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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 "고통의 뒷 모습을 보라. 견딜수 없는 고통은 없다"



책/학술

    강유일 "고통의 뒷 모습을 보라. 견딜수 없는 고통은 없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작가 강유일

    강유일

     

    서른 권의 책을 내며 바쁘게 살던 그녀 앞에 남편과의 사별, 그리고 아이의 수술이란 불행이 닥친다. 그녀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독일행을 택한다.

    작가 강유일,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고, 중요한 것은 고통 앞에서 엄살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강유일 작가 (독일 라이프치히대학 교수)


    - 경향신문 공모전에서 ''배우수업''이라는 작품을 통해 데뷔하셨죠?

    네. 경향신문의 기념행사였는데요. 제가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당선된 데다가 당시 500만원 고료였는데, 그 돈이면 집을 한 채 반 살 수 있었대요. 그리고 안락사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 테마가 신선했던 것 같아요.

    - 안락사 얘기는 왜 쓰셨나요?

    어느날 신문을 보는데 미국에서 식물인간이 된 소녀를 두고 부모와 병원, 법원 간에 안락사에 대한 법적 분쟁에 대한 기사가 있었어요. 그 기사를 오려놨어요. 그후 경향신문 장편 공모 때 그걸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당시 제가 안락사가 뭔지 알았겠어요? 그냥 아는 척 했던 거겠죠. (웃음) 그땐 죽음에 대한 각자의 다른 의견이 매력적이었어요.

    - 책을 서른 권 내셨죠?

    30권 중 19권은 소설이었고 나머지는 수필이나 꽁트집 등이었어요. 당시엔 책상을 여러 개 놓고 소설을 각각 따로 썼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보니 나중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 물론 청탁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고, 연재를 해서 독자들과 교감하는 것도 좋은 일이에요. 그런 게 동기가 되어 글을 쓰는 건 당연한데, 준비를 올바로 할 수가 없죠. 나중에는 이런 짓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서 독일로 나가게 됐어요.

    -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셨나요?

    그때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라 경제적으로 많이 후원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꼭 생존을 위해 벌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돈을 버는 게 큰 목적은 아니었죠. 쓸 수 있다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당시엔 작가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 성함은 누가 지어주셨나요?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왕유라는 중국시인의 유자에다가 제가 자녀 중 맏이라 일자를 붙이셨대요.

    - 연애시절과 결혼생활 애기 좀 해주세요.

    카페 테아트르라는 작은 소극장에 자주 드나들었어요. 거기서 연극 연출을 하는 남편을 만났어요. 제가 글을 써서 연출자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남편은 절 보고 ''당신은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 최초의 남자였어요. 저희 아버지 빼고요. 소설을 써야 한다는 그 말이 저에겐 상당히 운명적으로 들렸어요. 그래서 시작된 연애인데, 남편은 저에겐 후원자 같은 느낌이었어요. 나이차도 12살이나 났고, 결혼 후에도 늘 글을 써야 한다고 얘기해 줬어요. 제가 가정주부의 일을 하려고 하면 글을 쓰라고 했죠. 아주 좋은 파트너였어요.그러다가 갑자기 병을 발견해서 7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어요. 7년 동안 14번 입원 했는데, 저희 둘은 기도하면서 병에 대해 상당히 건강하게 싸웠어요. 마지막까지 둘이 손 잡고 잘 싸운 싸움이었다고 생각해요. 남편이 세상 떠났을 때도 유언이 없었어요. 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중에 돌아보니 부부가 손 잡고 잘 싸운 것도 아름다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 그 후에 아들이 뇌출혈을 일으켜서 독일로 떠나셨죠?

