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전두환과 高大 시위'…김준엽 총장의 선택



책/학술

    '전두환과 高大 시위'…김준엽 총장의 선택

    [임기상의 역사산책 66]김준엽 총장의 사퇴를 저지하다 아수라장 된 고려대

    김준엽 총장이 마지막 공식행사인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하고 있다. (사진=고대신문 제공)

     

    1985년 2월 25일 오전 10시 고려대학교 대운동장.

    졸업식을 앞두고 김준엽 총장이 전두환 정권의 압력 때문에 사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고려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날은 김 총장이 고대를 떠나기 전 마지막 공식행사인 졸업식이 예정돼 있었다.

    교기를 앞세우고 김 총장과 이사장, 교무위원, 내빈 순으로 줄을 이어 운동장으로 내려가는데 학생들이 "총장님~ 기운 내세요", "총장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총장님 만세~"라고 외쳤다.

    피켓을 든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졸업생들 앞의 차가운 땅바닥에 열을 지어 주저앉았다.

    피켓에는 "총장사퇴 결사반대! 학원자유 침탈 즉각 중지하라!", "10만 고대인의 피끓는 의지로 대학의 관제화를 분쇄하자!", "고대인의 손으로 고대정신 수호하자!", "굴욕적인 총장사퇴 결사반대!", "사학에의 관권개입 즉각 중단하라!", "굴욕적인 총장사퇴 결사 반대!", "문교부 너 학원을 도구화하려는가?" 등의 구호가 써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김 총장이 본관에 있는 총장실로 들어가자 수백명의 학생들이 따라와 건물 앞에서 광복군 노래를 합창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3천리 3천만의 우리 동포를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갑세다"

    젊은 날 광복군에서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운 김준엽 총장을 격려하기 위해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때부터 한달간 고려대 교정과 학교 앞은 개교 이래 최대 최장의 시위가 벌어졌다.

    개학과 함께 불붙은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 고려대는 한달간 모든 학사일정이 마비됐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다른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잘리고 고려대만 총장이 잘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학내외 전 구성원이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은 모든 수업을 거부하고 연일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는 학생들 뿐아니라 젊은 교수, 교직원, 기숙사 수위와 그가 키우는 강아지까지 가세했다.

    당시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쫒겨다니는 양상이었는데, 이때는 5천 명이 넘는 고대생들에게 경찰이 밀려 연신 교문이 뚫리기 일쑤였다.

    경찰이나 고려대 재단측은 시위가 3, 4일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연일 고려대에 출동해 학생들의 교문 밖 진출을 막기 위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고 있는 전투경찰.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시위는 안암동 고려대 본교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고대와 연대 야구전이 벌어진 잠실 종합운동장 앞에서, 이과대. 공대. 농대생이 공부하는 애기능 캠퍼스에서, 조치원 분교에서도 격렬한 데모와 철야농성이 이어졌다.

    교내 게시판은 전두환 정부와 문교부, 고대 재단을 비난하는 대자보로 도배질했다.

    총학생회는 물론, 서클연합회, 정경대와 문과대 교수들의 성명서로 얼룩졌다.

    3월 15일에는 "굴욕적인 총장사퇴 철회하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고 '고대혼의 압살'을 애도하기 위한 '민족고대 정기 장례식'이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정경대와 문과대 교수 50명과 총학생회가 공동 상주가 되어 치러졌다.

    고려대 학생회관 옆 게시판에는 연일 김준엽 총장의 사퇴를 반대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그 당시 각 대학마다 어용총장이나 무능총장 물러가라는 시위가 빈발했는데 총장사퇴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진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인가?

    ◈ 광복군 출신의 김준엽 총장, 전두환 정권과 계속 충돌하다

    1982년 6월 김상협 총장이 임기 만료를 두달 앞두고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그 뒤를 이어 김준엽 교수가 제9대 총장에 오른다.

    7월 10일 총장으로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김준엽 총장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첫째, 결코 비굴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총장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겠다.

    둘째, 총장으로서 업적을 내지 못한다든지 또는 업적을 낼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광복군 출신의 강직한 학자 김준엽이 총장생활 하루를 보내보니 이 분위기에서 4년 임기를 채우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취임 후 김 총장이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총장 비서실에 진을 치고 앉아 온갖 간섭과 협박을 일삼던 기관원들을 쫒아낸 일이다.

    김준엽 총장이 2년 8개월간 총장으로 근무했던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 (사진=고려대 제공)

     

    보안사, 안기부, 치안본부, 시경, 성북경찰서, 문교부 감시원으로 구성된 이들 기관원들은 총장실에 죽치고 앉아 학교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들 때문에 결재를 받으러 온 교수들이 앉을 자리도 없었고, 이들을 접대하느라 학생들의 등록금이 유용되고 있었다.

