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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카퍼레이드까지 벌이며 "베트남에 한국군 보내라"



책/학술

    미국서 카퍼레이드까지 벌이며 "베트남에 한국군 보내라"

    [임기상의 역사산책 63]곳간에 쌀은 쌓였지만 베트남 민족에게 고통을 주다

    뉴욕에 도착한 박 대통령 내외는 카퍼레이드에서 100만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 존슨 대통령, 전용기도 보내고 카퍼레이드도 연출하고…

    1965년 5월 16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낸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 가난한 한국은 대통령 전용기도 없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를 이 작은 나라에 보낸 것은 드문 사례였다.

    그만큼 당시 베트남 전쟁의 뻘밭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음날 워싱톤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영접한 존슨 대통령은 큰 리무진에 동승해 영빈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3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앞차에는 양국 정상이, 뒷차에는 양국 영부인이 타고 21대의 모터사이클이 선도하는 행렬이었다.

    이날 오후 5시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존슨 대통령이 "우리는 한국에 대해 가능한 모든 원조수단을 동원할 생각입니다. 월남에 한국군을 추가로 파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 사이에 너무 많은 병력을 월남에 파견하게 되면 휴전선 방어력이 약화되고 북한의 모험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월남에 병력을 증파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틀 후 뉴욕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동안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이같은 융숭한 대접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문제는 존슨 대통령의 전임자인 케네디 대통령 집권 시절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 부처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와 첫 번째 만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적극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서둘렀다.

    쿠데타 승인을 위해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감사의 뜻을 밝히고 이후에 차차 검토해 나가자고 말을 흐렸다.

    당시 케네디는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달라스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후임 존슨 대통령은 달랐다.

    ◈ 한국 정부, 초조한 미국을 상대로 철저하게 실리를 챙기다

    존슨 정부는 1964년 봄부터 베트남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공식 결정했다.

    이때부터 남부의 게릴라들 소탕을 위한 병력을 차례차례 상륙시키는 한편,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미군은 최대 54만 명까지 늘었지만 거기까지가 한도였다.

    결국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나라는 한국과 태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한국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은 한국은 우선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 교관단을 베트남에 보냈다.

    1964년 7월 14일에 열린 제1이동외과병원 창설식.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파병부대 창설이었다.

     

    이 정도로 만족할 미국이 아니었다.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남베트남에서 후방지원을 맡을 비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번 파병도 일사천리로 진행돼 2,000명 규모의 '비둘기부대'가 1965년 3월 사이공 동북쪽 지안에 도착해 사이공 외곽도로 건설 등 각종 지원업무를 시작했다.

    베트남 상황이 더 악화되자 결국 미국은 1개 사단의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이번 기회에 받을 건 다 받자는 생각을 갖고 다양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1. 파병 병력의 상한선은 5만 명 이내로 한다.
    2.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3. 북한이 침공하면 미군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4. 파병에 드는 경비를 미국이 부담한다.
    5.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보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 진출을 보장한다.

    이 서한을 받은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해 화끈하게 대접을 한 다음 요구조건을 대부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해서 수도사단과 제2해병사단을 개편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1965년 10월에 베트남으로 출발해 중부 베트남 해안가를 중심으로 작전을 벌인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할 장병들이 서울역을 향해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이걸로 끝날 만큼 베트남전 상황이 녹녹치 않았다.

    베트남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적 '베트콩'에게 매번 당하고 있는 미군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존슨 정부는 험프리 부통령을 특사로 파견해 한국의 안보 보장과 지원을 약속하면서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파병에 따른 조건을 둘러싸고 브라운 주한미대사와 이동원 외무장관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보에 양보를 거듭한 미국은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 한국군 파병에 따른 경비의 전액 부담, 파병된 한국군에 대한 처우 개선, 전쟁으로 형성된 특수(特需)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14개 조항의 '브라운 각서'를 제출했다.

    한국군의 추가 파병에 앞서 한국이 요구한 원조를 약속한 문서 '브라운 각서'

     

    이 문서는 우리 젊은이들이 다른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얻은 최대 성과였다.

