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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침몰] 44년 전 남영호 참사 되풀이…"그동안 뭐 배웠나"



사건/사고

    [여객선 침몰] 44년 전 남영호 참사 되풀이…"그동안 뭐 배웠나"

    과적, 부실한 승객명단, 어이없는 대응 등…사고 후 대책발표 무용지물

    16일 오후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선수쪽 선저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모두 침몰한 가운데 구조대원들이 야간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윤성호 기자/자료사진)

     

    항해 부주의, 과적, 선박 전복에 이은 침몰, 승객명부에도 없는 승객, 부실한 초동대응…. 세월호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발생한 남영호 이야기다.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된 이 사고로 326명이 숨지고, 단 12명만 살아남았다.

    국가기록원은 남영호 사고에 대해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50분경에 전라남도 상일동 동남쪽 28마일 해상에서 선체가 갑자기 기울어져 전복돼 침몰했다"며 "사고원인은 과적, 항해부주의, 긴급신호를 발신 후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피해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남영호 침몰사고는 사고 전후 상황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세월호 침몰사고와 상당 부분 닮아있다. 여객선 안전과 사고대응 수준이 4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때마다 대책이 나왔지만, 대책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 화물점검, 승객명단…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안 돼

    남영호 침몰사고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항해부주의와 적재정량의 2배에 달하는 과적이었다. 감귤 성수기를 맞아 갑판까지 감귤 등 화물을 싣는 바람에 남영호는 출항할 때부터 좌현이 10도 가량 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항해하던 선박이 무게중심을 잃고 기울면서 화물이 한쪽으로 쏠렸고, 배는 급격히 전복, 침몰했다.

    세월호의 경우도 여러 가지 원인이 추정되고 있지만, 급격한 변침으로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배가 기울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차량 150대를 적재할 수 있는 배에 180대가 실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는 수십톤 짜리 탱크를 실은 50톤 이상의 대형 트레일러도 3대나 실려 있었다. 화물도 해운조합에 신고한 657톤보다 500톤 더 많은 1,157톤을 적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남영호 침몰 사고 이후로 1973년 여객선운항관리제도가 도입돼 한국해운조합에서 선박의 화물적재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의 실제 화물적재량과 해운조합에 보고한 기록은 서로 달랐다. 형식적인 점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해경이 지난 17일 새벽 0시 30분에 공개한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자 명단 일부. 구조자 179명 가운데 5쌍, 10명이 동명이인으로 나타났다. (자료=해양경찰청)

     

    선박에 탑승한 승객들의 정확한 명단이 없는 점도 40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남영호는 서귀포취급소 승선자 명부에는 승객 수가 274명으로 등재되었지만 나중에 338명으로 최종 확인됐고, 64명은 승객 명부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번 세월호의 경우에도 승선자 명단에도 없는 사망자가 나오는 등 승객 신원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출항을 서두르다 승선원 신고 때 승객 전원에게 주민번호와 연락처 등을 받지 않은 정황도 드러났다.

    때문에 정부는 명확하지 않은 승선자 명단을 토대로 구조와 실종, 사망을 분류했다가 수차례 이를 정정하는 소동을 빚었다. 앞서 CBS노컷뉴스는 17일, 무임승차 운전자 등을 감안하면 세월호 실종자 수가 정부 발표보다 30명 가량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1993년 10월 10일 정원 초과 탑승으로 292명의 사망자를 냈던 서해훼리호 참사 이후, 여객선 승객은 승선권을 구입할 때 이름과 주민번호, 연락처 등의 정보를 반드시 기입하도록 규정이 강화됐다. 하지만 이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인양되는 남영호 침몰 사고 사망자 시신. (서귀포향토문화백과 캡처)

     

    ◈ 어이없는 사고대응도 닮은 꼴

    사고 이후 초동대응이 어이없을 정도로 부실했던 점도 비슷하다. 과거 남영호 침몰 사고 때는 해경이 어선사고로 오인해 구조선 급파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사고발생 12시간이 거의 지난 오후 1시쯤에야 선박이 출동했다. 앞서 일본 어선이 일부 승객을 구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구조를 기다리다 영하의 바다에서 동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이없기는 세월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선박에 남아 승객의 피선을 유도해야할 선장이 가장 먼저 배를 버리고 피신해 사고를 키웠다. 중앙재해대책본부와 해양경찰도 구조상황을 놓고 오락가락했다. 정부는 처음에 368명이 구조가 됐다며 마치 구조상황이 순조로운 것처럼 발표했지만, 낙관적 판단으로 구조상황만 더욱 악화시켰다. 실종자가 구조자로 표시되는 등 혼선도 잇따랐다.

    갈수록 대형화 되고 있는 국내 연안여객선에 대한 안전 준수의무가 국제선에 비해 소홀한 점도 문제다. '해상안전에 대한 국제협약'은 국제선을 운항하는 3,000톤 이상의 크루즈선과 페리는 선박의 모든 통신과 항적변화를 기록하는 일종의 해상 블랙박스를 비치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는 6,000톤이 넘는 대형 여객선임에도 불구하고 블랙박스가 없다. 국내 여객선은 협약 준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확한 사고원인 파악은 세월호가 뭍 위로 올라온 후에야 가능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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