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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살 늦깎이 사법연수원생 조원룡의 파란만장 인생



인물

    47살 늦깎이 사법연수원생 조원룡의 파란만장 인생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조원룡

     

    ''''꿈은 이루어 진다!''''''''하면 된다!''''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따른다!'''' 이 모든 말들이 다~ 사법연수원생 조원룡 씨에게 해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었던 형 덕택(?)에 한국 해양대학교를 자퇴하고포장마차, 학습지 방문판매원, 음료수 배달원, 나이트클럽 종업원 등 험한 일을 전전했다. 거친 삶이었던 만큼 탈선 가능성도 높았지만, 그를 지켜준 건 공부에 대한 열망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한 형의 명의를 빌려 학원 강사로 뛰면서 진짜 서울대생이 되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고 마침내 1999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여세를 몰아 공부에 맺힌 한을 풀 듯 사법시험을 준비했고다섯 번째 도전 만에, 당당히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젊은 시절 겪은 어려움을 잊지 않는, 따뜻한 마음의 변호사''''가 되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지닌 조원룡 사법연수원생을5월 2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다섯 고개 끝에 부르는 파랑새의 노래

    ▶ 합격을 축하합니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지난 3월 2일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했고 앞으로 2년간 연수를 받아야 합니다.

    ▶ 앞으로의 긴 여정이 남아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합격의 감격이 워낙 커서 아직까지 힘든 것은 잘 모르겠는데 함께 입소한 동기들과 사법연수원장님의 훈화를 들으면서 너무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새로운 의욕이 솟아요.

    ▶ 다섯 번 시험을 치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연수원생 중에 제일 많이 시험을 치른 분은 몇 번이나 치셨다고 하던가요?

    정확하지는 않은데 2차 시험을 10번 넘게 친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찍 붙은 분들은 두 번 만에도 붙고 다섯 번 정도면 중간 정도인 것 같아요.

    ▶ 나이로는 몇 번 째세요?

    올해 입소동기생 중에 38기 자치회장을 하시는 분이 저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습니다.

    ▶ 3차에서 떨어진 사람도 있나요?

    많지요. 1,2차는 필기고, 3차는 구슬면접인데 이를 통해서 법조인의 품성과 기본소양을 평가합니다. 아마도 말로 할 수 있는 자질을 평가해서 걸러내는 모양인데 그래도 3차에서 떨어지면 내년에 1,2차 시험은 면제입니다.

    ▶ 1,2,3,차... 어떠셨어요?

    1차 시험을 다섯 번 만에 붙었는데 자녀도 있고 해서 이번에 1차 떨어지면 그만 한다 생각했어요. 미련이 남아서 포기를 못 하면 안 되니까 주변의 지인들에게 부탁까지 했는데 다행히 붙었죠. 1차에 한번 붙으면 2차 두 번의 기회를 줘요. 후회 없이 공부하기 위해서 마지막 7개월은 신림동을 떠나지 않고 했어요. 3차도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확률이 낮으니까 2차 발표의 떨림보다는 덜했죠.

    ◇ 6년간 갈고 닦은 고시촌 붙박이 생활

    ▶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고 합격의 영광을 안았는데 혹시, 수험번호를 기억하십니까?

    11137088. 수험번호가 좋아서 기억합니다.

    ▶ 제일 먼저 합격소식을 누구에게 전하셨어요?

    37기 선배인 연수생 동생에게 연락이 와서 합격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제일 먼저 아내에게 연락을 했죠. 목이 메어서 울더라고요.

    ▶ 결혼은 언제 하신 건가요?

    92년에 해서 15년 됐어요. 딸이 중학교 2학년이고,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집에 잘 안 가고 공부만 하니까 구박을 많이 받았는데 합격하고 나니 집안분위기가 좋아졌어요. 한번은 딸에게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가 아빠는 십 년을 공부하면서 합격 못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당한 적도 있거든요.

    ▶ 이제는 그런 소리 절대 못하겠네요?

    시험에 붙고 나니 알아서 안하더라고요. (웃음)

    ▶ 말이 십 년이지 십 년이면 강산이 한번 바뀌는데 그동안 어떻게 공부를 하셨어요?

    사실 십 년은 아닌데 딸아이가 과장을 해서 이야기한 거고 5,6년 정도 했어요. 2004년까지는 학교 근방에서 공부하다가 고학년이 되니까 후배 눈치가 보여서 도서관에 못 있겠더라구요?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죠.

    ▶ 집에는 자주 가셨나요?

    주말에 가서 월요일에 오고는 하는데 2차 시험 준비부터는 집에 안 갔죠. 7개월 중에 아내가 4번 정도 찾아왔어요.

