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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 모택동을 지도자로 세운 것 후회했다"



국제일반

    "주은래, 모택동을 지도자로 세운 것 후회했다"

    30여년 논란 속 주은래 병상 일기 최근 공개

     

    마오쩌뚱(毛澤東)의 평생 동지로 알려졌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임종 직전 마오쩌뚱을 지도자로 세운 것을 후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마오쩌뚱은 저우언라이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했으며 그가 사망 전 중병으로 입원해있는 1년동안 문병조차도 거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저우언라이를 경계했던 마오쩌뚱은 그가 사망한 뒤 추도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가 저우언라이의 병상에서 그의 말을 기록했던 일기가 공개되면서 알려지게 됐다. 특히 이 일기에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뚱의 계급투쟁 노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국가를 재난에 빠뜨렸다. 이것이 사회주의인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덩잉차오의 일기는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뒤 그녀가 줄곧 보관하고 있다가 1992년 7월 그녀가 사망한 뒤 공산당 중앙정치국 산하기관에 보관해 왔지만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었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해 1월 8일 주은래 서거 3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와 중앙이론연구실 중앙당사연구실 공동으로 주은래 사상연구토론회를 열어 덩잉차오의 일기를 공개했다.

    이 일기를 통해 저우언라이가 죽기 전 등소평 예졘잉과 나눈 대화가 공개됐지만 중국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다가 최근 일부 인터넷 논단을 통해 공개됐다. 지난 달 31일 중국재정정보통신망이 웹사이트에 일기의 일부와 마오쩌뚱 주석이 병상에 누워있던 저우언라이에 대한 문병을 거부한 내용를 공개한 것이다.

    다음은 마오쩌뚱 주석이 저우언라이에 대한 문병을 거부했던 것에 대한 내용이다. 저우언라이는 1975년 1월 24일 병세가 악화돼 입원했고 이듬해인 1976년 1월 8일 사망했다. 그가 병원에 있는 1년 동안 의료진은 1975년 5월 7일과 7월 11일, 9월 25일, 11월 12일 그리고 사망 직전인 1976년 1월 5일 모두 5차례 병세가 악화됐다는 통지를 당중앙에 보냈다.

    5월 3일 : 마오가 주재한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예졘잉(葉劍英)과 천시롄(陳錫聯)은 "주석이 한번 문병을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으나 마오는 일언지하에 "나는 의사가 아니다"라며 거절.
    9월28일 : 주은래가 위독하다는 3차 통지 직후 다시 예졘잉과 리더셩(李德生) 주더(朱德) 리셴녠(李先念) 등 7명의 정치국원이 공동 명의로 "주석이 50년 전우을 문병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건의서를 제출. 이에 대해 마오는 조카인 마오위엔신(毛遠新)를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강요하는 것을 원치않는다"며 저우언라이에 대한 문병을 거절.
    1976년 1월 12일 : 저우가 사망한 나흘 뒤 정치국은 "주석이 직접 추도식에 참석할 것인지, 덩샤오핑에게 추도사를 시킬 것인지" 마오의 견해를 물음. 이에 대해 마오는 구두 지시를 통해 "강요하지 말라. 덩이 추도사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답변. 당시 마오가 평생동지인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알려졌지만 마오의 의료 담당자들은 "추도식 참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나중에 밝힘.


    다음은 덩잉차오가 병상에서 저우언라이의 말을 기록한 일기 내용의 일부다.

    1975년 5월 10일:"잉차오, 나는 왜 투쟁은 끝이 없이 하는가, 마르크스 철학은 투쟁철학인가, 누구와 투쟁하는가, 어째서 오늘 이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75년 9월 12일 : "나는 곧 죽게 된다. 내가 떠난 뒤 첫째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고, 둘째 중난하이(中南海, 국가지도자들이 사무를 보고 거주하는 곳. 우리의 청와대에 비교되지만 보다 폭넓은 의미)에 머물지 말고, 세째 베이징에 남지 말고 고향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라. 반드시 새겨두어라, 그래야 내가 편하게 떠날 수 있다."
    1975년 10월 3일 : "나는 항상 내가 걸었던 길을 되돌아본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믿고 공산주의는 인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건국 26년이 됐는데도 정치투쟁은 끝이 없다. 이렇게 나간다면 국가를 재난의 경지에 빠지게 할 것이다. 이것도 사회주의 사회라 할 수 있는가? 이것도 인민이 주인되는 사회라 할 수 있는가? 나의 일생 아직 서생의 티를 벗지 못했다 실망을 안고 돌아간다."


