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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토론] "우남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는?"



정치 일반

    [1:1토론] "우남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는?"

    연세대 류석춘 교수,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한 공 인정해야
    서울대 박태균 교수, 이승만 정권은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1년 10월 3일 (월)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연세대 류석춘 교수 vs 서울대 박태균 교수


    ▶정관용> 시사자키 2부 시작합니다. 오늘 2부와 3부, 모처럼 일대일 토론으로 준비했습니다. 지난 주 KBS가 시민단체나 노조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지요. 이 다큐멘터리가 균형잡혔느냐, 아니면 편향되었느냐를 두고 지금도 계속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에는 서울 장충동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열렸는데, 역시 갈등의 장이 된 바 있지요. 굴곡 많은 우리나라 현대사, 초대 대통령이었던 우남 이승만. 지지와 비판,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데요, 과연 이승만 전 대통령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 오늘 두 분의 전문가와 함께 토론 펼치겠습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이십니다.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 또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두 분과 함께 합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 어서 오십시오.

    ▷류석춘> 예, 반갑습니다, 류석춘입니다.

    ▶정관용>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어서 오십시오.

    ▷박태균> 예, 안녕하세요?

    ▶정관용> 두 분도 인사 좀 나누시고요.

    ▷류석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태균> 예,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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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용> 연대에 이승만 연구원이 있네요? 언제 생겼습니까?

    ▷류석춘> 예, 생긴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올해 봄부터, 3월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일반에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정관용> 금년 봄? 그러면 지금 초대 원장이시겠네요?

    ▷류석춘>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그럼 류석춘 교수가 만드신 거예요?

    ▷류석춘> 제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좀 그 전사가 복잡합니다. 15년 전쯤에 이승만 연구에 써달라고 건물을 희사하신 분이 있고, 또 이승만 대통령 문서를 보관하고 계시던 양 아드님, 이인수 박사께서 문서를 연세대학에 주셨고.

    ▶정관용> 기증했고?

    ▷류석춘> 또 삼성그룹에서 50억의 연구비를 주어서 그 세 개가 15년 전에 현대한국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출범을 했습니다. 그 세 개가 결합이 되어서 출범을 했는데, 그 사이에 이제 학교 안에 김대중 도서관이라는 전직 대통령 이름을 딴 도서관이 생기고 그 결과를 보고 원래 각종 자료와 자금을 제공하시던 분들이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도 이름을 붙여서 이승만 연구원으로 해달라고, 그런 요구사항이 있었습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럼 현대한국학연구소가 이름을 바꾼 거예요?

    ▷류석춘>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로 남아있고.

    ▶정관용> 아, 그런데 처음 현대한국학연구소가 만들어질 때에도 이승만 연구용으로 처음에 기부가 있었다, 이런 말씀이시지요?

    ▷류석춘> 이승만 연구에 집중해서 현대한국학 연구를 하는 그런 연구소였습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TV 다큐멘터리 지난 28, 29, 30일, 3일 동안 방송이 됐는데, 두 분 다 보셨지요?

    ▷류석춘> 예, 저도 100%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거의 다 봤습니다.

    ▷박태균> 예,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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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용> 지금 다큐멘터리 이후에 언론 보도를 보니까 어떤 언론은 뚜껑 열어보니 균형 잡힌 조명. 또 어떤 언론은 엉터리 사실에 해석도 멋대로. 막 이런 식으로 언론의 평가도 지금 엇갈리는데, 두 분은 어떻게 보셨어요? 박태균 교수?

    ▷박태균> 글쎄요, 뭐 일단은 전체적으로는 좀 균형 잡힌 시각을 보이려고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이제 인터뷰를 하신 분들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인 분들도 같이 인터뷰가 들어가 있고요, 또 내용 속에서도 공과 과가 들어가 있는 부분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전체적으로 보면서 느낀 것은 이 프로그램 방향이라는 게 보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걸 많이 느낀 게 시각적 효과와 음향효과라는 것들이 아주 뭐 그게 의도적으로 했는지, 안 했는지 제가 그거를 정확히 그분들의 의도를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볼 때는 특히 긍정적으로 이야기되는 부분에 있어서의 시각적, 음향적 효과와 부정적으로 이야기되는 부분들을 처리하는 부분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좀 보이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에서 좀 눈에 띄었고요, 제가 이제 현대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고증을 하거나 이런 부분에서 좀 틀린 부분들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걸 보면서 아, 이게 조금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내용에서의 화려함을 추구하다 보니까 실제적으로 고증하는 부분에서 잘못 고증된 부분들이 나타났구나.