    ◇ 집중력은 체력과 비례, 학습능력은 시간으로 확보

    ▶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서로 정보교환도 합니까?

    혼자서 공부하기가 힘들어 서로 교류도 하고 의지도 하지만 시험이 다가오면 서로 각자 공부를 하는 분위기예요.

    ▶ 하루 평균 몇 시간을 공부하셨나요?

    잠은 6시간 자고, 식사시간과 휴식시간 3시간, 운동 등 1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대략 14시간을 공부했어요.

    ▶ 공부는 때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나이가 들면 두세 번 반복해야 하잖아요.

    집중력은 체력과 비례하는 것 같아요. 저는 젊은 친구들보다는 학습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더 많은 시간을 열심히 공부해야지 젊은 친구들하고 똑같이 공부해서는 합격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더 많은 시간확보를 위해 노력을 했죠.

    ▶ 어린 시절부터 꿈이 법조인이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법대 쪽이 아니고 사회계열이었어요. 그 당시 기록을 보니 정치외교학과를 가고 싶다고 적혀있더라고요. 그러다 해양대를 가고 진로가 굴절되다 보니 그쪽으로는 못 갔고 법대에 입학해서는 정치학과를 복수전공 했습니다.

    ▶ 앞으로 그쪽으로도 관심이 있으세요?

    관심은 분명히 있지만 괜히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나와서 혼탁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지향하는 바는 있지만 제가 뜻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 고향이 어디세요?

    경북 영덕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고향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지요.

    ◇ 프락치 사건 연루로 차단된 학업과 가족의 경제활동

    ▶ 왜 해양대를 지원하셨나요?

    제가 4남 2녀의 막내인데 갈수록 집안형편이 점점 나빠졌어요.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는데 넉넉지는 않아도 교육열은 높으셨구요, 저는 81년도에 서울대를 쳤지만 떨어졌어요. 재수를 했지만 과외도 없어지고 도저히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닐 형편이 안 되었죠. 등록금 부담과 가정형편 때문에 국립대인 해양대에 가게 되었어요. 등록금이 국립대학교 사범대학 수준이었고 기숙사 비용 등이 면제에요.

    ▶ 그런데 왜 자퇴를 하셨나요?

    제가 84년에 4학년까지 올라갔는데 84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바로 위의 형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4학년 재학 중에 ''''외부인 감금 폭행사건'''' 학생 입장에서는 ''''학원 프락치사건''''이라고 하는 사건에 연루되었어요. 그때 형은 보직은 없었지만 행동책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해양대는 사관학교 비슷한 체제여서 일반대학과는 분위기가 다른 상황이었어요. 자발적으로 자퇴서를 쓴 것은 맞는데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었죠. 자퇴를 강요당한거죠. 저희 누나는 그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부산시 교육위원회 교육감에게 몇 번 불려 다니다가 결국 사표를 내야 했거든요. 경제적으로 봉쇄를 했다고 봐야죠.

    ◇ 외판원에서 나이트클럽 영업부장까지, 파란만장 청춘일기

    ▶ 길게 보면 인생을 바꾼 거지만 형 때문에 가족이 많은 피해를 입었네요. 학교를 그만두고는 뭘 하셨으며 형님은 어떻게 되셨는지요?

    유시민, 백태웅, 이정우 씨 등은 바로 구속이 되고 형은 도망을 가서 수배자가 되었는데 85년 크리스마스에 잡히셨어요. 누님은 영원히 교사생활을 못하게 됐고 저는 자퇴를 당한 뒤 학적변동자로 3개월 만에 군대에 갔어요. 그 당시 대학생은 군대가 연기됐지만 휴학을 하거나 자퇴를 당하면 학적변동자로 바로 징집이 됐거든요. 제대 후에는 생계가 막연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모든 문제를 제가 해결해야 해서 먹고 사는 문제에 몰두를 해야 했어요.

    사회경험이 없지만 노량진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공부만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에 포장마차를 차렸는데 여름에 50대 되시는 분이 까만 단화를 신고 와서 막걸리를 찾으면서 방해를 하시더라고요.형이 87년 6.29 이후에 특사로 대전교도소에 출소를 해서 그 당시 대우노동자 이석규 열사사건부터 해서 87년이 격동기라서 이리저리 구속노동자협회다 해서 만들고 다니니까 수배 중이었고, 군대 가서 형 때문에 학교를 자퇴 당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피해의식인지는 몰라도 자꾸 누군가 방해를 하는 것 같으니까 그만두게 되었죠, 그 뒤 노벨문화사라는 곳에서 책 외판을 했는데 어렵더라고요. 한 달도 못하고 그만두고, 학습지도 서너 달하고 그만두었어요.

