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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3056·생존 276…日 야마토호의 최후



책/학술

    사망 3056·생존 276…日 야마토호의 최후

    [임기상의 역사산책 31]야마토호, 3천여 명의 수병과 함께 수장되다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호', 카미카제 공격에 나서다

    1945년 4월 6일 야마토호는 순양함 1척과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의 항구 도쿠가와를 출발했다.

    이들 9척의 배에 주어진 임무는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상륙작전을 벌이고 있는 미국 함대를 공격한 후 섬에 좌초해 미군에게 포를 쏘라는 지시였다.

    쉽게 얘기하면 일본 항공특공대처럼 카미카제 공격(자살공격)을 하라는 것이다.

    이 함대가 일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해상 전력이었다.

    항공 지원도 없고, 기름마저 못 돌아올 것을 예상해 편도 분량만 주입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거함 야마토호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이 배의 길이는 262m, 높이는 51m, 폭은 38.8m에 달했다.

    이 거대한 배를 움직이는 데는 무려 2,767명의 승무원이 필요했다.

    야마토호의 주무기는 460mm(18.1 인치) 함포 9문으로, 인류가 만든 함포 중 최대 구경이었다.

    대형 승용차 무게인 1.36톤짜리 포탄을 30초당 1발씩 쏘아댔고, 그 사거리는 42km에 달했다.

    배가 출항하기 전날 미래의 일본을 위해 사관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관들을 다른 배로 보냈다.

    최후의 만찬에서는 매점을 개방해 모두들 만취했다.

    하사관 이하 수병들 전원에게 국화의 문장이 새겨진 '온시노 다바코(일왕이 하사한 담배)'를 나눠 주었다.

    일본은 왜 이같은 자살공격을 시도했나?

    ◈ 붕괴되는 '대동아공영권'…본토 결전 앞두고 필사적인 발악

    태평양전선에서 계속 침몰당하는 일본의 함선. 손실을 보충할 건조 능력이 일본에는 없었다.

     

    무모하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잃어버린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후퇴의 길을 걷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부터 이 전쟁을 지는 전쟁으로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의 승산을 묻는 고노에 수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1년이나 1년 반 동안은 백중지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년이나 3년이 지나면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마저 1943년 4월 18일 전선 시찰 도중 미 공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 사망하자, 일본군 수뇌부에서 사태를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군 지도자를 찾을 수 없게 된다.

    1945년에 접어들자 일본은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 제도에 이어 본토의 일부인 이오지마 마저 잃게 된다.

    급기야는 일본 열도의 최남단인 오키나와에 연합군이 밀어닥친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 함정과 해병대. 군함 1,370척과 비행기 7,127기, 상륙부대 18만 명이 동원됐다.

     


    오키나와가 뚫리면 다음 상륙작전의 무대는 당연히 규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다.

    궁지에 몰린 일본 수뇌부가 궁리 끝에 내놓은 게 바로 '카미카제' 공격이다.

    필리핀 전투 때부터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제로식 전투기를 몰고 미국 항공모함에 자기 몸을 던졌다.

    어이없게 일본인들은 이런 육탄공세 전술이 기적처럼 전세를 역전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카미카제의 공격을 받고 있는 미국 항공모함. 강제 징병당한 조선 청년들 상당수가 반강제로 출전했다.

     


    여기에 일왕까지 가세했다.

    히로히토는 전황을 보고받을 때 "해군에는 더 이상 함정이 없는가? 해상부대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일왕의 말 한 마디가 새어 나가면 점차 증폭돼 거절할 수 없는 지시가 된다.

    결국 일본 해군은 마지 못해 자살 공격이라는 해상특공작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 일방적인 난타전…미군 함재기들, 파상적으로 야마토호 공격

     


    회색의 강철로 된 산더미 같은 야마토호는 9척의 경호원을 거느리고 오키나와를 향했다.

    이 군함들의 진군은 처음에는 암호 해독을 통해, 이어 잠수함을 통해, 해군 정찰기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오키나와 앞바다에 포진한 미 해군에 알려졌다.

    급보를 받은 스프루언스 해군 5함대 사령관은 휘하의 제58기동함대 밋쳐 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귀관이 해치우게~"

    항공모함들의 갑판이 부산해졌다.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등 갖가지 함재기들 386대가 차례 차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야마토호 공격에 중추적 역할을 한 미 해군 주력기 헬켓(HELLCAT)

     


    4월 7일 낮 12시 30분 미군 함재기들이 야마토 부대의 상공에 도착했다.

    맞서서 싸울 일본 비행기는 한 대도 없었다.

    한 쪽은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른 쪽은 죽을 준비를 하고 링에 올라갔다.

    10척의 배를 공격하기에는 하늘이 좁았다.

    결국 편대를 1진과 2진으로 나눠 10분 간격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야마토호는 오후 2시 20분까지 1시간 50분 동안 정신없이 대공포를 쏘아도 사방팔방에서 날라오는 폭탄과 기총소사, 어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배가 지그재그로 달려도 벌떼 공격이 파상적으로 이어졌다.

    폭탄 세례를 받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야마토호

     


    야마토호는 만신창이가 되어 불길과 연기를 토해내면서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좌우에 포진한 순양함과 구축함도 난타를 당하며 하나씩 침몰했다.

    오후 2시 23분 야마토호는 침수를 견디지 못하고 왼쪽으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불기둥과 함께 탁한 버섯 구름이 하늘 높이 솟아 오르면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 연기구름은 6,000m 상공까지 치솟았고, 250km나 떨어진 규슈 남단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 너무나 빠른 침몰, 너무나 늦은 퇴함 명령

    배가 물속으로 들어가기 10분 전, 야마토호의 아리가 함장은 총원퇴원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기관실에 있던 300명의 기관수병이 익사한 것을 시작으로 아래층 갑판에 있던 1,000여 명의 승무원들이 빠져 나오지 못했다.

    아리가 함장은 함교의 나침반대에 스스로 몸을 묶고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일부 젊은 사관들도 자기들 몸을 배 안의 고정물에 묶고 이른바 '옥쇄'를 했다.

    웃통을 벗은 어느 사관은 '만세~' 라고 외치며 미군기를 향해 군도를 휘둘렀다.

    구조정 승무원들은 배가 꽉 차자 자기 배를 살리기 위해 일본도로 뱃전에 매달리는 수병들의 손을 가차없이 내리쳤다.

    포로수용소의 일본군들. 이들은 포로가 되면 미군에게 군의 정보나 기밀을 비교적 잘 진술하는 편이었다.

     


    야마토호에서만 3,056명이 숨을 거두었다.

    생존자는 불과 276명이었다.

    미군 손실은 함재기 10대와 조종사 10명이었다.

    야마토호를 사지로 몰았던 연합함대 도요다 소에무 사령관과 구사카 참모장은 패전 후에도 옥쇄하지 않았다.

    도요다는 1957년까지, 구사카는 1971년까지 구차하게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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