를 알리는 바로미터였어요. 그때는 취미보다는 호기심 때문에 모아봤는데 그 이후부터는 극장 안에 들어가면 전단지를 팔잖아요.

    전단지 뒤를 보면 영화에 대한 에피소드, 촬영 영화배우, 인물 소개가 다 있기 때문에 이걸 모아서 공부하면 되겠구나 해서 취미로 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전부 한문 시대였거든요. 부친한테 한문도 물어보고 옥편도 갖고 다녔어요. 그걸 가지고 공부하게 된 게 자칭 한문박사가 되었고, 또 미국영화 제목을 5만 개를 알고 있어요. 제가 미국에는 한 번도 안 가봤지만 영어 단어를 5만 개 정도는 아니까 미국에서 살고 왔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에요.(웃음)

    ▶ 지금까지 모으신 포스터가 국내외 합쳐서 얼마나 되나요?

    1953년부터 일본 책도 다 갖고 있으니까요. 극장표, 전단지, 국내외 잡지 창간호까지 전부 합치면 2만 여점이 되더라고요.

    ▶ 귀중한 자료인데 보관은 어떻게 하세요?

    집 이사 가는 게 제일 고민이었어요. 항상 높은 지역에 사는데 높은 지역은 통풍이 잘 되거든요. 자료가 전부 종이로 되어 있으니까 이게 잘 되어야 여름 장마 때 마모되지 않거든요. 지금도 대방동 보라매공원 제일 높은 지역에 살고 있어요.

    제일 겁이 나는 게 장마에요. 물이 한 방울이라도 아트지에 떨어지면 떡처럼 붙어버려요. 그리고 나머지 잘 안 보는 것들은 동생이나 처갓집 창고에 보관해 두고 있는데 자료 분실 될까 봐 고민이 많아요. 돈보다도 자료 잃어버릴까봐 고민이에요.(웃음)

    ▶ 영화배우나 감독의 길로 가고 싶지는 않으셨어요?

    처음에는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죠. 영화배우는 연기를 못 하니까 아예 생각도 못했고요. 그런데 제가 영화감독을 해 보니까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요. 영화감독을 해서는 장가도 못 가고 처자를 거느릴 힘도 없겠구나, 대신 영화자료를 모으면 출판사나 영화잡지 기자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62년부터 영화잡지 기자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극장 선전부가 전부 극장 안에 있었는데 잡지 기자라고 하니까 영화 선전 자료도 얻고 시간 많으니까 공짜영화도 보고 좋은 포스터 있으면 선전부장한테 가서 책에 내겠다고 해서 두 장씩 얻어서 하나는 내가 갖고 하나는 회사에 갖다 주고, 이런 게 전부 복합적으로 취미와 수집이 어울리니까 영화 자료를 배가시켜서 자꾸 모으게 됐죠.

    ▶ 제가 중학교 때 테너 ‘마리오란자’가 나오는 ‘For the first time'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유명한 테너라고 해서 그 사람을 그리려고 포스터를 몰래 떼어낸 적도 있었거든요.

    ‘For the first time'은 1959년 4월에 아카데미 극장에서 했었어요. 지금 조선일보사 자리죠. 그리고 마리오란자가 처음 나온 것은 1955년 ’황태자의 첫사랑‘에서였어요. 그리고 ’가극왕 카르소‘라고 마리오란자가 목소리로도 나왔죠. 마리오란자가 우리나라에서 세 편이 정식으로 개봉이 되었어요.

    ◇ 영화는 ‘나 홀로 시네마천국’ 아내와 본 건 1편뿐

    ▶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둔다는 말은 듣지 않으셨어요?(웃음)

    저는 지금도 영화는 혼자 봅니다. 학교 다닐 때도 영화는 혼자서, 극장에 가서, 어둠의 천국에서 봐야 좋은 영화를 2,3편도 볼 수 있고 또 머리에 입력이 되거든요. 항상 타이틀부터 엔딩까지 혼자서 영화를 감상해야만 머리에 입력이 되고 그 작품에 대한 잔영이 계속 남지 친구들과 같이 보면 떠들고 중간에 화장실 가고 이런 것들이 영화를 보는 방해요소가 되는 거죠.

