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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가 문화를 일으켰다…인터넷 최고 댓글은 ''아햏햏''"



문화 일반

    "오타가 문화를 일으켰다…인터넷 최고 댓글은 ''아햏햏''"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디씨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디지털 강국 한국의 모습을 알려면 싸이월드와 함께 디씨인사이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의 신랄한 패러디와 풍자, 새로운 사회참여의 장이 되는 디씨인사이드의 김유식 대표는 피씨통신의 원조격이다.

    컴퓨터와 돈에 관심이 많았다던 그는 어떻게 해서 디씨인사이드를 만들게 되었을까?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패러디 신화를 만드는 디씨인사이드의 김유식 대표와 만나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디씨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김유식

     

    - 디씨인사이드가 언제 만들어졌죠?

    99년 10월에 오픈했습니다.

    - 어떤 취지였나요?

    돈이나 벌어보자는, 남들도 인터넷 하니까 나도 해보자는 마인드였죠. 하하.

    - 디씨인사이드라는 이름은 왜 붙이게 됐나요?

    디씨는 디지털 카메라의 약자였고, 인사이드는 감명깊게 읽었던 ''IBM PC의 안쪽''이라는 책 때문에 붙이게 됐는데요. 몇년 전에 모 CPU 회사랑 상표권 분쟁을 일으킨 적이 있어요. 결국 저희가 이겼지만 당시엔 걱정을 많이 했었죠.

    -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71년생입니다.

    - 언제부터 사업을 시작하셨나요?

    91년 정도였던 것 같네요. 20살, 21살 즈음. 제가 꼼수를 좋아하는데요. 당시 용산의 컴퓨터 부품 도매상들이 파는 가격과 실제 판매자들이 파는 가격의 차이가 너무 컸어요. 용산에 가면 일단 ''어디서 오셨냐''고 물어봐요. 판매업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거죠. 그러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리봉동에서 왔다는 식으로 말하면 일반 소비자인 거고, 어떤 매장에서 왔다고 하면 업자인 거죠. 전 젊으니까 많이는 아니더라도 돈 좀 벌어보자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당시 어떤 제품의 도매 가격이 4만원인데 소비자가는 10만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4만 5천원만 받아보자고 했는데 일이 잘 됐어요. 그래서 아침에 당시엔 비닐봉투 들고 나가면 돈을 쓸어담고 왔죠. 그땐 돈 걱정이 없었어요. 하하.

    - 어릴 때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천 원만 가지고도 밖에 나가는데, 저는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걱정이 돼서 밖엘 못 나갔어요. 배고프면 어떡하나, 차 못 타면 어떡하나, 하다못해 데이트를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잔뜩 있으면서 못 쓰는 것과 없어서 못 쓰는 건 다르니까요. 지금은 신용카드가 있어서 안 그러는데, 전에는 돈 많이 들고 다녔어요.

    - 그럼 지금은 돈 많이 모으셨겠어요?

    아닙니다. 하하.

    - 결혼 발표 후 사이트가 난리가 났었나고요?

    그전엔 제가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면서 커플 지옥을 부르짖었거든요. 근데 살다보니까, 출산률도 안 좋기도 하고, 하하. 민족번영을 위해, 또 직원 사랑을 실천해보자 싶어서 배신하게 됐습니다.

    - 아내분이 디씨뉴스 편집장이시지요?

    인터넷 방송하면서 제품 소개할 때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패러디나 합성의 대상이 많이 됐어요. 전에는 인기가 많았었죠.

    - 현재 같이 근무하고 계세요?

    예. 하지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전 올빼미 생활하느라 새벽 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오는데, 아내는 일찍 출근하니까요.

    - 신혼여행을 강원랜드로 다녀오셨어요?

    네. 거기에 100평 정도 되는 제일 큰 방이 있어요. 그 방이 평소엔 500만 원쯤 하는데, 청첩장을 갖고 미리 예약하면 50만원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근데 예약을 하려고 하니까 큰 방이 없고 일반방만 남았다는 거에요. 큰소리 쳐놨는데 안 간다고 할 수도 없고.

    - 컴퓨터는 언제 처음 접하셨나요?

