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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걸으며 ''6월 항쟁''과 재회하다



여행/레저

    서울을 걸으며 ''6월 항쟁''과 재회하다

    [서울의 재발견] 6월 항쟁을 따라 걷는 서울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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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항쟁은 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발표 후 6월 10일을 정점으로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으며 이후 노동자 대투쟁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다.

    6월 항쟁은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대통령 간접선거를 고수하려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 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이 도화선이 됐으며,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전개됐다.

    수만의 경찰병력을 투입한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시위 기간 내내 차량행렬은 경적을 울려 시위에 호응했고 시민들은 박수로 격려했다. 대학생과 사무직 노동자 등 중산층이 대거 참여해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폭발시킨 6월 항쟁으로 인해, 결국 당시 집권세력은 <6·29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했다.

    우리 정치 사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87년 6월 항쟁, 그 역사가 지금 서울 도심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6월 항쟁의 현장인 서울 한복판을 걸으며 26년전 ''''6월 항쟁''''과 재회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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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항쟁의 도화선 - 남영동 대공분실

    1호선 남영역 동편.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 한강대로71길 37.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돼 있지만, 2005년 전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지금 남산 자락의 서울유스호스텔과 서울시청 별관, 교통방송,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변신한 당시 안기부 건물들처럼,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된 남영동 대공분실 역시 군부독재시절 누구든 은밀히 죽어나갈 수 있던 고문과 인권 탄압의 현장이었다.

    바로 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씨가 끌려온 지 3시간여 만에 물고문을 당하다 사망한다.

    그날 저녁, 대공수사단은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에게 쇼크사로 처리하고 화장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부검하라고 지시한다.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경찰 측으로부터 부검 감정서를 심장마비로 작성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의견을 끝까지 고수한다.

    1월 16일 오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심문 도중 갑자기 ''''억''''하고 죽었다는 허위 발표를 한다. 비슷한 시각, 벽제에서 화장된 박종철 군의 유골은 임진강에 뿌려진다. 그러나 진상을 목격한 이들의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해 박종철씨가 고문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1만 명에 가까운 각계 대표의 이름으로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가 발족하고, 2월 7일에는 추도대회가, 3월 3일에는 49재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남영동 대공분실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이렇듯 고문 추방과 민주화를 위한 시위를 낳았으나, 정권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호헌 선언에 나선다.

    그러나 4·13 호헌 발표는 엄청난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계층과 직업을 망라한 각계 단체에서 호헌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간다. 그럼에도 성명과 선언만으로 국민적인 투쟁을 끌어가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투쟁의 열기를 증폭시키는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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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항쟁의 기폭제 - 명동성당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민주화 투쟁은 4·13 호헌 조치 이후 다소 소극적이고 분산적인 개헌운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전 국민적인 투쟁의 국면으로 바꿔놓는 결정적인 돌파구가 바로 5월 18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성명이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를 맡고 있던 김승훈 신부는 모두 10항으로 이뤄진 장문의 성명을 발표한다.

    고문치사의 주범 세 명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사건이 조작된 상세한 과정을 밝혔을 뿐 아니라, 사건 조작에 개입한 모든 사람의 엄중한 처벌과 나아가 전두환 정권의 개입과 도덕성까지 추궁한 강력한 시국 발언이었다. 이제 투쟁은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거센 기세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5월 18일 김승훈 신부의 ''''성명 발표''''로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명동성당은, 6월 10일부터 5일간의 ''''농성 투쟁''''을 통해 다시 한번 전 국민적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6월 10일 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던 시위대 중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쫓겨 모여들었는데, 그 수는 1천 명에 달했다. 5일 동안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옷과 침구는 고사하고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그 많은 인원이 5일 동안 농성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명동성당 사제단의 결의와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때문이었다.

    그 이전부터 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상계동 철거민들이 솥과 냄비를 내다 걸고 라면을 끓여 농성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으며, 성당 안쪽에 자리한 계성여고 학생들은 학급마다 걷은 도시락을 날라다주었고, 남대문 상인들은 옷을 보내주었다. 그 외에도 의약품과 먹을거리가 담긴 상자들이 연일 성당 담장을 넘어 들어와 산더미를 이루었다. 2천여만 원에 이르는 성금 또한 답지했다.

    성당 측은 농성자들에게 문화관을 개방해주었고, 50여명의 신부가 농성자들을 보호하기로 결의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11일 밤 농성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전원 연행하겠다고 안기부가 협박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앞장서겠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농성자들을 지켜냈고, 결국 마침내 법적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면서, 5일 동안의 농성투쟁은 자진 해산 결의를 통해 평화적으로 마무리된다.

    이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고 국민들 사이의 투쟁 연대의식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이후 6월 항쟁은 더욱 뜨거운 들불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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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항쟁 주도 조직의 탄생 - 향린교회

    6월 항쟁은 너나 할 것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전개됐지만, 그 시작에는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간 단체의 역할이 있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약칭 국본)다.

    1987년 5월 27일 국본 발기인 대회가 열린 장소가, 명동성당 앞 작은 골목 뒤에 있는 ''''향린교회''''다.

    향린교회에서 탄생한 범야권 연합조직인 국본은 발기선언을 통해 ''''민주화는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대세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고립 분산적으로 표시되어오던 호헌반대 민주화운동을 하나의 큰 물결로 결집시키고 국민 속으로 확산시켜나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라고 밝혔다''''

    그후 국본은 민주헌법 쟁취투쟁과 박종철 고문살인 조작 은폐 규탄투쟁을 결합시킨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6월 10일 개최하고, 6월 18일에는 <최루탄 추방의="" 날=""> 대회와 <6.26 국민평화대행진>까지 전국적인 반독재 국민항쟁을 조직하고 이끌어서 마침내 집권세력으로부터 ''''6.29'''' 선언을 받아냈다.

