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라디오는 큰 부잣집에서나 한 대 가질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한 동네에 많아야 한 대 정도고 한 대도 없는 마을도 많이 있었다. 그러니 시골 사람들은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우물 안 개구리였다. 가끔씩 나라를 뒤 흔드는 큰 사건이 일어나도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마저 불편한 시절이라 한번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극히 적다보니 들어오고 나가는 소식도 한정되어 있었다. 나들이라 해봐야 시오리 길을 걸어 5일마다 돌아오는 장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동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 시절 5일장은 시골 사람들에게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온갖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그 잡다한 이야기들을 통해 바깥사람들의 세상살이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골 5일장이 서고 나면 저마다 장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아 동네마다 한 며칠간 이야깃거리가 푸짐했다.
이처럼 라디오가 없는 시골은 정보를 사람들의 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태풍이 오는지 폭우가 몰려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멀쩡한 하늘만 믿고 나락을 베어 놓았다가 밤새 비가 쏟아져 나락을 물에 담그기 일쑤였다. 강한 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아가고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야 그때서야 태풍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정보를 접할 수 없다 보니 자연재해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무장공비가 나타나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도시의 큰 시장에 불이나 잿더미가 됐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등 큼직큼직한 사건이 일어나 나라가 발칵 뒤집혀도 시골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딴 나라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코앞에 전염병이 돌아도 며칠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다.
면소재지에 라디오 갖추고 집집마다 유선 연결 그 시절 그나마 시골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뒤늦게라도 알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신문이었다. 4면인 신문은 한 면에 구독하는 사람이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그 사람들은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면사무소 직원 등 글깨나 배운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이 신문을 읽고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시골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세상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바깥소식에 목말랐던 시골에 틈새를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선 것이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이었다. 그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은 각종 생활 정보와 오락 등 크고 작은 동네 밖의 소식이 바로 전달되면서 주민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시골 안방에서 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일들을 서울사람들과 동시에 접할 수 있다는 상상도 못할 일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은 한마디로 고급 정보를 시골의 산간오지까지 유통시켜 농촌의 단단한 틀을 깨고 사람들을 깨우쳐 생활문화를 바꿔 놓았다. 멀기만 하던 도시와 농촌의 거리는 급격하게 좁혀졌다. 한마디로 농촌계몽에 일등 주역이었다.
이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은 민간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면소재지에 라디오 중계시설을 갖추고 동네마다 전선을 깔았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스피커를 달아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보리타작이 끝나고 나면 보리 두말,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나락 두말 정도를 받아갔다. 그 마저도 형편이 안돼 마을의 절반은 스피커를 설치 하지 않았다.
그 유선중계방송은 낮에는 뉴스시간에만 틀어 주었다. 저녁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오후 5시부터 12시까지 방송을 보내 주민들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었다. 일을 하다가도 뉴스시간이 되면 잠시 손을 멈추고 방안의 스피커에 바짝 붙었다. 살인사건 뉴스라도 나오는 날에는 이놈의 세상이 말세라고 대노해 해 혀를 끌끌 찼다. 저녁에는 온 식구들이 모여 스피커를 들으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그 당시 일일 연속극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누님들은 연속극을 듣기 위해 저녁 설거지를 서둘렀다. 연속극의 슬픈 장면에 온 식구들이 훌쩍거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스피커가 지지지 했다가 윙윙거렸다가 잡음이 심해 방송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속극에 거의 미치다시피 한 누님들은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예 스피커에 귀를 갖다댔다. 그래도 들리지 않으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잘 들리는 곳을 찾아 옆집으로 달려갔다.
그 당시에는 수시로 간첩이 나타났다는 뉴스였다. 무장공비가 침투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사람들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혹시 공비가 우리 동네 가까이 올까 온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시간 마다 방송되는 뉴스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무서워 밤 마실도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 열어 놓았던 삽짝도 해가 지기 바쁘게 닫았다. 잘 때는 방문 고리도 안에서 단단히 걸었다. 삽짝 문밖에서 인기척만 나도 혹시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간첩이 다 잡혔다는 뉴스가 나와야 두 다리 뻗고 잤다.
살인·강도 소식부터 연속극까지…''''만물 정보통'''' 담뱃값을 모르거나 담배를 사고 거스름돈을 받아가지 않는 사람, 아침에 일찍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낯선 말을 쓰는 사람, 차림새가 이상한 사람이 길을 물으면 즉시 신고하라는 방송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 조금만 낯선 사람이 얼른 거려도 신고가 돼 예비군들이 죽창을 들고 출동해 온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친척집에 다니러 왔다가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 청년들은 나선 사람을 붙들어 아리랑 한 갑 가격에서부터 특정한 지역 이름 등을 물어 신분을 확인하는 촌극도 심심찮게 있었다.
특히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은 농업의 환경도 바꾸었다. 농번기 때는 일기예보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뉴스 끝머리에 내일쯤 한차례 비가 내리겠다고 하면은 사람들은 논에 베어 놓은 보리 타작을 서둘렀다. 맑은 날씨가 계속되겠다면 곡식을 볕에 바짝 말려 거둬들였다. 방송의 일기예보에 따라 그날그날 일의 선후를 조정하였다. 동쪽과 서쪽 하늘만 쳐다보고 날씨를 짐작하며 일을 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그 시절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은 가입자들이 채널 선택권도 없었다. 뉴스를 틀든 노래를 틀든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사 직원들의 입맛대로였다. 가입자들도 보내 주는 대로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비바람에 선로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예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가 없는 날이 많았다. 방송을 듣지 않고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도 하루 뉴스를 못 듣자 갑자기 세상이 암흑천지 같았다. 사람들 마다 스피커가 안 되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갑갑해 못살겠다고 야단을 피웠다.
전화가 없는 시절이라 중계방송사도 방송이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 할 방법이 없었다. 가입자들도 연락을 할 방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소식을 못 들어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먼 길을 일부러 갈 수도 없고 돌아오는 장날만 기다렸다.
라디오 한대도 살 형편이 안 되던 시절 그 라디오 유선중계방송은 저녁만 되면 많은 사람들의 귀를 붙들어 맸을 뿐만 아니라 시골 사람들의 세상 밖 소식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정보통이었다. 그 라디오 유선중계방송도 70년대를 들어서면서 라디오가 보편화 돼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잘나가던 라디오도 70년대 말 전기가 시골구석까지 들어가면서 흑백텔레비전에 밀려 버렸다. 안방의 스피커에 울고 웃었던 시절도 까마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