    아버지가 신문사에 계셔서 컴퓨터는 일찍 접했어요. 초등학교 시절, 81년에 컴퓨터를 샀던 것 같네요. 8비트 중에서도 처음 나온 보급기종이었죠.

    - 처음 가입한 PC통신은?

    ''케텔''이라고, 지금은 ''파란''으로 변신한 곳이죠.

    - 처음 사이버 공간에 글을 올린 기억은?

    90년 정도였어요. 피씨통신을 하게 된 이유가 재밌는 생각을 유머 게시판에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온라인은 대체로 재미로 접근을 하기 때문에 유머 게시판이 인기가 많아요. 근데 처음 글을 쓰려는데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일단 W 버튼을 누르고 글을 쓰면 되는 거였는데, 당시엔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어서 하루 정도 고심을 했죠. 그리고선 humor 앞으로 편지를 썼어요. 그러면 글을 올려줄 줄 알고. 근데 안 올라가더라구요. 그래서 또 하룻밤 고심을 했죠. 근데 유머 게시판 인덱스가 대문자로 돼있더라구요. 그래서 대문자 HUMOR로 다시 메일을 보냈어요. 근데 또 안 올라가더라구요.

    - 유머의 소재는 어디서 얻나요?

    평소에도 모든 사물을 비꼬아서 우습게 보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 지금의 디씨인사이드 개념과 거의 같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재밌는 게 좋으니까.

    -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학생이었나요?

    학교 다닐 때 연습장에다가 선생님을 패러디하는 신문을 만들었어요. 그러고보면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신문사에 계시니까 아들도 학교에서 신문을 만든 거죠. 하하.

    -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특별히 공부나 직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분이셨어요. 보통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 한다고 생각하시잖아요. 그것만 믿고 계셨던 것 같아요.

    - 1993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구요?

    원래 네트워크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국내에선 전문적인 곳이 별로 없었거든요. 근데 막상 가보니 말만 컴퓨터 선진국이지, 제가 보기엔 아니더라구요. 일본은 통계가 많이 왜곡돼있는 것 같아요. 당시 일본의 네티즌 인구가 많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타자기 치는 수준이더라구요. 그래서 봤더니만 핸드폰으로 이메일 보내면 네티즌 이라는 식의 통계더라구요. 컴퓨터도 8비트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전체 보급댓수가 늘어났다든가. 그래도 학비를 내놨으니 학교는 다녔는데요. 배울 게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장사나 하자고 했죠. 한국인 유학생들은 접시닦이나 이삿짐 나르기 등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저도 긴자 지하철 역에서 돌을 나른 적도 있죠. 근데 해보니까 장사하는 게 낫겠더라구요. 그래서 컴퓨터 부품이나 게임기, 게임팩, 음악씨디 등을 한국에 팔았죠. 당시 어떤 게임기가 한국에서 40만원 정도에 팔렸어요. 근데 한 친구가 저한테 그 게임기를 사다달라고 40만원을 주길래 매장에 가보니 30만원에 팔리고 있더라구요. 저한텐 10만원의 마진이 생긴 거죠. 근데 그 친구가 피씨통신에 게임기 샀다고 자랑을 많이 했어요. 근데 다음에 또 가보니까 30만원 가격이 20만원으로 떨어져있는 거에요. 일본이 게임 가격이 특이해요. 발매 첫날은 그대로 팔다가 쭉쭉 떨어지거든요. 나중엔 그 게임기 가격이 780엔까지 떨어졌어요. 1만원도 안 한 거죠.

    - 1997년에 영국으로 가셨죠?

    그땐 국가보안법에 걸렸어요. 무죄로 나오긴 했는데, 계속 미행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잠깐 나가있자 싶어서 갔죠. 일종의 도망이었어요.

    - 영국에서는 뭐하셨어요?

    처음엔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동네 곳곳에 카지노가 보이더라구요. 넉달 동안 카지노를 갈까말까 고민했어요. 돈 날려서 조기귀국하면 안 되니까. 그러다가 결국 갔는데 욕심을 안 부려서 그런지 한달 내내 돈을 따더라구요. 거의 남들 주급 받는 정도로. 그래서 학교에 와서 자랑했어요. 음식도 주고, 나갈 때 햄버거 주는 거 갖고 오면 다음날 끼니까지 해결되고, 용돈도 주고, 이렇게 좋은 데 없다고. 그래서 친구들도 우르르 카지노에 갔다가 조기귀국한 애들도 생겼어요. 3년 일정으로 공부하러 온 선배는 2달 만에 갔죠.

