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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오기 전에 우리가 경찰과 우익인사 처단한다"



책/학술

    "14연대 오기 전에 우리가 경찰과 우익인사 처단한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81]순천의 집단학살, 죽고 죽이는 악순환의 길을 열다

    ◈ 전남 순천에서 무차별 학살극 벌어지다

    여순반란사건 당시 불타는 여수 시가지. (사진=실천문학사 제공)

     

    1948년 10월 20일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 14연대 주력부대 2천여 명은 기차와 트럭을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반란군은 순천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시내로 진입했다.

    이미 순천 시내는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2개 중대가 차례차례 점령하고 있었다.

    경찰과의 교전 때문에 다소 흥분한 반란군은 체포된 경찰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토착 남로당원들도 가세해 우익인사들을 검거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순천경찰서장은 두 눈이 뽑히고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차 꽁무니에 묶여 끌려다닌 끝에 화형당했다.

    체포된 경찰관 일부는 산채로 모래구덩이에 묻힌 뒤 생매장되었다.

    경찰관 70명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타살되었다.

    사흘동안 순천에서 교전하다 사살당하거나 학살로 죽은 경찰관과 우익인사는 900명에 달했다.

    인구 5만 명의 작은 소도시 순천은 사방에 널린 시체들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처참한 몰골로 바뀌었다.

    여순사건으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시신. 반란이 일어나자 좌익과 우익 모두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다. (사진=실천문학사 제공)

     

    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반란군 400명은 순천에 남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쳐들어갔다.

    1,000여 명이 북쪽의 구례, 곡성, 남원으로 올라갔다.

    일부는 서쪽의 광주로 뻗어나가면서 중간에 있는 벌교, 보성, 화순을 공격했다.

    수백 명이 동쪽의 경상도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광양과 하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반란군은 점령지마다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

    반란군이 들이닥치면 남로당원과 지역 주민들이 합세해 관공서를 접수하고, 악질 친일경찰과 악명이 자자한 대지주 등 우익인사를 체포해 처단했다.

    구례와 곡성에서는 반군이 오기도 전에 먼저 경찰서를 점령해 친일경찰들을 죽였다.

    그러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순천에서의 학살 소식을 들은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대부분 미리 도망갔기 때문이다.

    반란 초기 1주일 동안에 반란군 측에 의해 죽은 인원은 1,3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900명 이상이 순천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학살당한 가족의 시신을 보고 오열하는 유가족. (사진=돌베개 제공)

     

    평화로왔던 작은 도시 순천에서 어떻게 해서 이런 참극이 벌어졌을까?

    여수에서도 학살극이 벌어졌지만, 150여 명으로 추정된다.

    교전이나 즉결처분으로 죽은 경찰관이 74명,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민간인은 수십 명으로 집계되었다.

    진압군이 몰려오던 23일 밤에는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던 200명을 그대로 석방했다.

    항구가 있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수는 전통적으로 우익이 강했고, 좌익 활동도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곡창지대는 달랐다.

    지주-소작관계가 뿌리깊게 남아 있어 좌익이 세력을 키운데다 해방이 됐다는데도 친일경찰이 설치고 다니니 울분이 뿌리깊게 깔려 있었다.

    좌우익이 극단적으로 대립해 서로 보복 살상을 벌이다 군사반란이 터지자 일거에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분단국가 수립 후 친일파 청산도 안되고 북한에서 시행한 토지개혁 마저 지지부진하자 한반도 남단은 불만 붙이면 바로 끓어버리는 용광로로 변하고 있었다.

    ◈ 반란의 시작…"14연대는 제주도로 가서 폭동을 진압하라"

    진압군에게 체포된 14연대 반란군. 모두 처형된다. (사진=돌베개 제공)

     

    1948년 10월 중순 여수시내에서 10리 떨어진 신월동 바닷가에 자리잡은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술렁거리고 있었다.

    3,000명의 부대원 상당수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면하기 위해 입대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10월 15일 육군총사령부로부터 '14연대는 제주도로 출동해 빨치산들을 뿌리뽑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동요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하면 동지를 죽이는 것이고, 반란군에 가담하면 좁은 섬에 갇혀 죽음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로당에 가입한 하사관들이 주축이 된 병사위원회는 파병을 거부하고 영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의 상급기관인 남로당 전남도당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체적인 결정이었다.

    10월 19일 밤 10시 10분경, 14연대 병영에 돌연 비상나팔이 울려 퍼졌다.

    이미 40여 명의 반란 사병들이 무기고와 상황실 등 연대본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사병들 대부분이 영문도 모른 채 연병장으로 집합하기 시작했다.