    남편이 떠나고 나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싸운 후였기 때문에 그땐 이미 앉아서 슬퍼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래도 남 보기에 흉하니까 한달은 일을 쉬었죠.(웃음) 당시 제가 KBS의 사랑방중계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요. 남편이 아플 때도 저는 일을 했어요. 남편 병실에서도 원고를 썼고, 강연 등 다른 일을 해야 할 때는 병원 소독약 냄새 때문에 향수를 잔뜩 뿌리고 나갔어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남편이 저에게 "만약 우리가 병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면 당신은 나가서 공부를 하시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1년 동안 일을 한 다음 공부하러 하이델베르그 대학 철학부에 들어갔어요. 제가 그때까지 밥을 안 해봤는데 일인용 밥솥 하나에 추천장을 들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간 거죠. 아들은 한국에서 저희 어머니가 돌봤고요. 거기서 공부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이가 수술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뛰쳐나왔죠.

    - 그러다가 어떻게 라이프찌히로 가게 되셨나요?

    제 아이가 목숨은 구했지만 재활치료는 독일에서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 아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기억상실에 걸린 상태였는데요. 내가 이 문제를 직시한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갔죠. 하지만 제가 가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아이도 기억상실이라 저 사람이 나의 엄마라는 것 외엔 모르는 상태였는데요. 일단 독일로 가서 아이는 유명한 재활센터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어요. 근데 아이가 치료하는 동안 아이만 바라보고 있으면 저는 미치잖아요.

    그래서 공부하러 갔는데 거기 교수가 "당신, 작가였던 사람이 여기서 철학을 해서 뭐할 거요, 라이프찌히로 가시오"라고 말하더라고요. 거기에 독일문학연구소라고 유명한 작가들을 키우는 대학이 있거든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교수가 추천서를 써준다거나 대학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입학시험을 봐서 학부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갈아입을 옷 한벌 들고 기차를 타고 면접시험을 보러 갔어요. 그때만 해도 독일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갔어요. 면접 시간이 돼서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거울에 흰머리가 보이더라고요. 그게 제 최초의 흰머리였어요. 그걸 확 잡아빼버렸죠. 그때 참 비감한 심정이 들었어요. 구름도 끼고 말이죠, 굉장히 까뮈적인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거기서 면접시험을 치르고 합격 통고를 받아서 라이프찌히에 가서 대학생이 됐어요. 그때 제 아이는 기억력은 회복했지만 몸이 불편했으니까 학교를 오가는 것이 어려워서 슈바르츠발트라는 곳의 유명한 기숙사 학교로 들어갔어요.

    - 당시 학생들 중 최고령이었다고요?

    네. 제가 최고령이었는데, 독일대학에서 나이가 많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독일문학연구소의 평균 연령이 27세에서 32세 사이였는데, 전 그 나이를 훨씬 넘었었죠.

    - 당시의 고독감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하이델베르그의 교수가 저에게 왜 라이프찌히로 가라고 했는지 알게 됐어요. 그때가 통일 이후라 동독 시민들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시기였어요. 그러니까 통일 이후의 그 사람들의 상처나 의욕, 악몽, 꿈을 제가 관찰자로 지켜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제가 있는 라이프찌히 대학 이름이 1942년에 칼 막스로 바뀌었고, 로터 크로스트(붉은 사원)라고 불렸고요. 왜냐면 그곳이 동독 이데올로기를 이끌어가는 지식인들이 나온 학교거든요. 그런 것 뿐 아니라 유명한 공산주의자들 이름을 단 거리나 공원들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거기서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역사의 중요한 증인으로서 올바로 관찰할 수도 없었던 거에요. 그리고 우리의 통일은 무엇이냐, 독일의 통일이 어떤 모양이든 한국 통일의 미래태일 수 있는데, 이 미래태를 내가 어떤 방식으로 바라봐야 하느냐. 그런 것들이 문제였어요.

    그리고 동독 지식인들이 침착하게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천천히 씹고 있는 모습, 정신적으로 저작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독일 통일의 성공이 있다면 침착한 독일 시민들과 독일 지식인들의 참을성이라고 생각해요. 서독은 통일이 되어도 똑같지만 동독은 다르죠. 동독은 공산주의 40년 동안 그것이 자신들의 유토피아라고 알고 살았던 거에요. 그 길로 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 거에요.