    제가 결혼을 늦게도 했지만 결혼하고 나서도 집사람과 같이 본 영화가 1976년 9월 23일 대한극장에서 숀 코넬리가 주연한 ‘바람과 라이언’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한편밖에 본 영화가 없어요. 그것도 공짜표가지고 봤어요.(웃음)제가 미리 얘기했죠. 영화는 혼자 봐야지 옆에 있으면 거추장스럽다고요.

    ▶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쓰신 소설가 안정효 선생님도 만나셨어요?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1991년 11월에 나왔어요. 모 영화사에서 그 책을 입수했는데 영화로 만들겠다고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밤을 새워서 봤는데 그 속에서 나오는 영화제목이 모두 516개인데 틀린 게 24개더라고요. 그걸 전부 적어서 속달로 안정효 씨 집으로 보냈죠.

    마침 안정효 씨가 1월 1일부터 4일 동안 강화도로 낚시를 갔다가 집에 오니까 그 편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1월 4일에 충무로에서 만나서 밤새도록 영화 이야기를 하고 틀린 것도 이야기해서 영화화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제가 마포 도화동에 살았는데 그 자리가 옛날에 마포형무소, 교도소 자리였는데 바로 뒤에 경보극장이 있었거든요. 밤낮 일요일이 되면 포스터 얻어가지고 영화보고 안정효 선생도 염리동에 살아서 경보극장에 와서 영화보고. 그분하고 저는 필연적으로 경보극장에서 많이 만났어요.

    ▶ 그런데 어떻게 날짜까지 다 기억하세요?

    항상 기록을 하고 신문도 전부 스크랩해놓거든요. 그리고 영화를 알려면 미국영화는 원 제목, 감독, 주연배우, 제작회사, 첫 개봉극장, 이 5개가 머리에 입력이 안 되면 잠이 안 와요.

    그리고 제가 좀 암기력이 남다릅니다. 옛날에는 벼락공부가 많았잖아요. 노트 정리를 잘 하기 때문에 고대로 암기해서 답안지를 작성하면, 제가 수학은 못했어도 역사나 지리는 만점이었어요.

    지금도 제가 미국을 한 번도 안 가봤지만 50개 주에 뭐가 있는지 다 압니다. 텍사스에 오스틴이 어디에 있고 샌안토니오가 어디에 있는지 영화 속에서 다 봤기 때문에 지리가 훤한 거죠.

    ▶ 옛날 극장들은 경비가 허술해서 돈이 없으면 담을 넘어서 몰래 들어가서 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정종화 선생님도 혹시 그런 적 있으세요?(웃음)

    토요일 같은 경우에는 철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포스터 두 장 받은 것 중에 한 장은 팔고 한 장 갖고 극장에 가서 영화보고, 또 보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밤 7,8시 컴컴할 때 몰래 들어가서 보기도 했어요.그래서 여름이 싫어요. 여름은 낮이 길어서 8시까지 해가 있지만 겨울은 4시 반이면 벌써 컴컴하니까요. 얼마든지 담치기를 해서 영화를 볼 수 있고요.(웃음)

    ◇ 국내외 개봉영화 90%는 전부 봤어요

     

    ▶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국내외 영화 90%를 보셨다고요?

    1919년 10월 27일이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가 개봉한 날입니다. 이날을 기념으로 해서 1963년 문화공보부에서 영화의 날로 재정했죠. 그래서 금년 8월까지 한국영화가 5,784편이 만들어졌어요. 1953~4년 전까지는 잘 못 봤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영화를 본 것은 1955년부터였어요.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굉장히 천대했어요. 한국영화가 1999년도 ‘쉬리’가 나온 이후부터 평가를 받았지 1960년대부터 80년대의 영화들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은 한국영화를 잘 몰라요. 한국의 영화평론가가 80명 정도 되는데 외람된 이야기지만 한국영화를 잘 안 봤어요.

    요즘 한국영화가 유명해지니까 비디오로 보는데 영화가 보통 1시간 48분인데 비디오는 1시간 반으로 영화를 맞춥니다. 그러니까 영화다운 영화가 못 되는 거죠. 그래서 비디오 본 사람과는 영화 이야기를 절대로 안 합니다. 영화는 반드시 담치기를 하든 뭘 하든 극장에 가서, 어둠의 천국에 가서 시네마 천국처럼 영화를 봐야 도움이 되지, 비디오로 보는 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한 겁니다.

    ▶ 국내외 개봉작 90%를 다 보셨다고 했는데 못 본 10%는 왜 못 보신 건가요?