    ▶정관용> 치밀하게 만들지 못했다?

    ▷박태균> 예, 그런 부분들이 좀 눈에 띄었습니다.

    ▶정관용> 류석춘 교수는 어떻게 보셨어요?

    ▷류석춘> 예, 저도 지금 박 교수님하고 비슷한 의견인데요, 아주 구체적인 것에서 뭔가 조금씩 잘못된 부분을.

    ▶정관용> 실수가 있었다?

    ▷류석춘> 제가 아는 것하고 안 맞는 부분이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전체적인 프로를 평가하면 공과 과를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공평하게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관용> 그런데 박태균 교수는 공평하게 다루려고 노력은 했지만 긍정적 부분에 시각과 음향효과가 훨씬 좋더라? 그렇게 보신 거고?

    ▷박태균> 예.

    ▷류석춘> 그런데 그건 본인의 느낌이시라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저는 최소한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대통령에게 그 정도 관심과 평가는 해드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런데 지금 지난 8월의 동상 제막에다가 이번 다큐멘터리. 한동안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가 갑자기 이렇게 논란이 계속 불거지고 이어지는 그런 이유와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류석춘> 저는 최근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좀 부정하는 분들이 많이 등장해서 여러 가지 흔드는 작업을 보고, 대한민국을 흔드는 작업을 보고, 아,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된다, 라는 큰 틀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나타난 국가로서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번영하고 번성하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만 하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문제제기를 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박 교수는 어떻게 보세요?

    ▷박태균> 글쎄요, 저는 뭐 최근의 일은 아닌 것 같고요, 조금 시간이 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80년대에 민주화운동과 함께 민주화가 되면서 수정주의적인 역사 인식들이 상당히 퍼지게 되었고요. 그걸 통해서 이제 이전에 가려져 있었고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부분들을 파헤치는 작업이 쭉 이루어지고, 이런 과정 속에서 이제 민주화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저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 또 이거에 대한 부분들이 93년에 문민정부가 출범을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의 역사적 화해, 라는 어떤 그런 화두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라는 이러한 부분들과 맞물려서 진행이 된 부분들이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요. 본격화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근현대사 교과서가 너무 한국 근현대사를 부정적으로만 묘사를 했다, 라는 측면이 지적이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보자, 이렇게 하면서 시작된, 저는 상당히 기간이 된 작업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류석춘> 저도 같은 맥락에서 그걸 저는 그냥 최근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민주화 이후에 여러 가지 재평가 작업과 그 재평가 작업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다, 상대적으로 저는 그걸 최근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굉장히 오래된 걸로.

    ▶정관용> 그러니까 학계 연구라든가 또 연구적 차원에서의 재조명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꽤 시간이 됐습니다만,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아까 류석춘 교수가 지적하신 것처럼 뭐 보수적 색깔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교과서 내용도 좀 다시 보자, 이승만 대통령 동상도 만들어야 되고 재조명하자, 뭐 이런 것과 함께 논란이 됐다. 이건 뭐 동의하실 수 있는 거지요?

    ▷박태균> 그렇지요. 그런데 이제 2000년대 초중반에 이미 한 보수 언론사에서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전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작업을 통해서 이미 시작이 됐던 작업이기 때문에 이게 뭐 그렇게, 요즘 와서 꼭 그렇게 문제가 됐다, 라기보다는 저는 굉장히 좀 오랫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역사적 시각이 요즘에 적극적으로 표출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 시각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박 교수님 말씀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박태균> 저는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지점은 이제 1945년에 한국이 해방이 되고, 그리고 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그 과정에서의 부분들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제일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것 같고요.

    ▶정관용> 해방 3년사?

    ▷박태균> 예, 해방 3년사와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이런 과정들을 어떻게 보느냐, 라는 부분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이 수정주의적 역사학의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대체로 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것이 한국에서의 국민국가가 완전하게 수립된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그것이 분단국가였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의 관점에 기초해서 봤을 때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한국의 민족사적 입장에서 봤을 때에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완전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 라는 관점이 있는 것 같고요. 이제 그 반대편에서는 이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것 자체가 갖는 어떤 자유민주주의, 라는 틀을 지켜냈다. 특히 시장경제라는 측면에서 그런 부분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좀 생각하는 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독재정권에서 민주화가 되면서 독재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쭉 진행이 되어 왔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1990년을 전후해서 사회주의권이 몰락을 하고.