    연대장은 부두에 있었고, 환송식에 참가했다 만취한 장교들은 흩어져 자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창수 상사가 단상에 올라가 선동하자,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악질 친일반동들을 처단하자!"
    "여수로 순천으로 부산으로 서울로 밀고 나가자!"

    이때 누군가 외쳤다.

    "지금 경찰들이 쳐들어오고 있다"

    반란군은 개방된 무기고로 몰려가 무기를 받고 먼저 20명의 장교들을 보는대로 사살했다.

    반란군을 쫓아 순천에서 화순 방면으로 출동하는 진압군. 납작한 초가집 사잇길로 빼곡이 군인들을 태운 트럭들이 줄지어 가고 있다. (사진=실천문학사 제공)

     

    제주 출동을 앞두고 새로 지급한 M1소총으로 무장한 2,500여 명의 반란군은 자정 무렵 여수 시가지로 들이닥쳤다.

    민주학생동맹 소속 수산학교 학생 23명이 길 안내를 맡았다.

    반란군은 여수시 입구에 있는 봉산파출소를 습격한 뒤 여수경찰서로 몰려갔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새벽 3시 30분경 여수경찰서를 점령했다.

    새벽 5시가 되자 여수 시가지는 완전히 반란군 수중에 떨어졌다.

    남로당 여수시당이 긴급회의를 열어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자, 반란군은 남로당원과 학생들 600여 명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이에 따라 병사들의 반란인 여수병란은 여수와 순천 일대의 민간인들이 가세한 여수민란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반란의 아침이 밝아오자 여수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고위 관리와 지역 유지, 친일경찰, 한민당과 우익청년단원들이 속속 체포됐다.

    악명 높았던 친일 경찰관 몇명은 시장거리에서 군중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살해되었다.

    그래도 인구 8만 명의 도시 여수는 사흘동안 질서가 유지되었다.

    시장거리에 몇 구의 경찰관 시체가 뒹구는 것 외에는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 "피는 피를 부른다"…진압군, 몇배의 잔인한 보복을 자행하다

    여순반란 당시 여수 시가지에 진입하고 있는 국군 진압부대원들. (사진=실천문학사 제공)

     

    여수와 순천에서 군사반란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7개 연대를 동원해 진압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반란군 주축은 남로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는 백운산으로 스며 들었다.

    반란군이 철수한 여수와 순천에 쳐들어간 국군의 보복은 방화와 함포사격부터 시작됐다.

    여수 시가지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고 들어간 진압군은 저항이 거의 없자 당황했다.

    반란군 주역이 빠져 나간 여수에는 소수 반군과 청년. 학생 일부만 남아 간간이 저항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진압군은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던 여수와 순천 시민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고 무자비한 보복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진압군에 의해 여수서국민학교 교정으로 끌려 나온 시민들. 가운데 선을 경계로 한 쪽은 다 처형되고 다른 쪽은 살아 남는다.

     

    진압군은 상륙하자마자 집집마다 샅샅이 뒤져 숨어있는 시민이나 부역혐의자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주민들은 모두 국민학교와 진남관, 공설운동장 등 공공기관에 모이게 했다.

    집결한 주민들은 살아남은 경찰이나 우익인사, 또는 그 가족들에 의해 삶과 죽음이 엇갈렸다.

    그들이 입구에서 손가락질 하거나 꿇려앉은 주민들 옆으로 지나가면서 '저 사람' 하면 운동장 뒤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처형이 진행되는 동안 여수 시내는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시체 태우는 연기와 악취로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여순반란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잡혀온 여고생들. (사진=실천문학사 제공)

     

    좌익이 집단학살극을 벌인 순천에서의 보복은 더 체계적이었다.

    진압군은 북국민학교 등에 수천 명씩 시민들을 모아놓고 심사를 벌였다.

    20대~40대 남성들은 팬티 바람으로 벌벌 떨며 심사관들 앞에 섰다.

    부역자로 확인되면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당한 후 총살대로 끌려갔다.

    그 광경을 아내와 자식들이 지켜보며 오열했다.

    적발된 부역자들은 5명씩 철사에 묶여 운동장 구석에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세워진 후 사살당했다.

    수천 명이 모인 넓은 운동장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총소리와 국군의 욕설, 구타하는 퍽퍽 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여수와 순천에만 최소 2,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죽어나갔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군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자, 신생 대한민국은 극우반공 세력이 운영하는 도살장으로 변해갔다.

    반란군의 거점이 되는 덕유산 일대 소백산맥 연봉들. 반란군은 이 일대를 무대로 빨치산 활동을 벌여 나간다.(사진=실천문학사 제공)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다시 보복극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철수하자 이번에는 군경의 보복이 시작된다.

    이 끝없는 비극은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과 좌익의 무지몽매한 민간인 학살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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