    이 각서가 실행됨에 따라 베트남전 참전기간인 8년간 막대한 달러가 한국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다.

    보병 9사단을 중심으로 재편된 '백마부대'는 1966년 4월 6일 환송식을 갖고 베트남으로 출발했다.

    이로써 군단급으로 확대된 한국군은 매년 4만 5,000명 정도가 베트남에 주둔하며 독자적인 작전을 실시한다.

    ◈ 경제성장의 동력을 얻었으나 댓가는 컸던 '베트남전 참전'

    베트남의 농촌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청룡부대. 용감하게 싸웠지만 아군의 피해가 발생하면 무자비하게 보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베트남에 주둔한 모든 외국군은 철수길에 오른다.

    한국군도 철수를 시작해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귀국길에 오름에 따라 8년 6개월 동안 파병되었던 한국 병사들은 모두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그동안 참전한 군인만 32만 5,517명, 전사자는 5,099명, 부상자만 1만 1,232명이 발생했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참전군인 중 2만여 명이 고엽제 등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이하게도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북한의 인민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은 최근 하노이 인근 지역에서 인민군의 전사자 위령탑과 14구의 사체가 매장된 묘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공군 소속 조종사 11명과 정비사 3명으로 1967년 미공군의 하이퐁 항구 공습 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들 외에도 공병과 심리전 부대 등과 무기, 군복 등을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1973년 3월 20일 귀국한 주월군 사령부 지휘관들이 국립묘지를 찾아 전투에서 숨진 전우의 영혼을 달랬다.

     

    그렇다면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실익을 얻었을까?

    베트남 파병 직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로 북한의 140달러의 70% 수준이었다.

    연간 수출총액이 1억 달러도 안되는 9,300만 달러에 불과했으니 5,000억 달러를 넘어선 지금에 봐서도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그 가난을 벗어나는 계기 중 하나를 베트남 파병이 만들었다.

    내 어린 시절에도 참전 용사나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이웃집에 TV가 들어와 온 동네 사람들이 같이 시청하고, 커피라는 처음 본 음료를 맛본 기억이 난다.

    병사들이. 기술자들이 보내온 달러로 우리 베이비붐 세대는 학비를 조달했다.

    파병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대략 50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 50억 달러는 1963년~1964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50년간의 수출총액에 달한다.

    36년간의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가 실감난다.

    일본이 제공한 대일청구권 자금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로 모두 합해 8억 달러에 불과했다.

    베트남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우리 근로자들. 베트남전이 끝나자 중동으로 진출한다.

     

    한국이 참전 대가로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누리고 있는 동안 베트남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쉽게 얘기하면, 한반도를 침공한 일본군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와중에 일본의 우방 베트남 군사들이 상륙해 우리 독립군 등에 총을 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 미안해하는 한국…과거를 잊고 미래만 생각하면서 협력하자는 베트남

    종군기자로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던 안병찬 전 한국일보 사이공 특파원은 이렇게 조언했다.

    "베트남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 통일전쟁입니다. 이제 우리의 상대는 부정과 부패로 망한 남베트남이 아니라, 단결과 인내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한 북베트남입니다.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미국과의 통일전쟁,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모두 승리했던 이들을 우리 한국인들이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12월 22일 이상옥 당시 외무부장관이 하노이를 방문해 베트남의 외교부장관과 함께 양국의 수교를 위한 협정서에 서명했다. (사진=외교부 제공)

     

    베트남은 통일 후 개혁.개방정책을 벌이면서 어제의 적국인 한국에 먼저 수교를 요청했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을 벤치마킹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한국이 빠른 시일 안에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고, 문화적 여건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군한 후 19년만에 두 나라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빠른 속도로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수교를 위한 협정을 맺을 때 이상옥 장관은 정중하게 과거에 대한 사과를 했다.

    이어 1998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김 대통령은 2001년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재차 공식 사과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베트남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베트남 당국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우리는 과거를 잊고 미래만 바라보고 있다. 그 아픈 역사를 '기억은 하되 용서하겠다"고 포용했다.

    그들은 잊으려고 하지만 가해자였던 한국인마저 잊어서는 안될 뼈아픈 과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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