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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 어때] '폭스파이어' 불안의 시대…타오르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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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영화 어때] '폭스파이어' 불안의 시대…타오르는 불꽃

    부조리한 세상 비뚤어진 질서에 맞선 소녀들 성장기…"갈등·반항의 역사에 주목"

     

    1950년대 미국의 동네 불량소녀와 쿠바의 혁명군 여전사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을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거장 로랑 캉테 감독의 영화 '폭스파이어'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둘이 한 덩어리로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건조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그 와중에 드러나는 것은 '팍스 아메리카나' '아메리칸 드림'으로 포장된 극단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절망과 체념, 그리고 희망이다.

    1955년 어느 늦은 밤 미국의 한 평범한 마을, 열다섯 살 여학생 렉스(레이븐 애덤슨)가 동급생 매디(케이티 코시니)를 찾아가 맥주를 홀짝이며 하소연한다. "할머니는 '왜 옳은 길을 놔두고 틀린 길로 가냐'면서 욕실청소, 설거지만 가르치려 해."

    그러한 렉스가 제안한다. "한 여자애가 곤경에 처하면 다른 애들이 돕는 거야." 자매애로 뭉친 비밀 그룹 폭스파이어는 그렇게 결성된다.
     
    폭스파이어 멤버들은 약하게 보이면 남자들이 함부로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살면서 권력 구조를 온몸으로 느껴 온 까닭이리라.
     
    멤버 리타(마들렌 비손)를 희롱한 또래 남자 무리는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다시 올 거야"라고 숙덕이고, 학교에서 문제를 못 푸는 그녀에게 남자 교사는 "매일 아침 화장할 시간에 공부나 좀 하라"고 비아냥댄다.

    매디의 경험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버리는 타자기를 달라는 그녀에게 돈을 요구하던 큰아버지는 급기야 부적절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남자들이 요구하던 여자의 삶을 이미 받아들여 버린 엄마들과 달리, 폭스파이어 멤버들은 자신들을 농락하는 남자들에게 차례차례 복수를 하며 세상의 질서에 맞선다.

    그들의 행동 범위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동물을 한낱 상품으로 여기는 가게 앞에서 불매운동을 벌이고, 화려한 상점이 몰려 있는 거리를 누비며 '돈=똥=죽음' 등의 낙서를 남겨 금권 사회를 조롱한다.
     
    이렇듯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소녀들의 행동은 갈수록 대담해지고, 결국 그녀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권력자들의 거센 반격을 부른다.
     

     

    영미권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의 이야기는 한치 앞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을 갖는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이 발붙인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을 낱낱이 파헤쳐 온 작가의 텍스트는 거장의 손을 통해 영화문법으로 옮겨지면서 소위 번영기라 불리는 1950년대의 세상이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치열했음을 오롯이 보여 준다.
     
    당시 소련과 체제 경쟁을 벌이던 미국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병적으로 배척하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었다.

    극중 폭스파이어의 정신적 지주인 늙은 신부는 1900년대 초반 수천 명이 운집한 사회당 집회 풍경을 떠올리다가도 "이젠 이런 얘기를 할 수 없다"고 한탄한다. 반면 렉스를 후원하는 부잣집 소녀의 아버지는 "빨갱이들은 암적인 존재"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극중 부랑아 신세로 전락한 늙은 사회주의자 신부와 화려한 의식주를 누리는 반공주의자 기업가의 상반된 삶은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통과했어야 할 길을 일러 준다. 체제에 순응한 이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깎아내리며 밟고 올라서야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열매가 주어졌던 것이다.
     
    늙은 신부가 내뱉던 "뜨겁게 행동하고 간절히 추구하라"는 유훈은 어리고 가난한 여자라는 이유로 소외당한 폭스파이어 멤버들에게는 세상에 맞설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모든 고통받는 자매들의 안식처를 만들고자 했던 폭스파이어의 순수한 꿈은 미국 사회라는 경직된 시스템 안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들은 괴물 같은 세상에서 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돼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 미국 플로리다에서 불과 160여 ㎞ 떨어진 섬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로 전 세계가 낭만적인 혁명을 꿈꾸게 됐다는 사실, 실제로 이후 68혁명 등으로 기존의 권위적인 체제가 일부 무너졌다는 점은 1950년대가 모순 가득한 세상이었음을 반증한다.
     
    로랑 캉테 감독은 "내가 관심 있는 미국은 자본주의 경제의 대성공을 이뤄낸 최강국이 아니라 계층간의 갈등, 시민운동, 파업, 평화주의와 반항의 역사를 가진 국가"라고 했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한쪽으로 밀려난 이들, 대세와 반대되는 인생을 선택한 이들을 보여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RELNEWS:right}

    영화 폭스파이어는 등장인물들의 옷차림이나 세트, 그 시절 유행한 노래 말고는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특별히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 시대 소녀들의 투쟁은 현재의 우리를 향한 외침"이라는 감독의 말은 극중 소녀들의 고통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22일 개봉, 상영 시간 143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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