    저우언라이는 모택동을 지도자로 올린 사실도 후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록을 발췌한 것이다.

    1975년 11월 17일 : "1944년 5월 21일 6기7중전회 1차 회의에서 주더 류샤오치(劉少奇), 렌비스(任弼時) 저우언라이 4명으로 주석단 회의를 구성해 최다 득표자를 주석으로 올리기로 했었다. 결과는 류샤오치가 1위 주더가 2위였고 마오는 4위에 그쳤다. 그러나 나는 내부회의에서 주석은 그래도 마오가 맡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당시 주더는 반발했다. 나는 다시한번 내 의지와는 다른 정치적 과오를 범했다."

    1975년 11월 19일 : "1962년 1월 중공중앙이 소집한 확대공작회의(일명 7천인 회의)가 열렸다. 당시 사람으로 인한 잘못이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이 실사구시와 군중노선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에서 많은 동지들은 주석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2월 10일 정치국상임위에서 마오 주석은 "회의의 결정에 따라 주석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주더 천윈(陳雲) 덩샤오핑은 주석직 사퇴에 찬성한다고 했다. 나는 주석은 2선으로 물러나더라도 주석은 주석이다 라고 밝혔다."

    1975년 11월 22일 : "1956년 9월 29일 중공 8기 전원회의 후 1차 정치국회의는 두 가지 결의를 통과시켰다. 당의 주석은 한 차례만 연임한다. 지도자의 권력을 제한하고 당내 민주집중제를 실현한다. 당시 17명의 정치국 위원 가운데 15명이 찬성하고 2명이 기권했다. 기권한 사람은 마오와 림뱌오(林彪)였다. 이 결의는 폐지됐다. 이것도 우리들의 잘못이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1975년 12월 3일 : " 한차례의 정치 폭풍우가 오고 있다. 아직도 투쟁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투쟁해야 그만 둘 것인가? 공산당 철학은 투쟁철학이라는 말인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도 투쟁을 통해야만 건설되는가?"

    1975년 12월 28일 : "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아직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이 실패의 한 장이다."

    1976년 1월 1일 : "(문혁파는) 입을 다물고 있어라. 지금 국내외에 적에 둘러싸여 국가가 경제위기에 처해있다. 누가 사회 흐름을 주도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민, 깨어난 인민이다."

    1976년 1월 2일 : "나의 유해를 남기지 말고 묘를 세우지 말고 (잉차오는) 중난하이에서 멀리 떠나라."


    한편 건국 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뚱은 국가건설 노선에서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마오는 계급투쟁을 통해 나라를 세울 것을 주장했고 정치투쟁으로 모든 것을 이끌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비교적 현실적으로 민생문제를 중시하고 경제 건설을 기본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국가의 현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4대 현대화 노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오는 그의 노선을 우파로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치자 4대 현대화는 금기시됐고 생산력 제일주의로 비판받았다. 마오와 저우간 권력투쟁은 항상 마오가 저우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압박하는 관계였지만 사후 두사람의 관계는 역전됐다. 마의 계급투쟁 노선은 청산됐고 저우의 현대화 노선이 실현됐다.

    ▲ 덩잉차오 일기 공개를 둘러싼 논쟁 일지

    1976년 10월
    : 덩잉차오는 중앙정치국에 대해 자신의 일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질의. 이에 대해 예졘잉은 정치국 상임위를 대표해 "현재 일이 너무 많고 복잡하니 일단 잘 보관하고 있으라"며 공개하지 말 것을 요구.

    1981년 7월2일 :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 직후 덩잉차오가 다시 이 문제를 제기.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이었던 후야오방은 정치국 상임위를 대표해 "상임위와 일부 정치국위원이 모두 봤는데 아직은 보관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당내 단결과 당의 이미지 모주석의 공과문제(공은 7, 과오는 3이라는 평가원칙) 등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결정.

    1992년 7월 : 덩잉차오 사망 후 일기는 중앙정치국 산하기관에 보관.

    2004년 3월 : 중국공산당은 덩잉차오 일기를 검토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당사에 반영하고 정치적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결정.

    2006년 1월 8일 : 주은래 서거 3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와 중앙이론연구실 중앙당사연구실이 주최한 ''주은래 사상연구토론회''에서 덩잉차오의 일기를 처음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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