    1919년부터 1954년 동안의 무성영화나 유성영화, 6.25 때의 영화는 못 봤고 학생 때는 학생입장불가 영화가 있었잖아요. 저는 그게 참 원망스러워요. 물론 나중에 다 봤지만 제가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액션영화나 사람을 죽이는 영화는 겁이 나서 잘 못 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영화 못 본 걸 다 합치면 그 정도 될 거예요.

    ▶ 당시에는 아르바이트가 없었을 텐데 영화를 보기 위해서 철물상, 쌀집 같은 곳에서 일을 하셨군요?

    그렇죠. 그것도 유리창에 극장 포스터가 있는 집에 한해서 일을 했어요. 그래야 그 집 포스터를 끈으로 해서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요. 1956년 1월 21일에 부산에서 올라왔는데 제일 먼저 발로 섭렵한 게 ‘서울에 극장이 몇 개 있는가’였어요. 56년 1월 21일부터 시작해서 3일 동안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극장을 찾았고 심지어 왕십리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보고 마포까지 걸어갔어요. 극장을 알아야 그 다음에 서울 지리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인천이고 대구고 부산이고 전부 극장을 알면 도시에 대한 걸 알 수 있어요.

    ▶ 지금이야 멀티플랙스가 생기고 극장 환경도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에는 극장 환경이 열악했잖아요.

    쥐가 얼마나 많은지, 쥐 지린내도 나고 여름에는 덥기도 덥죠. 그리고 겨울에는 톱밥을 가지고 극장 1층 좌우에 있는 난로에 넣기도 했어요. 또 당시에는 워낙 동네 깡패들이 많아서 그 사람이 거기를 다 차지했죠. 여담이지만 서울에 1월 21일에 올라와서 다음 날 제가 부산에서 못 본 ‘나이아가라’를 경보극장에서 봤어요. 학생들을 못 보게 했지만 방학 때였으니까요. 그걸 보는데 영하 11도 그 추운 날씨에서 나이아가라 물이 나오니까 더 추운 거예요.

    마릴린 먼로의 주제가였던 키스부터 시작해서 먼로 워크를 보겠다고 그 추위를 무릅쓰고 영화를 보는 걸로 만족했죠.영화 나이아가라는 1952년도에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는 55년 2월 14일에 첫 개봉을 했어요. 허리우드에서 개봉하고 3년 만에 들어왔는데 빨리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일본 도쿄에 극동 배급사가 있어서 거길 통해서 오니까 보통 2,3년 안으로 다 들어올 수 있었던 거죠.

    ▶ 고등학교 때는 밥을 굶기도 하셨고 집에 있는 쌀을 팔기도 하셨다고요?

    제 고향이 경북 안동인데요, 부친이 올라오셨다가 안동으로 다시 내려갈 때 쌀을 한 가마니 놓고 가셨어요. 당시에 자취를 했는데 근방이 마포였기 때문에 마포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저녁은 제 담당이고 아침은 형님 담당인데 형님이 고3 입시 준비 때문에 저녁에 늦게 오셨어요. 그래서 쌀 한 됫박을 팔아서 그토록 보고 싶은 경보극장 영화를 봤어요.

    영화 제목이 탈파 주둥뱅이라고 해서 버트 랭카스터가 나오는 영화에요. 원 제목은 텐타르맨인데 모로코 사막지대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와 토착민 공주와 벌어지는 내용이에요. 그 영화가 오락성이 짙어서 학교에 가면 전부 애들이 그 영화를 봤다고 자랑을 하는 거예요. 도저히 침묵이 금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쌀을 형 모르게 팔아서 영화를 봤죠.(웃음)

    ◇ 춘향전 포스터만 있어도 한국영화 역사를 알게 돼

     

    ▶ 영화는 그 시대에 어떤 의미였을까요?

    영화는 종합예술이에요. 물론 지금도 다양한 매체가 있지만 당시에는 영화밖에 없었잖아요. 음악, 미술, 영상 등 영화를 봄으로써 교과서 외적으로 얻는 게 더 많았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영화 얘기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고 소위 지적인 대상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또 영화를 통해서 역사, 지리, 문화, 좋아하는 영화배우 등 여러 가지 상식이 아우러져서 하나의 새로운 자기 교양을 쌓게 되는 거거든요.