    ▶정관용> 그렇지요.

    ▷박태균> 특히 동구하고 소련이 그랬고요. 또 북한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몰락을 하게 되면서 아, 그렇다면 이 자유민주주의적인 시장체제만이라도 지켜낸 것이 큰 공이 아니냐, 라는 시각들이 이제 그것을 근거로 해서 등장을 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것 이전에는 사실은 이 부분들을 분단정부라는 부분들에 대해서, 분단 정부 수립에 대해서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마련하기 참 어려웠던 측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논쟁이 시작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 류 교수님?

    ▷류석춘> 지금 박 교수님 말씀하신 데에 전반적인 것은 동의를 하지만, 조금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서 보면 90년대, 89년, 90년 시작하면서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것들이 이제 남한에 그나마 단독정부라도 세운 게 잘한 것 아니냐는 정도로 약간 낮춰 잡으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지 않고, 45년 그 당시에, 혹은 48년 그 당시에 사실은 한반도가 뭐 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공산정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그런 상황인데도 그런 어려움을 뚫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가능한 지역이라도 만든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였고, 그것이 세월이 가서 사실은 그때만 해도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이 맞을지, 틀릴지를 몰랐는데 89년이 되고 나니까 사회주의 체제라는 것은 이게 뭔가 좀 문제가 심각하다, 라는 것을 전 세계가 다 알게 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아, 이승만 대통령이 그나마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 거구나, 라는 그런. 그러니까 45년에도 큰 일을 하신 거고, 89년 기준에서 봐도 다시 그게 재평가 할만 하고, 저는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박태균> 그런데 실상 민주화가 되면서 이제 이전의 독재정부들의 어떤 평가에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들이 나왔을 때,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본다면, 제가 보기에는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정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사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부정적인 평가들이 쭉 있었는데, 그럼 그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냐, 라는 이야기들이 나오지가 않다가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권이 실패를 하고, 북한도 거의 몰락하는 상태, 붕괴 직전까지 가게 되는, 이런 상황이 오게 되니까 사실은 그런 논리들이 나타나게 됐다, 라는 게 이제 제가 보기에는 그런 부분들이고.

    ▶정관용> 그런 배경 설명에 류석춘 교수가 뭐 부정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45년, 48년, 그 당시의 관점에서도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뭐 이것 이후가 아니라, 그 당시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제 그런 가치를 두고 계시거든요. 그 점은 어떻게 보세요?

    ▷박태균> 저도 기본적으로는 어떤 민주주의적 권리라든가 이거를 지켜내는 부분들이 있었다, 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그 당시에, 지금 시점이 아니고요, 그 당시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자유민주주의적인 가치를 지켜내는 그런 국가였는가. 실제 이승만 정부의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시스템이라든가 또 그것이 전쟁을 거친 이후에, 50년대의 시스템들을 봤을 때 과연 그러한 가치들이 그 안에 녹아있었는가. 저는 이게 정통성 문제로 연결된다고 한다고 하더라도요, 정통성이라는 것은 정부가 수립될 때 정통성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요, 정부 수립 이후에 그 이후 과정들을 다 거쳐서 정통성이 만들어진다, 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어떤 자유주의적, 또 민주주의적 이런 질서와 또 경제성장이라는, 그러한 성과라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지금까지의 아주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이룩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정통성이 만들어졌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저는 굉장히 전근대적인 방식이다, 라는 생각이 들고.

    ▶정관용> 그리고 이승만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았다?