    - 그 선배는 어떻게 됐나요?

    계속 돈을 잃어서 이젠 정말 도박 하지 말자고, 마지막으로 밥만 먹고 오자고 해서 갔어요. 근데 룰렛 테이블 밑에 5파운드가 떨어져 있는 거에요. 그걸 주워서 배팅을 했는데 300파운드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결국 다 잃었죠. 사실 본전이다 생각하고 집에 가면 되는데, 300파운드를 잃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또 아니었나봐요. 잠깐 화장실 갔다온다던 선배가 은행에 가서 돈을 뽑아 왔는데 전부 다 잃었어요. 그러고나서 선배랑 같이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갑자기 선배가 노래를 부르는 거에요. 슬픔을 묻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전 선배가 미친 줄 알았어요. 근데 선배가 집에 오더니 바로 가방 싸고 가더라구요.

    - 처음에 디씨 인사이드는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나요?

    노트북 인사이드와 같이 시작했는데요. 컨텐츠를 제공하면서 공동구매 방식으로 노트북과 디카를 팔고, 잘되면 광고도 유치하려는 소박한 꿈이었죠.

    - 자본금은 얼마였나요?

    혼자 일했기 때문에 자본금이랄 것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0년 3월에 처음으로 5억원 투자를 받았어요. 그러고나서 7월에 5억원 투자를 한번 더 받았는데, 그땐 벤처붐이 꺼질 때였어요. 1999년에 투자 받았던 회사들이 다 망하고 있었죠. 그래서 닷컴들이 하던 방식대로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저는 다 거꾸로 했어요. 예를 들면 당시엔 회원제가 기반이었는데 비회원제로 한다든가, nt서버라고 비싼 기종 쓰는 걸 리눅스로 한다든가, 교육 잘 받고 연봉 높은 직원을 채용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교육을 시켜나가는 식이었죠.

    - 폐인의 등장은 언제부터였나요?

    2001년 말부터였던 것 같아요. 2002년 초에 저희 사이트의 폐인동 모임이 있어서 저도 나가봤어요. 양복 입고 가면 무게잡는다고 할까봐 군복을 입고 갔는데, 다들 양복을 입고 있더라구요. 다들 정보통신 쪽 직장인이었어요. 그리고 소주도 아니고 바로 위스키를 마시러 가더라구요. 제가 폐인에 대한 정의를 잘못 생각했더 싶었죠. 실제로는 폐인이 아닌데 말만 그렇게 하는 거죠. 돈 있는 사람들이 거지인 척.

    - ''10만 폐인 양병설''은 뭐에요?

    인터넷 인구가 아무리 늘어봤자 중국과 인도를 못 당하고, 일본과 리플로 치고박고 싸울 때도 한국인 사이버 전사들이 많아야 밀리지 않고 대응하지 않겠나 싶었죠.

    - 피씨통신에서 이름 날리던 사람들이 디씨인사이드로 몰려든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피씨통신을 이끌던 주축은 전산과나 공학도들이었는데요. 하드웨어 매니아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다가 97년부터는 단말기를 나눠주면서 일반인들도 피씨통신을 쓰게 됐거든요. 이분들을 논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인터넷으로 무대가 바뀌면서 피씨통신의 논객들은 갈 데가 많았지만 정작 매니아층이 갈 만한 곳이 없었어요. 저희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디카가 컴퓨터와 묶이다보니까 하드웨어 매니아들이 열광할 수 있게 됐고, 또 거기에 인터넷이 날개가 됐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분들이 들어오게 된 것 같아요.

    개죽이

     



    - ''아햏햏''는 무슨 뜻인가요?

    일종의 문화코드를 대표하는 키워드에요. 폐인문화 중에서도 본격 폐인들, 그러니까 인터넷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수햏자''라고 하는데, 그 수행의 길을 걷는 전반적 문화를 ''아햏햏 문화''라고 합니다.