    ▶ 한국영화가 당시에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영화가 60년대까지 척박했어요. 그리고 영화의 역사는 배우의 역사입니다. 한국영화의 역사가 올해로 88년째인데 한국영화 역사를 알려면 춘향전을 알아야 해요. 춘향전이 1923년에 무성영화로 처음 나왔고 2000년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까지 모두 13편이 나왔어요.

    춘향전은 한국영화에서 10년 단위로 만들어졌죠. 그래서 춘향전 포스터만 잘 갖고 있으면 한국영화 역사를 알게 되는 거예요. 또한 한국영화의 성장기를 알리는 기폭제가 된 것도 역시 춘향전이에요. 그리고 1955년도에 서울 인구가 125만 명 정도일 때 이 영화를 보려고 국도극장에 12만 명이 들어왔어요. 지금으로 치자면 1,130만 명이 들어온 ‘왕의 남자’나 ‘디 워’, ‘화려한 휴가’ 등을 환산해 보면 춘향전을 더 많이 본 거죠.

    ▶ 유현묵 감독의 ‘오발탄’ 등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문학적이고 영화적으로 성숙한 시대를 맞이하잖아요. 김기영 감독 같은 신진영화감독들이 만든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기도 하고요.

    그 전에는 시대물, 역사물, 고무신 부대, 아주머니 부대, 눈물 영화 등이 많았는데 4.19, 5.16 같은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패턴이 바뀌게 되었죠. 김기영 감독의 ‘화녀’라든지 61년 4월 28일 광화문 4거리에서 개봉한 ‘오발탄’이 그 예입니다. ‘오발탄’은 5.16 때문에 사회상을 너무 비참하게 그렸다고 해서 당시 혁명정부에서 개봉을 금지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2년 후인 63년 5월에 지금은 없어진 을지로2가의 을지극장에서 개봉을 했죠.

    특히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전부 이런 영화들이 문예영화, 예술영화 범주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아시아영화제 상을 받고 흥행과 예술의 쌍두마차를 타고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 이후에 신성일 씨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젊어지고 그러면서 젊은 관객을 끌어들이게 되었잖아요.

    1964년 3.1절 기념으로 지금의 조선일보사 자리인 아카데미 극장에서 ‘맨발의 청춘’을 상영했습니다. 그 맨발의 청춘이 소위 신성일 씨와 엄앵란 씨가 콤비가 돼서 한국 청춘영화의 붐이 일어나게 된 거죠. ‘떠날 때는 말없이’, ‘청춘교실’, ‘연애졸업반’ 등 너무 많죠.

    그러다가 66년도에 윤정희, 남정임, 문희 트로이카 여배우가 등장했어요. 이 배우들이 72,3년까지 제1기 트로이카 여배우가 돼서 한국영화 전성시대를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죠. 이때부터 관객이 대학생으로 전이되어서 한국영화가 젊은이들한테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었어요.

    70년도에 ‘별들의 고향’ 이후로 ‘영자의 전성시대’ 등 호스티스 영화들이 한 때는 많이 나왔어요. 제가 영화연구를 해 보니까 영화는 3년, 5년, 8년 주기로 변하더라고요.

    ◇ 진기록 열전 ‘정종화의 9회말 2아웃’

    ▶ 야구는 어떤 계기로 심취하게 되신 거예요?

    제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 계림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야구장에 군인과 여자는 공짜라고 써있어요. 영화도 그렇고 워낙 혼자 보는 게 좋기 때문에 야구를 보는데 또 묘미가 나오더라고요. 프로그램도 돈 주고 사면서 그때부터 야구도 영화처럼 일맥상통하는 기록이 있구나 알게 되었고 지금도 실업야구 기록을 전부 갖고 있어요.

    최근에는 프로야구 기록은 요즘 매스컴이 워낙 발달되어 있잖아요. 기록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노트에 전부 기록을 해 놨어요. 박찬호 투수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투수로서 홈런을 친 기록 등 이런 진기록을 전부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 매체에 매주 ‘정종화의 9회말 2아웃’이라는 란에 야구 칼럼도 쓰고 있어요.

    ▶ 현재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딸이 둘입니다. 딸들이 직장도 다니고 있고 제가 하는 일을 이해해 줍니다.제가 영화인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봤거든요. 현재 연결되어 있는 직종이 22개에요. 거기에서 나온 수입과 대학교 강단에서 특강도 많이 하고 특히 전시회를 많이 합니다. 86년 12월 13일 충무역에서 포스터 전시회를 해서 금년까지 101번을 전시회를 했어요. 전국의 영화제를 할 때 영화 자료를 전부 분리해서 장르별로 포스터 전시회를 하고 있어요.

