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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쪽같이 사라진 팔光…" 만화 ''타짜''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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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

    "감쪽같이 사라진 팔光…" 만화 ''타짜'' 이렇게 탄생했다

    • 2006-10-1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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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허영만의 만화인생 32년

    타짜
    전남 여수의 소년 허영만은 초등학교 때 처음 본 코주부 삼국지를 보며 만화에 빠져들었다. 한때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화가게 발길도 끊고 영화소년이 되기도 했지만, 만화는 그의 소년 시절의 노스탤지어일 뿐 아니라 인생 자체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 사랑받고 있는 허영만. 역사를 다룬 만화도, 샐러리맨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도, 도박사나 음식 이야기도 허영만의 손에서 그려지면 뭔가 다르다. 허영만이라는 이름은 작품성과 흥행성을 보증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놀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는 사람이 12시간 넘게 책상머리에 붙어있는 만화가로 사는 사연. 데뷔 32년째를 맞는 만화가 허영만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허영만


    - 1947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셨는데요. 당시 여수는 어떤 곳이었나요?

    수산업도 발달했지만 밀수가 성행했어요. 밀수품이란 게 옷감이나 일제 2단 우산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죠. 어부들이 생선 수출하러 갔다 오면서 그런 걸 사오는 거예요. 어릴 땐 밀수품 운반책을 해서 용돈도 벌었어요. 책가방에 물건 몇 개 넣고 배달을 했던 거죠. 저는 그 와중에 일제 크레파스나 물감을 얻어 쓰곤 했고요.

    - 선생님 집안은 어떤 일을 했었나요?

    아버지가 교육청에서 공무원을 하시다가 나중엔 사업을 하셨어요.

    - 여수 고향집의 풍경은 어땠나요?

    아주 좁은 골목에서 살았어요. 얼마 전에 가보니까 제 어깨의 하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이더라고요. 앞집 무화과나무가 우리 집으로 넘어오면 그거 따먹기도 했고요.

    - ''여수 반란사건''과 가족사가 연관이 있으시다고요?

    제가 아주 어릴 때였는데요. 저희 아버지는 경찰이셨고, 삼촌 한 분은 빨갱이었어요. 그래서 저희 집은 낮에는 경찰이라고 보호되고, 밤에는 그쪽 편이라고 보호가 됐어요. 교묘하게 양다리를 걸쳤던 거죠.(웃음) 그러다가 반란사건은 났는데 아버지로부터 소식이 없으니까 어머니가 저를 업고 기찻길을 따라 100리를 걸어서 여수로 내려가셨어요. 근데 저쪽에서 겉저고리를 풀어헤친 채 낫을 들고 오는 사람이 있더래요. 옷에 피가 튀어있었고요. 그 사람이 아버지가 잡아가둔 빨갱이었대요. 그러니까 여차하면 어머니와 저는 그 자리에서 낫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근데 다행히 어머니가 얼굴 돌리고 딴청 하는 사이에 지나가서 무사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는 극과 극의 대립상황이었고, 또 우리는 경찰 쪽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의 일차 제거대상이었죠.

    - 처음 만화를 읽은 기억은?

    제가 집에서 셋째라 어릴 때부터 누나와 형이 빌려왔던 만화를 많이 봤어요.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건 ''코주부 삼국지''인데요. 김용환 선생이 자기 캐릭터인 코주부를 대비시켜서 삼국지 내용을 그리신 거예요. 지금 봐도 역시 대단한 그림이에요.

    - 어릴 때의 꿈은?

    서양화를 하려고 했어요. 방과 후에 미술실에 남아서 그림을 열심히 그리던 평범한 학생이었죠.

    - 미대 진학의 꿈이 접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다른 사업을 하다가 멸치 어장을 시작하셨어요. 근데 하필 흉어기 때라 3년간 고기가 안 잡혔어요. 그래서 어장을 접게 됐어요. 여수에서는 "바다 사업과 여자 사업(연애)은 배 일곱 척이 들어가도 돛대 끝도 안 보인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만큼 아무리 해도 흔적도 없다는 얘기죠. 육지에서 공장을 했다면 건물이나 땅이라도 남았을 텐데. 아무튼 저희 집이 8남매라 제가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좋아했던 만화 쪽으로 오게 됐어요.