    나중엔 이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떻든 정렬적으로 그 시스템을 따라갔던 거에요. 왜냐면 그들은 서독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순결한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통일이 되면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40년 간 실험했던 공산주의는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엔 40년의 세월을 낭비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40년 간의 낭비에도 불구하고 통일이라는 변화를 굉장히 또렷한 시각으로 주목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침착하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거에요. 그런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훨씬 더 통일을 치열하게 사는 거죠. 그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하느냐보다도 우선 수퍼마켓에 가면 물건의 종류가 달라지는 거에요. 수많은 것들 속에서 택해야 하고, 금전에 대한 가치를 결정해야 하는 거에요. 그런 게 저에겐 좋은 관찰인 거죠. 그래서 우리 교수가 나에게 왜 라이프찌히로 가라고 했는지를 깨달았어요.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원산 출신이세요. 제가 어렸을 때 피난민으로서 아버지 주위에 있었던 좌절한 지식인들이 어떻게 통일을 견뎌냈는지를 봤어요. 그들은 온 가족을, 자기의 우주를 잃었던 거에요.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직장을 잡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분들이 저희 아버지를 찾아오셨어요. 당시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셨으니까 고정된 수입이 있었죠. 그러니까 저희 아버지가 그들을 돕는 거에요. 코트를 벗어주고, 술을 사주고, 용돈을 대주고. 작지만 그런 것들이 그들에겐 실향에 관한 상처를 점진적으로 도와주는 거였어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온 가족을 다 잃으셨어요. 부농 출신의 딸이라서 그 대지를 떠날 수가 없었던 거에요. 6.25가 나서 피난을 가려니 그때는 이미 곡식이 익을 때였는데, 익은 곡식은 자식들 같아서 도저히 못 떠난다는 거죠. 그런 실향을 제가 봤기 때문에 동독인들이 어떻게 견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유학비용은 어디서 나셨어요?

    아이 교육도 시켜야 하고, 유학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청탁받은 잡문들을 많이 썼어요. 제 이름 아닌 걸로요. 부모님께도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학교에선 조교도 했고요. 또 제가 책을 30권 냈으니까 기본적인 수입은 있더라고요. 불규칙하지만 인세도 나왔고, 또 예전에 방송을 했던 팀에서 제가 무슨 일이 있으면 비행기표도 보내주기도 하고. 그런 즐거운 우정에 관한 일들도 있었어요.

    - 어떻게 교수가 되셨나요?

    제가 독문학을 하고 2년 후에 산문, 희곡, 뉴미디어를 겸해서 했어요. 그 시기에 저희 학교에서 문학의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동아시아 문학에 대한 특수한 세미나를 하기로 한 거에요. 그래서 동아시아 교수를 뽑아야 했는데 지원자가 많았어요. 쾰른대학의 일본인 교수가 왔고, 독일인이 왔고, 제가 왔어요. 그래서 심사에 들어갔는데. 전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왜냐면 일본인 교수가 오랫동안 쾰른에 있었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거거든요.

    라이프찌히 대학은 이미 공산주의일 때부터 닛뽄파운데이션이라는 일본의 유명 재단에서 굉장히 많이 지원했어요. 그러니까 이미 일본의 수많은 유학생들이 거기서 유학을 했죠. 그리고 독일의 유명 지휘자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동독에선 어렵지 않게 이뤄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본인 교수가 될 줄 알았어요. 근데 제가 됐죠. 아마 저의 모교이고, 제가 한국식으로 일하는 게 성실해 보였나봐요.

    - 불행과 행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중요한 건 그 고통의 뒷모습을 보는 거에요. 동화에서도 굉장히 흉한 얼굴 뒤에 순결한 얼굴이 감춰져 있잖아요. 고통이 그런 이상한 마스크를 하고 오는 것 같아요. 그걸 직시하면서 이건 순간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고통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사실 행복하면 깊은 차원은 안 나와요. 그것만 이길 수 있으면 사람들이 강해지니까요. 하지만 고통 속에서 제일 나쁜 건 너무 엄살을 떠는 거에요. 저는 어려울 땐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로 갈 때 자기 아이를 철로에 내려놓기도 했고, 가스실에서 죽어가기도 했는데 이 정도 쯤이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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