    ◇ 충무로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이는 ‘한국영화 추억전’

    ▶ 충무로 국제영화제로 바쁘시다고 하던데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우리나라 영화제가 많습니다. 부산, 광주, 전주, 부천이 있는데 서울영화제는 없어요. 서울의 25개 구 중에서 중구의 충무로가 영화에 메카잖아요. 그래서 이번 10월 25일부터 11월 2일까지 제1회 충무로 국제영화제가 개최됩니다.대한극장, 명보극장, 중앙극장에서 지나간 영화도 하고 외국영화도 하는데 올해 충무로 영화제에서 제가 한국영화 자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자료도 다 제공해 주었고요.

    금년이 2007년이니까 57년, 67년, 77년, 87년으로 나누어서 한국영화 추억전을 열어서 당시 스텝들, 배우들 전부 나와서 그동안 있었던 에피소드와 한국영화의 면모 등을 행사로 열려고 합니다.5,60년대 프린트가 없어서 있는 걸 전부 찾았어요. 57년도에는 박계주 씨의 순애보, 이강수 씨의 여자의 일생, 이 두 편을 하고 67년도에는 좋은 영화가 많아서 24편을 영화제 기간 중에 한국영화 추억전으로 열려고 합니다.

    ▶ ‘한국영화 포스터 걸작선’, ‘20세기를 빛낸 걸작선’ 등을 전철역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행사나 전시회를 많이 하셨는데 그 중에서 한 장만 팔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많죠. 그래서 요즘은 컬러복사가 굉장히 발달을 해서 복사를 해서 드립니다. 복사비를 내시면 자료비는 안 받고 그냥 드리겠다고 하면 굉장히 좋아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영화 포스터를 복사해서 자기 안방에다 두겠답니다.

    ▶ 가장 아끼는 포스터는 어떤 건가요?

    제가 마릴린 먼로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녀의 생애 동안 나온 영화가 23편인데 우리나라에 개봉된 영화가 10편이에요. 그 중에서도 ‘7년만의 외출’을 가장 좋아해요. 뉴욕 지하철 통풍구에서 바람이 나와서 스커트가 날리는 그 장면은 영화 150년사에서 제일 명장면이죠. 그 통풍구 속에서 바람을 날리게 하기 위해서 20분 동안 선풍기 돌리는 사람이 애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 ‘충무로 전시실’ 한국영화의 타임머신이 되고 싶어

    ▶ 50년 동안 영화에 미쳐보니 어떠시던가요?

    산악인 허영호 씨를 보면 산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거잖아요. 저 역시 영화가 있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고 또 영화에 미칠 줄 알아야 미칠 수도 있거든요. 그것도 새로운 자기 발견이에요. 저는 제일 싫은 게 사람 많이 모이는 거예요. 극장이나 야구장 모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관람하는 건 혼자 보니까요.

    영화는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지만 야구는 시나리오가 필요 없어요. 영화와 야구는 하나님과 매스컴이 도와줘야 흥행이 되고 대박이 터집니다. 항상 전진하고 진화하는 게 둘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해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지금 우리나라에 박물관이 많이 있잖아요. 제가 55년 동안 충무로에서 희로애락을 다 겪었어요. 5년 후에 만 70이 되면 충무로에, 거창하게 기념관이니 전시관이니 하는 건 안 좋아하니까 누구든지 제 자료를 공유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료전시실을 만들고 싶어요.

    한국영화의 5,60대 원본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컬러로 남아있는 것이 포스터뿐이거든요. 그래서 이 포스터를 보면서 한국영화의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으로 가라는 뜻에서 충무로 쪽에 전시관을 만드는 게 남아있는 꿈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책을 많이 내는 겁니다. ‘영화에 미친 남자’ 시리즈 2편도 계획하고 있어요. 50년대 이야기에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책을 내려고 하는데 60년대 이야기가 제일 흥미진진합니다. 대한극장에서 벤허를 상영할 때 뒷문으로 넘어간 에피소드도 있고, 65년 5월에 피카디리 극장에서 하는 007 시리즈 ‘위기일발’을 제일 먼저 개봉했어요. 그걸 보고 싶어서 군대에서 탈영 비슷하게 하고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들로 60년대 에피소드가 가장 많아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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