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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초대 대법원장, 사법부를 다시 말하다



법조

    '딸깍발이' 초대 대법원장, 사법부를 다시 말하다

    가인 김병로 50주년...민족 변호사. 권력 독립 행보 재조명

    지난 1954년 서울지방법원장이 의뢰인에 대한 보석허가 청탁과 함께 변호사로부터 45만환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지만 1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법관이 범법한 사실이 없더라도 그러한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도 불미(不美)하다"

    결국 기소된 법원장은 최종심에서 유죄를 받고 법복을 벗어야 했다.

    2014년 대한민국은 사법부 전성시대다.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수재들이 모인다는 사법시험, 그 사법시험을 통과한 수재들 가운데서도 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 몰리는 직종이 판사다. 국가가 커지고 법망이 촘촘해지면서 법원의 영향력도 비례해서 커지고 있다. 판사출신 변호사들이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것은 이제 낯선 모습이 아니며 입법, 행정부로도 진출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사법부의 덩치가 커진다 해서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이 자동적으로 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묵은 전관예우, 이해못할 양형, 권력과 금권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사법부의 권위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사법부 내부적으로도 고민이 크다. 무엇보다 최근들어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에는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하는 법관의 근본정신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사법부가 50년전 세상을 뜬 대한민국 법의 대부,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의 재조명에 몰두하는 이유다.

    ◈미군정하 초대 사법부장-대법원장 대한민국 사법부의 아버지◈

    가인의 삶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젊은 가인이 일제치하 법정에서 법을 무기로 독립운동가들을 대변하는 민족변호사로서 삶이었다면 후반기 가인은 갓 태어난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도맡아 세우는데 전력을 다했다.

    가인은 1888년 1월 27일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내던 김상희의 외아들로 태어나 조부와 조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13살에 3살 연상인 아내와 홀어머니를 책임지는 가장이 됐지만 학업의 뜻을 접지 않았다.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편입하여 졸업했지만 일본 변호사시험의 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자 귀국하여 1916년 경성전수학교 법률학 교유와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가인 김병로 선생 사진

     

    1920년에서야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있었던 가인은 이후 10년 동안 대동단 사건, 김상옥 의사 사건, 의열단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흥사단 사건, 안창호 사건 등 100여건에 달하는 민족항쟁사건 변론하면서 법정투쟁에 앞장섰다.

    해방뒤인 1946년에는 미군정하에서 최초의 한국인 사법부장에 임명된데 이어 1948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 추대 받은뒤 각종 사법체계와 법전 정비에 힘을 쏟았다.

    ◈후배들에게 요구한 혹독한 법관의 길◈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에 오른 가인은 "국민의 신체, 자유 재산 등 전반적인 권리 의무를 최종으로 규정하고 이행하는 법관의 책임을 고려해 법관으로서 숭앙을 받을 만한 인격의 구비를 겸유해야 한다"며 틈만 나면 법관들의 정신자세를 다잡는데 힘을 기울였다.

    가인은 1954년 법관훈련회동에서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스스로 정의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를 반성해 보고 내 마음과 내 신체를 동일시하여 모든 것을 정의에 입각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법관으로서는 타락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가인 김병로 선생 사진

     

    가인이 요구한 법관의 자세가 '청렴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론적인 수준이 아닌,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한 구도자의 자세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법관에게 금력과 권력으로부터 멀리할 것을 강조했다.

    "세상의 모든 금력과 권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유혹하고 정궤에서 일탈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혹물들에게 유혹당하는 것은 법관으로서의 존엄성에 비추어 보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며...(하략)"

    가인은 이같은 법관의 자세가 선택이 아닌 의무라고 강조하며 "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해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라"고 일갈했다.

    ◈평생 한복만 고집한 청렴한 삶◈

    가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후배들에게 직접 법관의 삶이 어떤지를 보여줬다.