    33살 될 때까지는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어요. 일단 제 집사람은 대학을 나왔으니 당연히 처가 쪽에서 안 좋아했어요. 그리고 만화계가 상당히 어려울 때 취직을 해볼까 싶어서 신문 광고를 보면 전부 대졸 이상을 원하더라고요. 제가 대학을 나왔다면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오갈 데가 없으니까 만화를 그리게 된 거죠.

    제가 아버지께 고맙게 생각하는 게 두 가지 있었는데요. 만화를 하게 된 어려운 환경을 제공해주신 것,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무것도 안 남겨주신 것이에요. 다른 집 보면 돈 1, 2천만 원에도 형제들이 싸우더라고요. 근데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땐 완전히 제로였거든요.

    -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다음 날 서울로 상경하셨다고요?

    학교 다니면서 이미 갈 곳은 정해져 있었어요. 박문윤 선생께서 졸업하면 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가 주신 3만원을 들고 서울로 왔어요. 부모님이 저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돈이었으니 일종의 유산이었던 셈이죠.

    당시엔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생각보다는 객지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더 많았어요. 그때 시골에서는 "서울 사람들은 피부가 하얗다, 왜냐면 전깃줄이 많아서 햇빛이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라든가 "눈 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서울역에 도착해서 신촌역까지 택시를 타고 갔는데, 두 사람과 합승을 했거든요. 요금이 천원 나왔기에 저는 그걸 1/3로 나눠서 350원을 주고 내렸어요. 그랬더니 택시 운전사가 막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 내가 20원 더 줬지 않냐"면서 촌놈 행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택시 운전사도 어이없었을 거예요.(웃음)

    - 이향원 작가 밑에서 7년 동안 생활하셨다고요?

    박문윤 선생님이 굉장히 게을러요. 인기가 있는데도 안 그리셔서 결국 그 화실이 문을 닫았어요. 그 이후에 엄희자 선생님의 순정만화를 그리게 됐는데, 그 사이에 이향원 선생님으로부터 같이 하자는 제의가 왔죠. 그래서 처음에 한 권을 그렸더니 "내가 알기론 네 실력이 이 정도가 아닌데 왜 이렇게밖에 못 하냐?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제 맘대로 그렸죠.

    -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인데요?

    그렇죠. 나중에 선생님께서 저에게 "너와 함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 당시엔 만화가로 입문하기 위해서는 만화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자격시험에서 합격해야 했다고요?

    네. 필기시험과 그림시험을 봤어요. 만화시장은 제한되어 있는데 신인들이 자꾸 나오면 기성작가들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그런 규칙을 만들어서 숫자를 제한했던 거예요. 저는 필기시험은 1등이었어요. 근데 실기시험에서 기존작가와 그림이 똑같다면서 저를 떨어뜨린 거예요. 제가 이향원 선생님 밑에서 7년 동안 있었으니까 그림이 똑같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때 시험을 출제한 분들이 양분돼서 "네가 허영만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냐, 어떻게 네가 허영만을 떨어뜨릴 수 있냐"면서 싸움도 났었죠.

    - 데뷔 후 넉 달 만에 대히트를 한 <각시탈>이 타의에 의해 막을 내렸다고요?

    데뷔할 땐 ''3년 내로 성공을 못 하면 그만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근데 각시탈로 일찍 인정받게 됐어요. 그래서 3년 동안 열심히 그렸는데, 어느 날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당신 때문에 탈이 유행해서 전체 만화의 상당부분에서 탈을 쓰고 나오니까 <각시탈>을 그만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원조니까 다른 사람을 못하게 해야지, 왜 나를 못하게 하느냐"고 했더니 "원조가 없어져야 다른 사람도 그만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각시탈>을 그만하게 됐죠.

    - 60~70년대의 만화계는 어땠나요?

    60년대엔 정말 다양한 작가들이 다양한 내용으로 만화를 그렸어요. 만화의 르네상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진짜 제대로 된 만화계였죠. 이상무 씨도 있었고, 김민 씨도 있었고. 근데 그 이후로 공장 스타일이 생겨서 한 달에 30권씩 뽑아내기도 했어요. 만화가 국수가락도 아닌데 뽑아내다니. 하지만 한 달에 30권씩 그리면 뽑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죠. 공장기계가 돌아가듯이 40~50명이 그룹을 지어서 50권까지도 냈대요.

