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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이 강등돼도 좋다…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



책/학술

    "계급이 강등돼도 좋다…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52]몽클라르 장군의 프랑스군, 중공군의 공세 물리치다

    한국정부가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한 프랑스군 지휘자 몽클라르 장군. 중령으로 계급을 낮추고 참전해 중공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 1,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클라르 중장', 한국전 참전을 자원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유엔군 산하 프랑스 대대'란 이름으로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프랑스 대대는 제1중대가 해병대, 제2중대가 수도방위부대, 제3부대가 공수부대와 외인부대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새로운 부대였다.

    장교 39명, 사병 350명 등 모두 1,054명으로 구성된 대대는 제2차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최정예부대였다.

    그러나 부대 구성이 복잡하고 난다 긴다하는 장병들이 너무 많아 통솔이 어려웠다.

    부대를 한창 창설하고 있던 1950년 8월 30일 파리에 있는 쥘 모슈 국방부차관 집무실에 건장한 체구에 약간 다리를 저는 중년의 신사가 들어섰다.

    "한국전쟁 파병 전투대대에 지원하려고 합니다"

    "아니~ 당신은 몽클라르 장군이 아닙니까?"

    2차세계대전 직후 소장 시절의 몽클라르 장군. 전쟁 기간에 18번 부상을 입었고, 18번 훈장을 받았다.

     

    몽클라르 장군은 누구인가?

    제1차세계대전에 초급장교로 활약하다, 2차대전에서는 노르웨이 나르빅에서 프랑스의 유일한 승리를 이끌었고, 프랑스가 항복하자 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망명해 독일군과 싸웠던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차관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장군께서는 중장으로 예편했습니다. 한국에 파견되는 전투부대는 대대급으로 지휘관은 중령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계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나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58살의 몽클라르 중령은 대대장으로 취임했고, 관록과 카리스마로 모래알같은 부대를 단숨에 장악했다.

    중령은 만삭의 아내를 두고 장병들과 함께 1950년 10월 25일 수송선을 타고 마르세이유를 출발해 한국으로 향했다.

    ◈ 프랑스 대대, 중공군과의 격전지인 원주지구에 투입되다

    프랑스군이 부산에 도착한 11월 29일은 유엔군이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일제히 패주나 후퇴를 하던 시기였다.

    유엔군은 정신없이 남하해 서울까지 내준 뒤 1951년 1월 7일 서울 남쪽의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때부터 새로 부임한 지휘관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조심스럽게 북상하기 시작했다.

    2월 초순에는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회성~하진부리까지 올라갔다.

    중공군은 '2월 공세'의 결전지로 양평군 지평리와 횡성, 원주를 정해 이 곳에 병력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공세로 국군 3개 사단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후퇴했으며, 그 왼쪽에 있던 미 제2사단 23연대가 지평리에서 고립됐다.

    지평리 전투 상황도. 사면으로 포위당한 요새에서 프랑스군은 서쪽 진지를 고수했다. (사진=국방군사연구소 제공)

     

    지평리는 동서로 이어지는 중앙선 철도와 홍천에서 여주로 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분지 형태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다.

    중공군은 이 곳이 뚫리면 남한강을 도하해 서울 남쪽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사면에 3개 사단을 투입해 미 23연대를 은밀하게 포위했다.

    당시 23연대는 예하 3개 대대 이외에 몽클라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 제1유격중대, 제37포병대대, 제503야포대대 등 5천여 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6배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몽클라르 중령과 함께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폴 프리드먼 대령.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부대를 지휘해 미 육군의 모범이 되었다.

     

    연대장 프리드먼 대령은 부대가 고립되고, 중공군에게 포위되자 철수를 건의했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연대가 끝까지 남아서 싸운다면, 꼭 구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리지웨이 장군에게 지평리는 중공군 대군을 끌어들이는 미끼였다.

    그는 여기서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을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분쇄하는 새로운 전략을 실험할 생각이었다.

    용기를 얻은 프리드먼 중령은 높은 고지를 포기하고 지평리역을 중심으로 직경 약 1.5㎞의 둥근 방어진지를 구축한 후 부대를 배치했다.

    북쪽에는 1대대를, 서쪽에는 프랑스 대대를, 남쪽에는 2대대를, 동쪽에는 3대대를 배치했다.