    사실 학력이 있어도 취직이 어려운데 해양대도 졸업을 못한 상태라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우니까 이리저리 전전한 거죠. 대구에 내려가서 생활쓰레기로 재활용품을 만드는 공장생활을 했는데 몸으로 노동하는 것은 견딜만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서울에 올라와 음료수 외판원을 하다가 나이트클럽 종업원을 강남에서 8개월 정도 해봤어요.

    ▶ 나이트클럽은 어떻게 들어가셨어요?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되어서 고향 선배가 소개해주었고 그곳에서 해군중사로 계셨던 분이 저를 잘 봐서 본인이 옮겨가는 업소에 영업부장으로 저를 스카우트를 해주었어요.

    ▶ 형에 대한 원망이 컸겠어요?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형이 일부러 가족이나 저를 힘들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판다하고 소신껏 한 일이잖아요. 또, 원망을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고요. 전적인 지지자는 못 돼도 크게 원망하거나 그러지는 않는 것 같아요.

    조원룡

     


    ▶ 형님이 감옥에 계시고 그럴 때도 다 어려우니까 형님을 보살필 여력은 없었겠어요?

    형제들은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빴고 어머님이 옥바라지를 좀 하셨죠. 오히려 형의 동료들이 십시일반 힘이 되어 주었던 것 같아요.

    ▶ 외판원에 나이트클럽 종업원을 하면서 학교 친구들을 만난다든가 해서 속상하거나 그런 일은 없으셨어요?

    왜 없었겠어요.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 제 성격 자체가 어려울수록, 위기를 당하면 당할수록 속상한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 이를 악무는 타입이라서 오래 고민하고 그것에 집착해서 좌절하거나 그러지는 않는 것 같아요.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면 못 헤어나잖아요.

    ▶ 유혹도 많고 나쁜 친구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견뎠나요?

    나이트클럽 같은 경우는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면 계속 그 일을 했다면 제가 경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바지 사장 정도는 하지 않았겠나 싶어요. 그 당시 서른 즈음에 드는 생각이 나중에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을 텐데 아빠직업이 뭐냐고 했을 때 저야 먹고살려고 했지만 자녀들에게 별로 떳떳하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한시라도 빨리 공부를 해서 평생 직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죠.

    ▶ 그런데 학원 강사는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나이트클럽에 다니면서 해양대에 같이 다니던 친구의 결혼식을 갔더니 학원 강사를 하는 한 친구가 수입도 좋고 근무여건도 다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달 동안 30, 40군데 이력서를 넣었는데 제 이력서로는 시간강사 자리도 안 주더라고요. 궁여지책으로 형이 서울대 졸업장도 있는데 형의 이력으로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 당시 형이 직장에 다닌 것이 아니라 계속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형의 이름으로 강사생활을 하게 된 거죠.

    ▶ 일종의 위장취업을 하시게 된 거예요.

    위장취업은 정당성이라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저는 그냥 오로지 먹고살려고 그랬으니 많이 부끄럽죠.

    ◇ 형의 서울대 졸업장과 자기노력이 일군 인기강사자리

    ▶ 어떤 과목을 강의하셨어요?

    수학강사를 했어요. 영어는 경상도 출신이라 발음이 잘 안 되고 국어는 제대로 전공한 사람이 해야 될 것 같더라고요. 국/영/수 세 과목 중의 하나를 해야 호구지책이 될 것 같은데 수학은 상대적으로 가장 자신이 있어서 수학을 가르쳤죠.

    ▶ 인기강사셨어요?

    인기강사라기보다 생활의 모든 기반을 학원 강사를 하면서 잡았어요. 열심히 했죠.

    ▶ 부인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형의 친구 분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제가 근무하던 학원에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어요. 그분의 반 지하 집에 얹혀살면서 형수님이 후배를 소개해주셔서 결혼을 했지요. 결혼하고 나서 바로 강남 개포동에 집을 사고 자리를 잡았어요.

    ▶ 강사로서 자리도 잡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셨는데 학교는 왜 늦깎이로 들어가시게 되었나요?

    해양대를 잘렸으니까 대학에 대한 욕구도 있었고 형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에 대한 자책도 있었어요. 더구나 먹고살 만하니 더 양심에 걸리더라고요. 그러다 중매해준 형이 94년에 서울법대 4학년으로 재입학을 하고 사법시험에 바로 합격을 하더라고요. 저도 자극을 받아서 낮에는 국기원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들 가르치면서 제대로 공부해보자 해서 서울대에 들어갔지요.

    ▶ 서울대가 들어가고 싶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닌데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수학강사를 했으니 수학은 수월했고 영어 듣기에 적응하는 데 1년 걸렸어요. 그리고 언어와 문학을 정복하느라고 수능을 3번 보고 합격해서 제 나이 서른아홉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을 했지요.

