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문창극은 왜 '달레 신부'를 왜곡 인용했을까?



책/학술

    문창극은 왜 '달레 신부'를 왜곡 인용했을까?

    [임기상의 역사산책 45]조선 비하했다는 선교사들 "정말 조선을 사랑했다"

    ◈ 문창극, 조선에 오지도 않은 달레 신부의 글을 인용해 "조선은 부패하고 곤궁하다"

    19세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프랑스 신부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을 들어보자.

    "1874년에 달레 신부라는 분이 왔습니다.
    이 분이 한국에 와서 한국을 보고나서 '코리아의 교회 역사'를 썼습니다.
    거기에 쓴 1874년의 조선 상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고에 저장은 장부 상에만 있다.
    지방 병기고에는 쓸만한 탄약도 무기도 없다.
    관리들이 다 팔아먹고 누더기 몇 조각과 고철 나부랭이를 대신 갖다 놨다.
    아전과 수령은 그들 마음에만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강탈한다.
    백성은 하도 곤궁하여 서해안 사람은 밀수업자에게 어린 딸을 쌀 한 말에 팔고 있다.
    길마다 송장이 널려 있다'
    이것이 1874년 달레 신부가 본 한국의 현상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달레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적이 없다.

    1874년에 달레 신부는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교회사>라는 기념비적인 저서를 빠리에서 발간했다.

    그는 빠리의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선교 활동보다는 문필가로 유명했다.

    달레 신부는 1877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위해 일본과 만주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조선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문창극의 강연은 기본 사실부터 잘못된 것이다.

    ◈ '달레 신부'와 '다블뤼 주교'를 혼동하고, 조선 실정도 왜곡하고...

    조선에서 21년간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다블뤼 주교

     

    문창극은 조선에 와서 비밀리에 전도 활동을 벌이며 달레 신부에게 조선 상황과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 등 중요한 자료를 보낸 다블뤼 주교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다블뤼 주교는 1846년 10월 12일 조선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남 강경의 황산포에 상륙해 순교할 때까지 21년간 목회활동을 벌였다.

    그가 보낸 서한을 보면 처음에는 '더럽고 미개하고 풍속이 부패한 나라'라고 보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다.

    문창극이 묘사한 조선의 처참한 광경을 묘사한 글은 찾지 못했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주로 시골 농가를 전전했을 다블뤼 주교가 읍내 관아의 창고나 병기고, 관헌들의 행태를 봤을 리가 없다.

    반대로 이런 글들을 남긴다.

    "이웃에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돕고 화재를 당한 집이 있으면 집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공짜로 일을 해주는 형제애를 발휘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가난하다고 자녀들을 내버리는 유럽 사람들은 창피해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자선 행위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적어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판소리라는 조선식 연극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연극보다 자연스럽습니다"

    문창극은 다양한 주교의 서한 중에 '미개한 나라'라는 첫번째 묘사에 사로잡혀 점차 긍정적으로 달라지는 주교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 문창극, 섬에서 한달 머물다 떠난 독일인 선교사의 글을 침소봉대하다

    중국 복건성의 수병 차림을 한 귀츨라프 선교사와 그가 다닌 여행의 궤적

     

    1832년 7월 23일, 충남 보령군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고대도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천톤급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독일 출신의 영국 선교사 귀츨라프가 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나라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지만 주민은 얼마 없고 개발도 안되었다. 그만큼 밉살스런 쇄국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곳에서 한달간 체류하면서 그는 조선이 곧 개방할 것으로 믿었고, 관리들과 주민들의 순박하고 친절한 접대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조선 관리들에게 국왕에게 전해달라며 통상소원 서한과 유리그릇, 모직물 등의 선물을 전했다.

    선물 중에는 성서 한질과 전도문서도 들어 있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배에 올라온 주민들에게 전도도 하고, 감자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다.

    8월 9일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돌려주면서 중국 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결국 귀츨라프 일행은 식량과 식수를 공급받은 후 후일을 기약하며 조선을 떠났다.

    1832년 조선을 방문해 성경을 전해주었던 네델란드 선교사 귀츨라프의 전도 여행기

     

    귀츨라프는 훗날 여행기에서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이런 귀츨라프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은 다 무시하고 문창극은 강연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귀출라프가 조선을 어떻게 봤냐?
    조선 사람들은 불결과 빈곤으로 자기 생애를 보내야 하는 끔찍한 거처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피부는 어김없이 때로 덮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몇달씩 씻지 않아서 이 따위의 해충이 득실댔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해충을 잡아죽이는 짓을 주저하지 않았다.
    살림도구는 서툴게 빚어졌다.
    진흙으로 빚어졌는데 상상할 수 없이 조잡한 종류였다"

    정말 이런 보고서를 썼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고작 한달간 주민도 별로 없는 조그만 섬 이야기를 조선 전체로 침소봉대했다.

    한양이 다르고, 지방마다 다르고, 낙후된 섬의 실정도 제각기 다른데...

    평생 해왔다는 문창극의 기자 정신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 조선을 너무나 사랑한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34인 '스코필드 박사'

    스코필드 박사 서거 45주년에 헌정된 자료집 표지 (사진=호랑이 스코필드기념사업회 제공)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서 의료, 선교,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벌인 영국 출신의 캐나다인이다.

    그는 1916년 안락한 캐나다 교수 자리를 버리고 아내와 함께 조선에 와서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다.

    그는 일제의 지배하에서 고통받는 조선인의 아픔을 뼈져리게 느끼고 모든 힘을 다해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는 1919년 2월 5일 3.1운동을 앞두고 33인 중 하나인 이갑성을 만나 거사 계획을 듣고 해외 정세 분석 일을 맡게 된다.

    3.1운동이 시작되자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시위와 일본 군경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어 전 세계에 알린다.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로 달려가 일본군이 주민을 학살한 현장을 (본인 표현에 따르면)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촬영해 세상에 알린다.

    (사진=호랑이 스코필드기념사업회 제공)

     

    5월에는 유관순, 노순경, 어윤희 등 3.1운동 때문에 수감된 서대문형무소 여자 감방을 찾아가 고문 중단을 요구하고 영자신문에 인권유린 실태를 게재한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캐다다로 돌아간 스코필드 박사는 해방 후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다시 돌아온다.

    이때 영구 귀국한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서거 후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기여한 공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진=주한 캐나다대사관)

     

    그의 비석에는 마지막 유언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세요.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너무나도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에 대해 문창극은 강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스코필드 박사라는 분이 선교사였는데, 일제 때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은 조선 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두 개를 주셨다고.
    아마 양반들이 옛날 청나라 사람처럼 손톱을 안 깍은 모양이에요, 우리나라 양반들이.
    하나님은 조선 민족에게 나라와 긴 손톱을 주시면서 너희들이 선택해라,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조선 민족은 애닳게도 나라를 선택하지 않고 긴 손톱을 선택했습니다"

    어디서 들은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고국 캐나다보다 조선을 더 사랑하고 독립운동을 도왔던 스코필드 박사가 이런 얘기를 할 리가 없다.

    평소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처신한 분이라 우연히 만난 고관대작 출신의 친일파에게 일갈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절대로 '조선 민족' 전체로 싸잡아서 얘기할 분이 아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거룩한 생애는 다 젖혀두고 근거 없는 얘기를 꺼낸 저의는 무엇일까?

    문창극이 강연 내내 되풀이해서 말한 '조선인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다'는 식민사관에 꿰맞추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덕분에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애정을 가졌던 비숍 여사, 퀴츨라프 선교사, 다블뤼 주교, 스코필드 박사는 식민사관의 부속물로 전락해버렸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