    ▷박태균> 예,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류석춘> 저는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서 국가가 만들어지고 나서 그 이후에 정통성이, 이제 그 국가가 만들어질 때는 정통성의 문제를 평가할 수 없다, 라고까지는 이야기하시지 않으셨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 이후의 과정이 정통성을 만드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국가, 어떤 특정한 국가가 생기고, 어떤 기초에서 생겼느냐,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또 그리고 박 교수님 말씀대로 그 이후에는 또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과정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어떤 국가로 출발했느냐, 하는 문제를 따지지 않는다면 저는 너무 이상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관용> 그런데 또 박 교수가 지적한 자유민주주의로 표방은 됐으나 실제 이승만 체제가 그렇게 움직였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류석춘> 그거는 부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100% 기능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을 하지만, 저희가, 저희 대한민국 역사를 쭉 한반도에 존재했던 그 과거하고 한번 이렇게 연속선상에서 평가를 해보면, 저희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현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기회가 없었지요. 조선시대는 왕조 국가였고, 그 이후에는 식민지 시기를 거쳤고, 그 이후에 처음으로, 지금 박 교수님께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만, 저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기초로 하는 헌법을 만들어서 그 헌법에 기초해서 우리가 이런 나라를 운영해보자, 라고 만든, 그 시도 자체가 저는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식민지 사회에서 태어난 나라 중에 많은 국가들이 공산화에 적극적인 선택을 하거나 아니면 소련의 공산화 관리, 정책에 따라서 공산화되어버리거든요.

    ▶정관용> 그렇지요.

    ▷류석춘> 그런데 그거를 이제 우리 남한에서는 막아내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시장경제 국가를 건설했으니까, 굉장히 잘, 탁월한 선택이고, 그 어려운 것을 뚫고 이제 국가를 건설하고 이제 그런 이상에 따라서 국가를 운영하다보니까, 상황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지금 말씀하신 대로 100%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를 운영하지 못한 경우가 없지 않아 있었고, 그런 것들이 일정한 부분 비난받을 부분은 비판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런 국가를 건설한 것이 굉장히 중요한 출발선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정관용>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가는 것을 차단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의미다?

    ▷류석춘> 아, 대단한 의미지요.

    ▶정관용>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박태균> 내용적으로 본다면, 저도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저는 두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하나는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그걸 이승만 대통령의 공이라기보다는 미국과 미군정의 공으로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미국과 미군정이 철저하게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어렵지 않았을까. 물론 그 과정에서 그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고 만든 분들의 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니지만, 45년에서 48년까지의 과정들을 본다면 그런 부분들이 있고요. 또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을 본다면, 사실 저한테는 제가 제일 이 연구를 하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산정치파동 때 학계에서는 알려져 있기는 합니다만, 유엔군 사령관이라든가 미국의 일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그런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유엔이 여러 나라들을 모아서 유엔군을 만들어가지고 자유주의적인, 또 민주주의적인 대한민국을 지키겠다, 라고 왔는데, 실제 와서 보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그렇지 않다, 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자기들이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왜 지키러 왔느냐, 라는 의미에서, 이 부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그런 어떤 명분을 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이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 라는 것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그런 계획들이 나올 정도의 이런 어떤 무리한 무리수가 두어졌다면, 제가 보기에는.

    ▶정관용> 그때 부산에서 발췌개헌 할 때였던 가요?

    ▷박태균> 예, 발췌개헌 할 때였습니다.

    ▶정관용> 그래서 재선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가요?

    ▷박태균> 아니요, 그건 이제 직접선거. 원래는 국회에서 선거하던 것을 이제 국민들이 직접선거하도록 바꾼 것인데, 뭐 그뿐만 아니라 이제 60년에 4.19혁명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니까 저는 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시점에서, 사실 제헌헌법도 자유민주주의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어떤 사회민주주의라든가 공개념적인 그런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내용들이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그리고 이 4.19혁명이라든가 이런 어떤 민주화운동, 민주주의를 위한 그런 노력의 과정 속에서 결국 오늘날에 있어서의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초반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저는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다 조금 더 방점을 두고 싶은 겁니다.

    ▶정관용> 계속 그걸 강조하고 계시고. 미국과 미군정의 공이다, 오히려? 이승만의 공이라기보다는?

    ▷류석춘> 저는 미국과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라는 것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미국이 이제 2차대전에 일본을 패망시키고 남한을 점령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됐고, 그리고 나서 미국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 소련과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기능을 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 부분은 별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 초반의, 미군정 초반의 어떤 상황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나타났던 것이 현실적으로 좌우합작 노선을 미군정이 추진해서 그런 방향으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하면은 결국은 적화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좌우합작 노선에 비협조적이거나 저항하거나 하다가 이제 결국 소련의 팽창이라는 것을 트루만 대통령이 이거를 우리가 막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는 미국의 정책 노선이 바뀌면서 이승만을 선택하게 되지요. 미군정이 처음부터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나라가 미국의 꼭두각시로 세워진 나라다, 라고 보는 것은 너무 미군정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남한에 있는 여러 가지 그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노력을 폄하시키는 말씀이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관용> 박 교수님?

