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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 함정에 빠진 양세봉 장군의 최후



책/학술

    日本軍 함정에 빠진 양세봉 장군의 최후

    [임기상의 역사산책 40]남북한 모두 떠받드는 남만주의 軍神 '양세봉 장군'

    남만주의 신빈현 왕청문에 세워진 항일명장 양세봉 장군의 조각상.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중국에서 조선인의 석상은 이례적이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 "사이토 총독이 압록강에 온다니 사살해버려라"

    사이토 마코토 총독. '문화통치'를 표방했다지만 임기 내내 독립군의 암살 표적이 되었다.

     

    1924년 5월 19일 낮 12시 30분 중국쪽 압록강변 마시탄.

    독립군 참의부의 소대장인 양세봉은 9명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강이 잘 보이는 고개에 도착했다.

    이들은 국경 순시를 한다고 경비선을 탄 사이토 총독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일본군도 응사를 했지만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경비선이 달아나자 독립군은 박수를 치면서 야유를 보냈다.

    이 소식은 만주의 동포 사회는 물론 상해임시정부에도 알려져 모두들 통쾌해했다.

    일본측 기록을 보면, "저격 흉한은 약 10명으로 모두가 마적으로 추정됨. 흉한들은 장총 또는 모젤 권총으로 약 40~50발을 발사했다. 우리 경비원들도 기총 28발, 모젤 권총 44발 등 모두 72발을 응사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와 일본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사이토 총독은 정부는 물론 일본 국회에서도 큰 질책을 받았다.

    ◈ 항일 명장 '양세봉 장군',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보고 항일투쟁에 나서다

    양 장군이 남긴 유일한 사진.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양 장군이 남긴 유일한 사진.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양세봉 장군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3.1운동 직후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천마산대에 가입해 경찰서와 금광사무소 등을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순국하는 날까지 손에서 총을 놓지 않았다.

    양세봉은 1924년 남만주로 넘어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한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6일 국경을 넘어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여 여러 명을 사살하고, 사흘 후 사이토 총독에게 총알을 날려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신출귀몰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양세봉은 독립군 안에서 최고의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 만주의 유일당 조선혁명당 결성되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하다

    흩어져 있던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은 1929년 12월 만주의 유일한 정당인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

    양세봉은 그 산하의 무력부대인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중국인 부대인 요녕농민자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200여 차례 교전을 벌였다.

    조선혁명군의 근거지였던 신빈현 영릉가 앞산인 연두산. 대원들은 낮에는 이 산에 숨어 있다가 야간에는 내려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연구재단 조사 결과,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1929년~1934년까지 5년간 벌인 전투는 80여 차례, 사살한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은 1,000명에 달했다.

    양세봉 장군 밑에서 참모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이가 나중에 광복군 지대장이 되는 김학규 장군이다.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의 후예인 광복군. 김구 주석(첫줄 왼쪽에서 8번째)의 왼쪽이 지청천, 그 왼쪽이 김학규 장군이다. (사진=사진작가 권태균 제공)

     

    김학규 장군은 양세봉 장군 순국 후에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무장세력인 광복군을 창설한다.

    ◈ 양세봉 장군, 좌익계열인 김일성 부대의 공동 투쟁 제안을 거절하다

    양세봉 장군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대해 싸운 철저한 반공 민족주의자였다.

    김학규 장군은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좌익들은 조선혁명당 당수인 현익철과 총사령관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인 나를 3대 반동 영수라고 불렀다"

    특이하게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양 장군 이야기가 나온다.

    공장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김일성 주석. 양세봉 장군을 존경했던 그는 양 장군 사후 그의 유가족들을 끝까지 도와주었다. (사진=만경대 혁명사적관 제공)

     

    공동반일투쟁을 제안하는 김일성에게 양 장군이 이렇게 조언하며 거절한다.

    "그건 다 좌익이 정치를 잘못한 탓이야. 투쟁을 과격하게 했기 때문에 인심을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삿군들을 폭군으로 만들고, 무슨 적색 5월이라 해서 지주들을 처단하고... 이러니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소가 닭 보듯이 하거든"

    김일성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양세봉 사령관과의 대화를 통해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가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래도 양 장군 순국 후 일부는 김학규 장군을 따라 광복군에 들어가고, 일부는 김일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한다.

    1933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 만주에서 활약하는 양세봉 장군의 동정은 조선 민중의 희망이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렇게 양 장군 밑에 좌와 우를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데는 그의 인품도 작용했다.

    양세봉 장군 휘하에서 소대장으로 싸웠던 계기화(2002년 82세로 작고)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부하에게 욕하는 일이 없었으며,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싸구려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

    ◈ 일본군의 함정에 빠져 순국...남한과 북한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되다

    양세봉 부대에게 번번이 깨지던 일본군은 그를 제거하려고 막대한 현상금도 걸고, 밀정들을 총동원해 작전을 벌였다.

    그러다 양 장군은 중국군 사령관이 만나자는데 같이 가자는 일본군 밀정의 꾀임에 빠졌다.

    1934년 8월 신빈현 왕청문에 있는 사령부를 나와 언덕을 올라가다 옥수수밭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순국했다.

    후에 부하들이 비밀리에 산 중턱에다 시신을 묻었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목을 잘라 통화현 시내에 내걸었다.

    해방 후 북한 정부는 양세봉 장군의 무덤을 평양 근교로 이장했다가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다시 안치했다.

    양세봉 장군의 묘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북한은 양 장군의 부인 임재순과 외아들 양의준을 평양으로 초청해 극진하게 예우했다.

    남한에서도 1974년 동작동 국립묘지에 양 장군의 묘지를 조성했다.

    유골은 모시지 못한 허묘이다.

    국내에 유족이 없어 다른 묘비와는 달리 '공훈판'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게 특징이다.

    양세봉 장군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릉을 조성한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양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독립운동 단체들과 역사학계는 반발했다.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을 들고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는 3등훈장(독립장)을 수여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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