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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핏값으로 고기 구워 먹자고?"



책/학술

    "윤봉길 의사의 핏값으로 고기 구워 먹자고?"

    [임기상의 역사산책 74]"일본놈들이 빨리 망해서 해방되기를 기도한단다"

    ◈ 곽낙원 여사,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서거하다

    1934년 중국 남경에 모인 김구 선생의 가족들. 앉아있는 분이 어머니 곽낙원. 뒷줄 왼쪽부터 큰 아들 인, 백범 김구, 둘째 아들 신.

     

    1939년 4월 24일 중국의 중경.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자신이 살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을 불러 일렀다.

    "창수야~(김구의 본명)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라도 빨리 나라의 독립을 실현해다오. 에미는 그날을 볼 수 없겠지만 네가 성공해서 돌아가는 날 나와 아이들 에미의 유골을 갖고 돌아가 고국 땅에 묻어다오"

    이어 두 손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창수야~ 난 내 병을 알고 있어. 또 너희들이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어. 내가 죽은 뒤에도 꼭 인이와 신이에게 국가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

    유언을 남긴 곽 여사는 아들과 함께 한 파란만장한 50년 세월이 떠올랐다.

    나라를 잃고 그 다음해인 1911년 독립운동 하던 아들이 1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면회를 와서 태연하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시 곽 여사는 황해도 안악의 가산을 팔아 천리 먼길 한성으로 와 그에게 밥을 넣어주고 있었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하는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나랑 네 아내와 딸 세 사람은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괘념치 말아라. 감옥에서 몸 잘 간수하거라. 만일 밥이 모자라면 우리가 매일 두 차례씩 올 수 있단다"

    그러나 감옥 문을 나올 때는 얼굴이 온통 눈물투성이였다.

    김구 선생이 감형이 되어 5년만에 출옥했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이 위로잔치를 베풀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는데, 도중에 어머니에게 불려 나왔다.

    곽 여사는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알고 보니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알린 것이었다.

    곽 여사는 언제나 고생하는 며느리를 감쌌다.

    백범 김구는 "나는 집안 일에 한번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 내외 싸움에도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들을 따라 상해에 갔다가 둘째 손자 신을 데리고 다시 고향 안악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곽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손자를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어느 날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는 어떤 기도를 하세요?"

    "일본놈들이 빨리 망해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단다"

    ◈ 임시정부의 '호랑이' 곽낙원 여사, 나태한 독립운동가들을 꾸짖다

    1921년 상해에서 찍은 김구 선생의 가족 사진. 파란만장한 70평생 중 가장 단란했던 시절이었다. 부인 최준례 여사와 큰 아들 인. 3년 후 아내가 죽자 김구는 서거할 때까지 홀로 살았다.

     

    임시정부는 늘 가난했다.

    곽낙원 여사가 상해 융칭팡에 살 때 마을 뒤에 쓰레기장이 있었다.

    곽 여사는 낮에는 차마 가지 못하고 밤에 나가 쓰레기장을 뒤졌다.

    쓰레기 중에 중국 사람들이 채소를 다듬다가 버린 찌꺼기가 있었다.

    그녀는 그 찌꺼기를 모아다가 소금에 절여 음식을 만들었다.

    살기 위해서, 아니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남경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청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곽 여사의 생일상을 차려드리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곽 여사는 돈을 갖고 있는 엄항섭 선생을 불러 그 돈을 주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먹겠다고 말했다.

    생일날, 곽 여사는 축하연을 연다고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청년들을 자신의 셋방으로 초대한 뒤 식탁 위에 보자기가 싼 물건을 내놓았다.

    청년들이 입맛을 다시며 보자기를 펼쳐보니 엉뚱하게 권총 두 자루가 들어 있었다.

    곽 여사가 호통을 쳤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이 무슨 놈의 생일인가?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나라 찾는 일에 쓰도록 하게. 이 총으로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만 내 속이 편안하겠네"

    인천대공원 김구광장에 서있는 '곽낙원 여사'의 동상. 자애로운 얼굴이지만 밥그릇을 들고 비루한 행색을 하고 있다.

     

    어느날 나석주 의사가 상해에서 백범 김구과 함께 지내면서 백범의 생일임을 알고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고기와 반찬거리를 사서 곽 여사에게 갖다 드렸다.