    당시 사법부장의 한달 봉급과 맞먹는 양복 입기를 거부하고 평소에도 한복을 즐겨입었으며 점심시간에도 집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추운 겨울에도 대법원장실에 기름대신 톱밥이나 연탄을 땠고 그래도 추위가 몸을 파고들 때는 두꺼운 이불을 둘러치고 판결문을 쓰는 모습도 종종 목격됐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재판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번 했다가는 매몰차게 집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이토록 자신과 후배들에게 엄격한 삶을 요구했던 가인이지만 개국 초기 열악했던 법관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가인이 묘사한 당시 법관들의 일년 수입은 "생활비에 한 푼도 쓰지 않고서야 겨우 한 두자녀의 대학교 학비"에 불과했다. 수십년 뒤 법관 출신 후배들이 수백억원 대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가인 역시 후배들에게 이런 힘든 삶을 강요해야 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대법원장에서 물러나는 순간에서야 이런 회한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동안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전국의 법원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사건 처리의 신속을 강조했던 것이나 또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를 가지고도 살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사법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은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도 지켜낸 사법부 독립◈

    가인은 비단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 혼란 속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는 대들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행정수반이자 최고 권력이었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사이가 좋았을리 없었는데 대표적인 일화가 대구매일신문의 최석채 주필 사건을 두고 벌어진 갈등이었다.

    1955년 9월 대구매일신문의 최석채 주필은 '주미대사 임병직의 대구방문때 환영을 위한 학생동원이 너무 심했다'며 학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 사설이 알려지자 자유당 소속 청년들이 신문사를 습격해 기물을 파손하고 직원을 구타했는가 하면 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1심과 2심재판부는 잇따라 최 주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대통령은 다음해 국회에서 판사들이 '세계에 없는 권리를 가지고 행세하고 있다'며 사법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고 이승만 대통령과 가인 김병로 선생

     

    " 왜 이렇게 돼 가는고 하니 헌법에 재판관은 마음대로 할 권한이 있고 또 재판관이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벌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중략) 법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어떤 방편으로든지 재판장의 권한에 한정이 있어야 되겠다."

    이 대통령의 불만에 가인은 국회에서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반박했다.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판장의 권한 제한은 입법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로 사법부는 무어라 말할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특수입법조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52년 산림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범어사 주지 2명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데 대해 이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만나겠다고 하자 당시 서상환 법무부장관에게 "기록이나 제대로 읽어보고 사건 얘기를 하라"고 면박을 준 일화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사법체계 기초를 다지다◈

    법관으로서 가인 김병로의 최대 업적이라면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물론이요 민법,형법,상법,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을 개편하는등 현대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근간을 일구어 냈다는 점이다.

    가인의 법전 편찬에 기울인 열정은 주변 사람들이 "마치 고등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나 법원의 서기처럼 깨알 같은 글씨로 개정되어야 할 조문들을 검토하고 성문화하는 작업을 일일이 해나갔다"고 증언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피난까지 가야 했던 상황에서도 법전 편찬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57년 국회에서 "다리를 잃고 어디 나갈 일이 없어 법전편찬 사업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가인 김병로 선생 사진

     

    주목할 것은 당시 법개정 과정에서 보여준 가인의 시각이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고 열려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형법각칙에서 간통죄와 낙태죄를 삭제하고 국가보안법과 비상조치법등이 형법 속에 모두 포섭되어 있으므로 필요없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전란 속에서 공비에게 아내를 잃었고 정치적으로 우파적 시각을 가진 그였지만 법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이 모든 정치적 잣대를 철저히 배제한 셈이다.

    결국 국회 격론을 통해 간통죄는 쌍벌주의로 유지, 낙태죄 완화, 국가보안법은 일단 그대로 두되 국가보안법 자체의 개정 혹은 폐지시 논의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국회마
    저도 가인의 열린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2014년 대한민국 사법부 가인에게 길을 묻다◈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뒤 정치가로서 활동을 이어갔던 가인은 1964년 1월 13일 만 77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인(街人), 거리의 사람이라는 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삶은 평범함을 추구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195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정작 '근본'을 잃어버린 2014년 대한민국 사법부로서는 가인이 삶에서 보여줬던 법관의 의지와 참뜻을 되찾는 것이 시급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가인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변호사라는 직무가 그다지 큰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의 현실에 있어서 첫째 가장 우리에게 잔혹하던 경찰도 변호사라면 용이하게 폭행이나 구금을 하기 우려웠다는 것, 둘째로 그 수입으로서 사회운동의 자금에 충당할 수 있는것, 셋째로 공개법정을 통해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것 등이 약자인 우리에게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법조인이 되고자 고민하는 젊은이들이라면 반드시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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