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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그날, 시인 신동엽도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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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4.19 그날, 시인 신동엽도 거리에 있었다

    • 2006-04-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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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인병선, ''''온몸은 먼지투성이, 청명한 눈빛에 상기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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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껍데기는 가라>, <금강>등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어로 시대를 노래한 시인 신동엽 씨의 부인 인병선(71)씨가 CBS TV <정범구의 시사토크 누군가?!>에 출연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신동엽 시인의 짧지만 치열했던 39년의 삶을 소개했다.

    얼굴을 상기돼 있었고 눈은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민주주의를 향한 물결이 거리를 휩쓸고 있었을 때, 신동엽 시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인병선 씨는 ''''1959년에 시가 입선되고 난 후라 (신동엽 시인이) 서울에 있었다. 그 때 디스토마를 앓고 있었는데 병도 좀 낫고 해서 취직을 하려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나간 사람이 하루 종일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에 들어왔는데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눈은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고 4.19 당시 신동엽 시인의 하루를 소개했다.

    ''''온 몸과 구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로 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았다''''

    훗날 4.19 시인으로 평가받는 신동엽 시인 스스로가 바로 그 날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의 함성을 온몸으로 느꼈다는 증언인 셈이다.

    이제는 가족의 품에서 민족의 품으로 떠나보낸다

    최근 <시인 신동엽>이라는 도록 형식의 책을 발간한 인병선 씨는 ''''신동엽 시인이 그야말로 민족의 시인으로 자리 잡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신동엽 시인의 육필원고와 편지, 사진, 파이프, 의상 등을 사진으로 찍어서 정리했다. 이제는 (신동엽 시인을) 가족의 품에서 세상으로, 민족의 품으로 보낸다는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평양, 껍데기로 덮인 사회라는 생각 들어

    인병선 씨는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5주년 행사에 참석해 남편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낭독했다. 그는 ''''동학민운동, 3.1운동,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과 그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압축적으로 노래한 것이 바로 <껍데기는 가라>다''''며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인 씨는 ''''당시 북측 사람들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표현을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끼리 통일 하자는 식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 솔직히 나는 평양이 너무 암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이 바로 껍데기, 쇠항아리가 덮인 사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껍데기는 가라>를 암송했다. 일종의 동상이몽이었다''''고 고백했다.

    저항정신과 민족의식은 어릴 적부터 형성된 것

    신동엽 시인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로 등단했다. 그 무렵 작품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4.19 시인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인병선 씨는 ''''그의 저항정신과 민족의식은 훨씬 전부터 형성되었다. 이미 10대 때부터 해방을 겪고 그 후 여러 상황들을 목격하고 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문단의 좌우대립에 의해 판매금지 당하기도

    정치 이념적으로 민감했던 당시 신동엽 시인의 시는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인 씨는 ''''그때만 해도 문단의 좌우 대립이 극단을 치닫고 있었다. 순수파, 참여파로 나뉘었는데 신동엽 시인의 시는 소위 순수파들에 의해 굉장히 불온한 시로 치부됐다''''고 말했다. ''''물론 살아있을 때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소설가 남정현 씨가 1965년에 <분지>라는 소설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폐인이 돼서 나왔다. 그 분과 신동엽 시인은 굉장히 막역한 사이였다. 그 때 나한테 ''''시는 상징어를 많이 쓰기 때문에 소설보다는 형편이 낫다''''고 말했다. 결국 1975년 신동엽 시인의 전집이 긴급조치 9호에 의해 판매금지 조치 당했다. 당시 중앙청 문공부에 찾아갔다. 그들은 ''''어느 한쪽에서 고발을 해와 어쩔 수 없다''''고 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시인 김수영, 신동엽 주목하며 평론에 자주 이름 거론

    1960년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히는 김수영 시인과 신동엽 시인은 자주 비교선상에 오른다.

    인 씨는 ''''김수영 시인이 신 시인보다 훨씬 선배다. 당시 김수영 씨는 시인이자 평론가로 문단에서 굉장한 위치에 있었고, 신동엽 시인은 그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수영 시인은 68년에 돌아가시고 신 시인은 69년에 돌아가셨는데 김수영 시인은 67년부터 신 시인을 유심히 보고 평론에 많이 거론했다. 그러면서 문단의 이목이 신 시인에게 집중됐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인정식 선생, 냉전논리에 의해 업적 가려져

    인병선 씨의 아버지는 <조선농업경제론>을 쓴 한국 좌파 농촌경제학의 대두 인정식 선생이다. 인 선생은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됐다.

    인 씨는 ''''북쪽 정권에 의해 희생이 되셨는지 북으로 넘어가다 희생됐는지는 아직도 확인이 안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학계는 아직도 냉전논리에 갇혀있는 것 같다. 내년이 아버지가 태어나신 지 100년이 되는 해인데, 별다른 계획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의 업적이 정치이념적인 문제들 때문에 가려지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동엽, 인정식 선생을 존경했다

    신동엽 시인은 인정식 선생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었다. 인 씨는 ''''데이트를 시작한지 3일 되던 날, 신동엽 시인이 아버지의 성함을 물어봤다. 내가 성함을 말하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면서 깜짝 놀라더라. 자신이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고 그 분의 책도 다 읽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우리 아버지에 대해 주위 분들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상적 문제 때문에 나도 학교에서 굉장히 외롭고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었는데 신동엽 시인이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너무 감동받아 마음을 금방 준 것 같다''''고 밝혔다.

    인병선 씨는 현재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농촌문화를 되살리고자 줄기차게 연구해온 ''''짚풀문화''''가 이제 그의 남편이다.

    내년 신동엽 문학관 건립을 앞두고 있는 인 씨는 36년간 품에 안고 간직해온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신동엽을 이제 민족시인 신동엽으로 세상에 내보낼 채비를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 412번 채널)과 각 지역 케이블방송을 통해 4월 14일(금 낮 12시), 4월 15일(토 오전 11시), 4월 16일(일 밤 10시) 세 차례 방송된다. 인터넷 www.cbs.co.kr를 통해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으며 방송 후에는 인터넷 주소창 누군가 로 접속해 VOD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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