    이들은 총장실 뿐만 아니라 사무처, 학생처, 교무처를 비롯해 부속기관까지 찾아 다니면서 뇌물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들을 학교 밖으로 쫒아내자 "총장녀석 며칠이나 살아남는가 보자" 하면서 이를 갈고 있다는 얘기가 총장실까지 들렸다.

    이어 남발되는 '명예박사 학위 수여' 문제로 문교부와 갈등을 빚었다.

    김 총장은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외무장관이나 국회의장 또는 동남아 국가의 군 참모총장에게 학위를 주라는 문교부의 지시를 다 거절했다.

    무안을 당한 문교부는 '김 총장이 콧대가 세다'고 불만을 가졌다.

    쟁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위 주동학생을 제적하라는 압력에는 '학칙에 의거해' 처리하겠다고 버텼고,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 조직을 허용했다.

    해직된 고대 교수 6명에게는 계속 생활비를 보내면서 문교부나 전국총학장회의에서 복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전두환 정부가 방침을 바꿔 자기가 있던 대학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른 대학에는 가도 좋다고 통보하자 김 총장은 단호히 반대했다.

    "해직당한 교수들은 마땅히 자기가 있던 대학으로 복직해야지, 다른 대학으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고려대는 다른 대학의 해직교수를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총선거를 앞둔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고려해 1984년 6월 14일 해직교수들의 원교복직을 허용했다.

    김준엽 총장은 즉각 복직절차를 밟아 해직교수 6명을 7월 1일자로 학교에 돌아와 2학기부터 강의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부 눈치를 보면서 2학기 초나 다음해 발령을 내려던 다른 대학들이 당황한 것은 불문가지다.

    이렇게 사사건건 대립하던 문교부와 김 총장은 드디어 '민정당사 농성사건'을 계기로 충돌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김총장은 학생시위가 벌어지면 총장을 불러다 학생을 처벌하라고 지시하는 문교부와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었다.

    ◈ "대학생 111명을 제적하라" vs "내 목을 걸고 학생들을 지키겠다"

    민정당사에 진입한 대학생들을 경찰이 최루탄까지 쏘면서 전원 연행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4년 11월 14일 오후 4시 반경, 고려대·연대·성대·서울대 학생 264명이 관훈동에 있는 민정당 중앙당사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본관 9층 소회의실을 점거한 채 총학생회 인정, 문교부장관 문책, 노동자 권익 옹호 등 14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민정당 대표와의 자유토론을 요구했다.

    그러자 경찰은 다음날 새벽 5시경 문과 벽을 부수고 최루탄을 쏘면서 난입해 학생들 전원을 연행했다.

    이 가운데 고려대 학생은 81명에 달했다.

    김준엽 총장은 긴급 교무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경찰조사와 검찰신문이 끝난 뒤 법원의 판결이 나면 학칙에 따라 적절히 처리한다"는 원칙을 재천명했다.

    나흘 후 권이혁 문교부장관이 김 총장과 서울대, 연대, 성대 총장을 플라자 호텔로 불렀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환경처 장관 임명장을 받는 권이혁. 전두환 밑에서 문교부.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후 또 임명장을 받았다.

     

    객실에 앉자마자 총장들에게 프린트물을 나눠줬다.

    김 총장이 받은 종이에는 81명의 학생 명단이 적혀 있었고, 각 학생마다 죄상과 함께 학업성적처럼 A, B, C, D…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권이혁 문교부장관은 이 가운데 죄질이 나쁜 111명을 다음날 아침 9시 반까지 제적하라고 윽박질렀다.

    격분한 김준엽 총장은 "나는 제적 못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제적이 되든, 퇴학이 되든, 나는 경찰조사와 검찰조사가 끝난 후 정식으로 재판을 받은 뒤에 그 판결을 토대로 우리 학칙에 비추어 적절하게 처리하겠다"고 통보했다.

    권 장관과 김 총장의 격론이 벌어졌다.

    누군가 김 총장에게 식사를 하시라고 권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총장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아이들을 사형집행하라는데 밥이 먹히는가?"

    이 회동 이후에도 문교부나 기관원들은 학생들을 제적시키라고 총장이나 학생처장에게 독촉하고 협박했다.

    고민에 빠진 김 총장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민정당 실력자인 이종찬 원내총무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였던 이종찬 의원. 독립투사 후손답게 김준엽 총장을 도와 대학생들의 대량 제적사태를 막는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 의원은 독립투사인 이회영. 이시영 일가의 종손으로 광복군 출신인 김 총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김 총장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은 이 의원은 "김 총장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 총장은 "피해자인 민정당이 행정부에 학생들의 처벌을 관대하게 해달라고 하고, 학생들의 처벌을 대학의 자율에 맡기라고만 해달라. 또 문교부의 압력이 너무 심하니 민정당이 합의하면 문교부에 그렇게 요청해달라"고 당부했다.