    6월 항쟁을 이끈 조직을 탄생시킨 향린교회는 1953년 5월 안병무, 홍창의 등 12명의 평신도들이 기존 교회들의 문제를 극복한 대안교회가 되겠다는 목표로 창립한 개혁적인 교회로서, "향기 나는 이웃"(香隣)이 되겠다는 의미에서 향린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독교 정신에 따른 활발한 사회 참여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민주적인 교회 운영 방식으로, 6월 항쟁에서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사회 진보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교회다.

    명동성당 건너편 작은 골목 뒤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명동성당,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더불어 6월 항쟁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중요한 뜻이 있는 장소이다. 6월 항쟁 20주년 기념 동판도 20년 전 국본 결성식이 향린교회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명동 향린교회 마당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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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항쟁의 시작 - 성공회 대성당

    6월 10일 오후 6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선포하는 애국가와 종소리가 덕수궁 옆 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에서 울려퍼졌다.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던 바로 이날, 봉쇄를 뚫고 성공회 대성당에 진입한 지도부는 지명대회 시간에 맞춰 종탑에 올라가 대통령 후보 지명 무효 선언을 외쳤다. 그리고 해방 후 42년 되는 해에 분단 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열자는 희망을 담아 42차례 종이 울렸고, 김성수 성공회 주교의 집전으로 4.13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가 집전됐다. 6월 항쟁의 본격 출발인 6.10 국민대회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날 국본 지도부가 경찰의 봉쇄를 뚫고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성공회 대성당이 미사 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지도부를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 것과 흰 손수건을 흔들어 줄 것을 지침으로 내렸고, 광화문과 서울 시청 일대에는 택시운전수들의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이로써, 6월 항쟁이 깃발을 올렸고 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는 전 국민적인 투쟁이 시작됐다.

    1922년 공사가 시작돼서 1996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호의 유서 깊은 이 성당은 그래서 지금도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성공회 대성당에는 지금 ''''6월 민주항쟁 진원지''''라는 기념비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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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항쟁의 절정 - 서울역 광장

    전국적으로 전개된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서울 25만여 명, 광주 20만, 인천 2만5천, 부산 5만, 대구 4만, 대전 5만, 마산 2만 등 전국적으로 1백여 만 명 이상이 참가한 6월 민주 대항쟁 중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경찰은 10만여 명의 시위 진압 병력을 곳곳에 배치하였으나 시위대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날 서울에서 벌어진 최대 투쟁지가 바로 서울역 광장과 그 부근이었다.

    2만여 명의 시위대들과 다탄두 최루탄(일명 ''''지랄탄")까지 동원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경찰들이 3시간 가까이 밀로 밀리는 대접전을 벌였다.

    이날의 시위에서 서울의 2,139명을 비롯, 전국적으로 총 3,467명이 연행되었으며 수십여 명의 사람이 경찰의 최루탄, 구타 등으로 중경상을 입었다.

    <6·26 국민평화대행진>은 국민의 힘이 최대한도로 분출된 투쟁의 장이었다. 정부여당이 호헌 철폐와 직선제 요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6·29 선언을 발표하도록 만든 투쟁 절정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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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항쟁의 대미 - 서울시청 앞 광장

    6.10 국민대회를 알리는 성공회 대성당의 종소리와 동시에, 시청 앞 일대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에 파묻혔다. 이와 함께 학생과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어깨를 걸고 목놓아 외쳤던 곳이 서울시청 광장, 지금의 서울광장이다.

    6월 항쟁 시작과 함께 도심 한복판에서 국민들의 분노를 표출시킨 시청 앞 광장은 6월 항쟁이 마무리된 7월에도 국민들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아 보여줬는데, 그것이 바로 이한열 열사 영결식이었다.

    이한열 열사는 6.10 국민대회 하루 전인 9일 출정식을 마치고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도중 직격탄으로 발사한 경찰의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뒤 7월 5일 사망했다. 그리고 7월 9일, 6월 항쟁의 대미를 상징하듯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수십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 즉 노제가 치러졌다.

    87년 6월 항쟁의 자취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서울 도심 속 역사의 무대들 중 대표적인 곳들을 짚어봤다.

    6월 항쟁의 현장을 걸으면서 그 시절의 감동과 재회하다가도, 26년이 지난 지금 도리어 퇴보하는 듯 보이는 정치 현실과 풀리지 않는 경제 민주화의 과제들로 한편 가슴 답답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답사 현장에서도 이런 문제의 편린들을 만나게 되는데, 시민 개방을 최소화하려는 듯 시민의 주말 및 휴일 방문을 금지한 구 남영동 대공분실, 더 이상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를 꺼려하는 명동성당, 이한열 열사의 노제가 열린지 20년이 지나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린 후로 그 후 지금까지 민주 여론의 광장, 소통의 광장의 기능을 상실한 오락 문화의 장만으로 축소, 전락해가고 있는 서울광장 등이 그 예다. [BestNocut_R]

    하지만, 잠시의 후퇴나 정체의 모습이 있는 듯 보일지라도, 역사는 여전히 발전의 방향으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믿고 있다. 바로 그 믿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바로 그 믿음을 되살리기 위한 6월 항쟁과의 재회, 지금 서울 도심 산책을 통해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혼자 떠나보는 것도 좋지만, 서울KYC에서 마련하는 두 개의 답사 ''8일 서울 민주 올레 답사와 15일 평화길라잡이 서울 답사'' 에 함께 하면서 안내를 받으며 같은 뜻을 지닌 이들과 발걸음 맞춰 걸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서울KYC 답사는 seoulkyc.or.kr과 02-2273-2276을 통해 참여 문의가 가능하다.

    서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분들은 twitter.com/js8530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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