    - 왜 하필 ''아햏햏''인가요?

    누군가 오타를 쳤는데, 그게 하나의 개념이 된 거죠. 네티즌 중에 그런 걸 꿈꾸면서 욕심없이 산다,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 모든 재미를 인터넷에서 찾겠다는 사람들을 ''햏자''라고 부르죠.

    - ''개죽이''는 뭔가요?

    네티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시위를 해도 개죽이 깃발을 들고 나가니까.

    - 디씨인사이드가 정치에 관해선 어떤 성향을 띄고 있나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죠?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네티즌의 자발적 정치 참여는 아주 좋은 현상''이라는 식으로 무겁게 푸는 경향이 있는데요. 제가 보기엔 아니에요. 당시 정치가 우습게 흘러가기 때문에 재미로서 접근한 거에요. 네티즌이 인터넷을 쓰는 이유는 크게 보면 ''정보 검색''과 ''재미에 대한 접근'' 때문인데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정말 재밌었잖아요. 치고박고 거의 축구선수처럼 놀았죠.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재미의 대상이 됐던 거에요. 정치가 재미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런 접근은 어려웠을 거에요.

    - ''독도 사이버 대전''도 있었다구요?

    2004년에 일본의 망언 때문에 대전이 있었는데요. 사실 창피했던 게 당시 저희 사이트가 다운됐었는데, 기사엔 ''디씨인사이드도 공격 받아서 다운됐다''는 내용으로 올라왔어요.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아이피 체크를 해보니까 저희 쪽에서 공격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다운된 거죠. 근데 차마 기자들한테 그런 말을 못하겠어서 그냥 일본쪽 공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고 얘기했죠.

    - 그 정도면 정말 10만 폐인 정도 됐겠네요?

    하루에 80만명이 들어오기 때문에 공격 준비하는 시점에선 수십만 명이 있었겠죠.

    - "업계의 흐름을 내다보는 직관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디씨인사이드를 운영하다보니까 기사에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자'', 혹은 ''디카의 미래를 예견했다''는 식의 기사가 나오는데요. 전 소 뒷발로 잡은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하이텔의 컨텐츠 제공업자로서 시작한 게 노트북 인사이드였어요. 근데 담당자가 노트북 인사이드 하나만 하면 없어보인다면서 뭔가 하나 더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저한테 디카가 있길래 디카를 하겠다고 한 거에요. 제가 뻔뻔스러우면 미리 예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사업은 ''운팔기이''고, 운이라는 건 20의 기회와 계기가 있어야만 만들어져요. 만약 그때 저한테 디카가 아니라 요구르트가 있었다면 요구르트 인사이드가 됐을 거에요. 하하.

    - 본인이 쓴 글 중 댓글이 가장 많이 붙었던 글은?

    이용자와 분쟁이 일어날 때 댓글이 많이 붙어요. 전에 서버가 부족해서 서버를 신문사 사이트로 옮긴 적이 있었는데, 이용자들이 ''왜 우리 컨텐츠를 팔아먹느냐''고 오해해서 3일 정도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리플 수천 개가 달렸어요.

    - 최고의 댓글이나 최악의 댓글을 꼽는다면?

    최고의 댓글은 ''아햏햏''이라고 봐요. 오타 한번으로 문화를 일으켰으니까요. 최악의 댓글은 참 많습니다. 특히 상대를 비방하는 악플 중 부모님 욕을 하는 댓글이 있거든요. 그런 거 보면 저도 사람인지라 달라붙어서 또 싸우게 되죠.

    - 내가 뽑은 최고의 인터넷 논객은?

    논쟁을 일으키는 의미에서 꼽는다면 김완섭씨라고 봐요. 피씨통신 때부터 사대천왕이었고, 최근엔 독도 문제로 자신을 비방한 네티즌을 고소했죠. 논쟁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계속 바람을 일으킨다고 볼 수 있죠.

    - 힘들 때 스스로를 일깨우는 말이 있나요?

    커뮤니티를 운영하다보니 늘 ''모든 이용자는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힘들거나 생각이 안 떠오를 땐 무조건 리플을 읽어요. 악플에 달라붙어서 싸우기도 하고, 좋은 리플에 감동 받기도 하구요. 그러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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