    ◈ 몽클라르 중령, 심리전과 백병전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치다

    1951년 2월 13일 밤 10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세의 칼끝은 지형상 수비가 취약한 남쪽과 프랑스군이 지키는 서쪽으로 집중됐다.

    중공군이 피리와 나팔 등을 불면서 일제히 몰려오자 몽클라르 장군은 손으로 돌리면 괴성을 내는 사이렌을 울리며 기세를 꺾었다.

    프랑스대대 병사들이 전투 중에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해서 옮기고 있다.

     

    중공군이 진지 안으로 몰려 들어오자 몽클라르 중령 이하 모든 장병들이 철모를 벗고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육박전을 벌였다.

    이 모습을 보고 겁먹은 중공군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다음날 저녁 7시에 다시 중공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몽클라르 중령은 어제처럼 "20m 앞까지 올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한 후 일제히 사격해 전멸시켰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평리 상공은 조명탄, 예광탄, 신호탄으로 불야성을 이루며 밤새 백병전이 벌어졌다.

    새벽이 되자 중공군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 B-26경폭격기들이 날아와 야산으로 후퇴하는 중공군에게 폭탄을 쏟아부었다.

    격전이 벌어진지 사흘째인 2월 15일 드디어 리지웨이 장군이 약속한 구원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평리에 도착했다.

    리지웨이 장군의 지시를 받은 미 제1기병사단의 5연대 중대원 160명과 전차 23대는 중공군과 혈전을 벌이며 오후 5시에 23연대 전차부대와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미 공군의 폭격이 재개되고 증원군이 도착한 것을 본 중공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 유엔군, 지평리 전투의 여세를 몰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다

    지평리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던 프랑스 대대 부대원들이 전투가 끝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손실은 5천 명에 달했다.

    프랑스 대대를 포함한 23연대의 손실은 전사자 52명, 전상자 259명, 실종자 42명이었다.

    지평리 전투는 그렇게 크지 않은 전투였다.

    그러나 그 승리의 여파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을 맞아 연전연패하던 유엔군은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고립된 작은 부대가 6배에 달하는 중공군을 패퇴시키자, 중공군이 그렇게 강한 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지평리와 원주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공군. 이번 전투를 통해 중공군의 약점이 드러났다.

     

    리지웨이 장군은 자신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은 아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공군의 병참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찾아냈다.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오른쪽)과 몽클라르 중령

     

    지평리 전투에서 나타난 것처럼 "중공군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3일 이상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렇게 해서 유엔군은 승세를 타고 2월 21일을 기해 전 전선에 걸쳐 공격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3월 15~1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도선까지 북상했다.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 전투 외에도 32개월 동안 쌍터널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화살머리고지 전투, 중가산지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프랑스군은 모두 3개 대대 약 3,500명이 교대로 참전해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 등 모두 1,289명의 인명피해를 봤다.

    참전한 병사 중 3분의 1이 희생된 셈이다.

    ◈ 몽클라르 장군, 귀국해 두번째로 제대한 후 한국을 그리다 서거하다

    2010년 방한한 몽클라르 장군의 외동딸 파비엔느 몽클라르 (사진=국방부 제공)

     

    "아버지는 억압받는 민족을 돕는 게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버지가 한국을 위해 6.25전쟁에 참전하신 것처럼 언젠가는 프랑스인들이 한국인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2010년 10월 몽클라르 장군의 외동딸 파비엔느 몽클라르는 한국을 방문해 지평리 전투 현장도 둘러보고 강연회도 가졌다.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했을 때 태어난 파비엔느는 생전의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도 유독 한국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한국인들은 매우 용감해 만약 프랑스가 위험에 처하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되겠다 할 정도로 훌륭한 군인이 많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또 한국인들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어요. 아마도 한국인들이 36년이라는 긴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사진=국방부 제공)

     

    청중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음과 같은 몽클레르 장군의 말이다.

    "아버지는 종종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참전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은 반드시 참전했어야 했던 전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매년 파리에서 모인다는 한국전쟁참전용사회의 노병들은 한국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남쪽으로 향하는 끝없는 피난민의 행렬을 보면서 '과연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모든 나라가 부러워할 만큼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우리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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