    다행히 민정당은 '처벌이나 징계보다는 선도하는 차원에서 처리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이렇게 되니 바보가 된 것은 대학생들을 대량 제적하라고 닥달하던 문교부였다.

    "우리는 고생만 실컷 하고 결국 학생처벌에 앞장섰다는 비난만 사고 있다"고 푸념했다.

    이를 갈고 있는 문교부는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985년 2월 4일 문교부는 갑자기 감사반을 고려대에 파견해 나흘동안 샅샅이 뒤졌다.

    별 하자가 드러나지 않자 이번에는 교직원 자녀에 대한 특례 입학을 들고 나왔다.

    당시에는 고려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립대학이 교직원 자녀에게 특례 입학의 특혜를 주고 있었다.

    문교부는 이 해에 특혜를 받고 입학한 교직원 자녀 25명을 제적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 문제를 유독 고려대만 적용한 것은 학생 25명의 목과 김준엽 총장의 목을 맞교환하자는 것이다.

    고심 끝에 김 총장은 권이혁 장관을 만나 학생들을 구제하는 대신 2월 25일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총장 자리를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퇴임식도 없이, 고별 강연도 없이 조용히 고려대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갔다.

    ◈ 민주화에 이은 대통령선거에서 각 후보들 "김준엽을 국무총리로 추대하겠다"

    1974년 봄, 김준엽 교수의 동양최근세사 강의실.

    교실에 모인 학생들은 약간 들뜬 기분으로 김 교수를 기다렸다.

    마침내 김 교수가 나타나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날 아침 조간신문에 김 교수가 통일원장관 입각 요청을 거절했다는 기사가 난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유신시대의 민심이었다.

    촉망받던 지식인이 어느 날 갑자기 유신독재정권에 발탁돼 고관이 되는 세태에 실망하던 차에 김 교수의 장관직 거절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후보(왼쪽)와 김대중 후보는 경쟁적으로 김준엽 전 고대 총장을 영입하려고 공을 들였다.

     

    6월항쟁 끝에 6.29선언이 나오고 대통령 직선이 실시됐다.

    대선을 앞두고 먼저 김영삼 후보측이 학문에 몰두하던 김준엽 전 총장 영입에 나섰다.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김 전 총장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힐 계획이니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들어와 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계나 관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김준엽의 결심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이번에는 김대중 후보측에서 사람을 보내 제안을 했다.

    "평화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들어와 대선을 돕다가 김 총재가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에 임명한다는 것이 총재의 구상입니다"

    김준엽은 김영삼 후보에게 밝힌대로 절대 공직을 맡을 생각이 없고, 지금이라도 야당후보 단일화에 힘을 쏟으라고 당부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이번에는 노태우 당선자가 만나자고 해서 안가를 방문했다.

    대통령 자리를 주고 받은 전두환(오른쪽)과 노태우. 전두환은 김준엽을 탄압했고, 노태우는 총리로 영입하려고 발품을 팔았다. (사진=청와대출입사진기자단 제공)

     

    훗날 김준엽은 이렇게 회고했다.

    "노태우 당선자에게 내가 국무총리를 사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 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는다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의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김준엽은 끝내 벼슬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학자의 길을 고수한다.

    다음해 5월 고려대 장덕진 교우회장이 젊은 교우들이 교우회에 많이 참가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특강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준엽은 세월의 변화를 새삼 느꼈다.

    전두환 정권이 무서워 그에게 자동적으로 주게 되어 있는 명예교수를 2년간 주지도 않고, 그가 교정에 발을 들여 놓는 것도 꺼렸던 학교당국이 아닌가?

    장 회장에게 학교의 허락을 받았는가를 몇번이고 확인했다.

    강연회장은 김준엽이 총장 시절 공들여 지어놓은 과학도서관의 대강당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입추의 여지도 없이 강당을 메웠고, 자리가 모자라 계단에도 앉았고, 통로에도 가득 서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약 1,300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청중 속에는 젊은 교우들 뿐만 아니라 김준엽이 잘 아는 나이 든 교우들도 많이 앉아 있었다.

    김준엽이 강당으로 들어서자 제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분동안 박수를 치면서 환영해 주었다.

    노교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김준엽 선생은 서거하기 전 5권으로 구성된 자서전 '장정'을 남겼다.

     

    세월이 흘러 2011년 6월 7일 김준엽은 먼저 떠난 평생의 동지 장준하를 따라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관 자리가 나면 서로 하겠다고 나서고, 청문회장에 서면 추악한 과거가 드러나는 교수들을 보면 일체의 공직을 사양하고 학자의 길로만 간 김준엽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