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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권력은 ''땅''으로부터



사회 일반

    고려시대의 권력은 ''땅''으로부터

    [역사투데이]

    그림

     

    918년 왕건이 개창한 중세 고려의 토지제도는 서양의 중세와는 다르다.

    서양의 토지 농장은 비교적 특정 지역에 집중 분포되는 데 반해 고려의 농장은 전국적으로 분포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고려의 지주·전호제가 많은 농장을 운영하는 데 유리했다고 보여 진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科田)을 받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功蔭田)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독점한다.

    당시의 지배층은 호사를 마음대로 할 정도였고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측근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고려 말기의 상황을 "임금들이 덕을 잃고 토지와 호구 문건이 명확지 못하여 양민은 세력 있는 자들에게 소속되고, 그 토지들은 개인들의 땅으로 되었으며, 권세 있고 유력한 자들의 토지는 이랑을 잇대어 있고, 그 경계는 산과 강을 가지고 표지하고 있었으며, 경작자들에 대한 조의 징수는 1년에 두 번 혹은 세 번이나 중첩되는 일까지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종(역대의 왕)이 제정한 법제는 모조리 파괴되고 나라도 이에 따라 망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지배층의 토지소유가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천하에 미쳤으니 이는 곧 고려가 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 투기의 광풍은 변함이 없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와 같이 고려는 전시과라는 토지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일시적으로 관리의 생계를 위하여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봉책으로는 관료들에 의한 권력형 토지의 독점적 폐단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어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됐다.

    더욱이 고려 말에는 몽골의 내정간섭과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왜구의 침략이 빈번한 때라 군비 지출도 적잖을 터인데 이를 국고에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왕실·사원·귀족들은 하나같이 고리대를 통한 식리(殖利)활동에 골몰할 때이기도 하다.

    원곡보다 비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상당수의 농민들은 부채 노비로 전락되어 갔으니 오늘날의 신용 불량자 혹은 파산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의 침입 3회, 여진의 침략 2회, 몽골과의 29년간 전쟁, 홍건적의 2회 침략, 왜구의 침략은 그 횟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역사요,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역사이다.

    그 때마다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 방어에 총동원되어 싸웠거늘, 이 나라의 지배층은 그러한 민초들을 돌보지 못하였으니 실로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던 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노량진 이그잼고시학원 한국사 김유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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