    그러니까 나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기 직전의 일이다.

    곽 여사는 손님들이 돌아가자 회초리를 들고 들어와 아들의 종아리를 걷어 올리게 했다.

    그리고는 50살이 넘은 아들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의 생일같은 사소한 일을 동지들에게 알려서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 먹다니…"

    그때서야 어머니의 뜻을 안 백범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잘못을 빌었다.

    임시정부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오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하와이 교민을 비롯한 각계에서 군자금과 기부금이 들어와 한시름을 놓았다.

    재정이 넉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젊은 임시정부 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돼지고기라도 좀 사서 구워 먹었으면…"

    그 소리를 들은 곽 여사가 호통을 쳤다.

    "동지의 핏값으로 고기를 구워 먹자고? 너는 독립군 자격이 없는 놈이다. 어서 종아리 걷어라!"

    그날 그 젊은 인사는 곽 여사한테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중경 시절, 김구 선생이 불만세력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한달 동안 입원 가료를 한 적이 있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김구 선생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어머니가 찾아왔다.

    곽 여사는 아들을 보자마자 심하게 나무랬다.

    "왜놈 총에 맞아 죽어야지 자기 동포의 총에 맞는다는게 말이 되는가? 무슨 일을 어떻게 잘못했기에 동포의 총에 맞았단 말인가?"

    석오 이동녕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한 임정의 어른이었다. 그래도 곽 여사에게는 꼼짝 못했다. 왼쪽부터 김구, 박찬익, 이동녕, 엄항섭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곽낙원 여사는 학교도 안 다녔고 글도 몰랐지만 배운 사람들보다 말을 더 조리있게 했다.

    임시정부의 원로의 위치였던 이동녕 선생, 이시영 선생 등도 곽 여사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곽 여사는 원로들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영감들~ 그만 입 다물고 다들 나가시오.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일할 수 있도록 놔두란 말이오. 영감들이 뭣 때문에 이러쿵 저러쿵 자꾸 간섭하는 거요?"

    곽 여사는 원로들이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끼어들 때면 이렇게 나무랐다.

    원로들은 미소만 지을 뿐 화를 내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며 나가곤 했다.

    ◈ 중국의 공산화 앞두고 곽낙원 여사의 유해 서둘러 수습해 환국하다

    1948년 9월 22일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묘비 제막식에서 고축하시는 백범 선생.

     

    1939년 4월 26일 곽낙원 여사는 유언을 남기고 이틀 후, 아들 김구와 둘째 손자 김신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김구 선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 불효자 때문에 어머니가 평생 고생만 하시다 여기서 이렇게 돌아가시고 말았군요"

    그는 두 손으로 땅을 마구 치며 통곡했다.

    곽 여사는 허상산에 묻혔다.

    곽 여사의 유언은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지킬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은 1948년 평양에 갔다 온 후 아들 김신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국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안되겠다. 묻힌 곳을 네가 제일 잘 아니까 빨리 가서 유해를 모셔와라"

    김신(오른쪽)이 아버지 백범 김구와 조카 김효자와 함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불붙어 극심한 혼란상태에 있었다.

    중국이 공산당 손에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김신은 할머니와 어머니, 형님의 유골과 이동녕 선생, 차이석 선생의 유해를 수습해왔다.

    언론인 손세일 선생은 곽낙원 여사의 일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회에 공헌하고 세상에 빛을 남긴 여성들은 3가지 상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논개 같이 애국을 하거나 황진이 같이 문학을 남긴 여성이 있다.

    둘째, 지어미가 되기 이전부터 인격을 겸비해 더욱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한석봉 어머니나 신사임당 같은 여성이 있다.

    셋째,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에서처럼 처음에는 그저 무지몽매한 아낙에 불과했으나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아들로 인해 점차 의식화되어가는 여인상이 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세번째로 보는 것은 그녀가 여성으로보다는 철저히 의식화된 어머니로 한 평생을 살아갔기 때문이다"

    백범기념관에 서있는 곽낙원 여사의 청동상. (사진=백범기념관 제공)

     

    처음에는 아들로 인해 의식화되기 시작했지만 곧 아들을 다스릴 수 있는 덕과 도량을 겸비한 곽낙원 여사.

    그 어느 성현의 어머니보다 위대한 것은 아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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