    ▶ 동기생들이 뭐라고 부르던가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아저씨라고 부르려고 하는 것을 제가 형, 형님, 오빠라 부르라고 부탁을 했어요. (웃음)

    ◇ 서울대 졸업장과 사법고시를 향한 주경야독과 긴축재정

    ▶ 부인은 반응이 어떠셨어요?

    결혼 전부터 반사회적인 행동이 아니면 제가 뜻을 가졌을 때 밀어주고 후원해주기로 미리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전혀 반대는 없었고 오히려 제 이름을 찾을 기회라고 격려를 해주었어요.

    ▶ 입학 후에는 가정경제를 어떻게 꾸려나가셨어요?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있었고 학원 강사는 안 했지만 2학년 2학기까지 과외를 했어요. 그리고 3학년 올라가면서는 본격적으로 공부만 했지요. 2001년부터 2006년 6년 동안 긴축재정으로 버티며 살았지요.

    ▶ 부인은 아무것도 안 하셨나요?

    제가 서울 법대에 입학하고 집사람이 2년 동안 식당을 했어요. 그런데 사랑방 비슷해져서 오히려 적자가 나고 3,4천만 원을 까먹었어요. 제가 학교 다니며 학우들과 많이 들렸고 영업력을 발휘 못 할 상황으로 운영이 되었죠.

    ▶ 2005년에 2차 시험을 앞두고 큰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들었어요.

    고향 친구에게 전 재산에 가까운 1억 8,500만 원 정도를 빌려줬는데 부도내고 잠적해서 아직까지 안 나타나고 있어요. 예전에 그 친구가 유통업을 했는데 물품대금이 부족하다고 이자를 후하게 쳐준다고 공부하니까 생활비에 보태라고 해서 빌려주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어려워서 돈을 돌려막는 상황이었더라고요.

    ▶ 부인이 많이 속상했겠어요.

    많이 맘 상해했는데 지금은 이해를 해줍니다.

    ▶ 생활에 지장 클 텐데 앞으로 2년을 어떻게 생활하실 건가요?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고 버텨야죠. (웃음)

    ◇ 형님도 아우 따라 늦깎이의 길로 입문

    ▶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요?

    네, 어머님이 84세, 아버님이 85세 십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셔서 정말 감사하죠.

    ▶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말년에 큰 효도를 하셨네요. (웃음) 동네에 플래카드도 걸리고 그랬나요?

    제가 있던 신림동 고시촌에 몇 년째 합격생이 안 나오다가 이번에 저를 포함한 두 명이 그 고시원에서 합격을 해서 플래카드를 붙인 것 같고 제 고향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이 플래카드를 붙였다고 하는데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그리고 제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도 집사람에게 걸어주겠다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걸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고향에서 잔치는 하셨나요? 돼지도 잡고...

    아직 못했는데 나중에 해야지요.

    ▶ 바로 위의 그 형님은 지금 뭘 하세요?

    법무사 1차 합격해서 2차 준비하고 있어요.

    ▶ 형님도 늦깎이시네요? (웃음)

    공부는 오히려 저에게 영향을 받으신 것 같아요. (웃음)

    ▶ 형님이 동생의 합격 소식에 뭐라고 하셨나요?

    같이 기뻐해 주는 거죠. 우리 형제들이 표현에 과묵해요. (웃음)

    ▶ 누님은 결혼해서 사시고요?

    누님은 지금 조카들이 다 대학생이 되었죠.

    ◇ 현재는 신이 주신 나의 선물

    ▶ 연수 후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변호사를 개업할 계획이에요. 판검사를 희망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너무 늦은 나이에 판사나 검사 조직에 들어가면 조직에 누가될 가능성도 크고 해서요.실무를 배워서 개업을 할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독자적으로 개업을 해서 활동하는 변호사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 2년 연수중에 잘못되는 경우도 있나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학년을 올려주지 않습니다. 작년에 저희 윗기수인 37기에서 7명이 유급을 당했어요. 유급을 연거푸 두 번 당하면 면직을 당하는데 그러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죠.

    ▶ 여성이 많이 합격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몇 명이나 사법연수생이 되었나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5-40% 정도로 천 명 중의 350명에서 370명 정도가 여학생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남은 연수과정을 열심히 수료하고 싶고, 사법연수원 원장님의 입소식 때 하신 훈시 말씀 중에 ''''현재는 선물이다. (The present is a present)'''' 라는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연수원에 입소한 자체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현재를 아주 충실하고 열심히 살아서 앞으로 능력 있는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돕고 싶습니다. 국선변호를 오래는 못하더라도 어려운 형사사건에 피고인 같은 경우 무료변론이라도 해주고 싶은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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