    - 선생님은 어떻게 작업하셨나요?

    저도 88년까지는 최고 27명까지 썼어요. 근데 그 많은 인원과 생활하다보니까 제가 그림을 못 그리겠더라고요. 그 정도의 인원을 두는 사람은 자기가 그림을 안 그립니다. 그림 그릴 시간이 없죠. 그래서 한동안 ''만화 공장의 사장으로 남을 것인가, 만화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만화가로 남기로 작정하고 88년 말에 팀을 해체했죠.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대표적 캐릭터인 ''이강토''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70년대 초에는 만화가의 대표 캐릭터가 있어야 판매에 유리했어요. 이상무 하면 독고탁, 김영하 하면 최고봉 같은 식으로요. 그래서 저도 주인공 이름을 찾아봤는데 사전 한 권을 다 뒤져봐도 쓸 만한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작명가를 찾아가봤자 이상한 이름 지어 줄 테고. 그러다가 극장에서 애국가를 듣게 됐어요. 당시엔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를 틀었거든요. 거기에 강토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래서 강토라는 이름을 짓게 됐어요.

    - 80년대엔 만화 검열이 심했죠?

    네. 여자가 안경다리 끝을 입에 무는 걸 그렸더니 심의하는 곳에서 "여자가 너무 섹시하니까 다르게 그려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사고를 제한시키면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해버리고, 아이디어의 폭이 굉장히 좁아져요. 나중에 자유롭게 창작을 하게 됐을 때도 전에 갇혀있던 사각형에서 벗어나는 데 4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 만화는 영화 콘티와도 비슷한데요. 혹시 영화감독의 꿈은 없으셨나요?

    제가 영화 한다고 하면 영화계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웃겠어요.(웃음)

    - ''타짜''가 무슨 뜻인가요?

    화투를 칠 때 잘 치는 사람을 보면 ''너 혹시 타짜 아니냐''고 해요. 사전엔 ''어떤 일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나와 있어요. 이를테면 연애 잘 하는 사람도 타짜일 수 있고, 투자를 잘 하는 사람도 타짜일 수 있죠.

    <타짜>의 구상은 어떻게 하셨나요?

    출판사 사장님 한 분이 노름 만화를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고스톱을 치는데 60년대에 은퇴한 노름꾼 한 분이 화투판으로 오더니 깔려있는 8광을 보고는 "8광 없어진다, 8광 없어진다" 하더니 실제로 손가락도 안 닿았는데 8광이 없어졌대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랑 온 방안을 뒤져도 8광이 안 나왔대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만나서 얘기를 들었더니 재밌는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타짜를 시작하게 됐죠.

    - <식객>은요?

    음식에 대한 향수가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만이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잖아요. 그런 걸 만화와 연결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출판사 소개로 한 친구를 만나게 됐어요. 그 친구가 당시 29살 정도였는데 음식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많고 조예가 있더라고요. 그 친구를 앞세우고 자료 수집을 해나갔어요. 처음엔 김치만 갖고 하려고 했는데 김치만으로는 계속 시리즈를 끌고 나가기가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술이랑 다른 음식도 넣게 된 거죠.

    - 만화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요?

    70년대 후반에 <각시탈>이 히트했는데도 원고료가 안 올라가서 한 달에 15만원 가지고 살았어요. 문하생 시절보다도 덜 벌었어요. 게다가 결혼해서 애도 있었기 때문에 전업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요. 그때가 참 어려웠죠.

    그리고 ''IQ점프''라는 주간만화지가 나오면서 신인들이 쏟아지고, 주간지 시대가 왔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단행본 스타일로는 버티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연재하던 걸 거의 다 정리하고 마석으로 들어갔어요. 하루에 버스가 두 번밖에 안 다니는 그곳에서 1년 동안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결국 그 번쩍번쩍한 신인들한테 나도 번쩍번쩍하겠다고 같이 대들었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권투로 치면 인파이팅보다는 아웃복싱이 낫겠다 싶었던 거죠. 나에겐 장편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연륜이 있다, 맞붙어 싸우진 못하니까 내 스타일대로 나가야겠다 싶었어요. 그 이후 <세일즈맨>이라는 만화로 성공했고, 그 다음부터 자신감을 갖고 제 스타일대로 끌고 오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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