    ▷박태균> 아, 제가 꼭두각시라고 말씀드린 적은 없고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거를 위해서 노력하신 분들의 노력을 제가 부정하는 건 아닌데, 과연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이었느냐. 그런데 사실 그 부분은요, 제가 어떻게 보면,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 부분을 굉장히 잘 찍어줬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초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들어왔을 때에는 미국 쪽에서 전폭적으로 지지를 하다가 46년에 들어가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생기고 하면서부터는 사실 이승만하고 결별을 한다는 말이지요. 그랬다가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 방미외교를 하는 시점에서 트루만 독트린이 나왔고.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그러면 이승만 쪽으로 가야 되겠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보면요,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도 미국의 지지를 얻지 않았으면 사실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역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필요조건이냐, 충분조건이냐, 라는 부분에서는 저희가 조금 깊이 따져봐야 되겠지만, 그 부분에서의 어떤 미국과 미군정의 역할을 저는 결정적이라고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요. 그건 뭐 저는 KBS 다큐멘터리에서도 명확히 잘 보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정관용> 류 교수님, 바로 받아주시지요.

    ▷류석춘> 아니, 그러니까 미국의 선택이 이승만이 아닌 경우, 심지어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제거하는 에버레디 플랜이라는 것까지도 미국이 세우거든요.

    ▶정관용> 52년 그 당시지요?

    ▷류석춘> 예, 그건 조금 나중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그렇게 보면 미국의, 결과적으로 89년을 거치고,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국의 선택이 분명히 옳았다, 혹은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 사회주의가 잘못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이미 세상이 다 그런 평가를 하고 있으니까. 그 당시에만 해도 사실 사회주의가 좋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정관용> 그랬었지요.

    ▷류석춘> 공산정권이 들어오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또 이것은 아니다, 이건 인간 본성에 안 맞는 거니까, 자유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관되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고, 아까 말씀하신 헌법은 공산주의적 요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아 조금씩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완해서 이런 국가를 건설해야 되겠다. 대한민국 같은 국가를 건설해야 되겠다, 라는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고, 자신의 의지와 국제 정세가 안 맞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좀 몸을 조금 낮추기도 하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쓰거든요. 그런 게 저는 오히려 돋보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라고 보지요. 그러니까 만약에 국제 정세가 안 맞으니까 나는 그냥 내 신념을 포기하고, 그냥 이 국제 정세가 허용하는 이 판에서 좌우합작으로 가겠다, 라고 했다면 지금 제가 평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겠지요, 저한테. 오히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그 신념이 그리고 세월이 가서 보니까 모든 세상 사람이 아, 그건 잘된 선택을 따르는 신념이었구나, 하는 그런 게 저는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듣고 계십니다만, 해방 3년의 그 공간, 주로 그 공간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서 건국에 이르게 한, 그런 대통령으로서의 공을 새롭게 조명하고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라고 하는 그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해서 건국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미완의 건국으로 봐야 할 것이고, 또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실제 그렇게 운영하지도 못했다고 하는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을 그렇게까지 높게 볼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지금 맞서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서울지역 전화 2061-8585/8586/8587로 계속 의견 보내주시고요, 잠시 뉴스 들으시고 3부에 토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정관용> 시사자키 3부, 2부에 이어서 이승만 전 대통령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 이어가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전화와 문자로 참여하고 계신데, 전화 한 두통 연결해볼까요. 우선 첫 번째 전화입니다. 여보세요? 어디의 누구십니까?

    ▷청취자 1> 예, 동작구 사당동에 사는 60대 청취자입니다.

    ▶정관용> 고맙습니다. 어떤 의견이세요? 이승만 전 대통령, 어떻게 보세요?

    ▷청취자 1> 아니, 제가 4.19세대인데요, 고등학교 때. 그런데 그때는 젊었을 때는 우리가 그 부분을, 독재했다는 그 부분만 부각이 되어서 인정을 안 했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보니까 그 이승만 대통령이 그 기초를 다졌고, 잘못된 부분은 또 과가 있지요. 그런데 그 몫을, 그걸 인정을 안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역사는 사실은 그 공과 과가 다 같이 우리가 알아야 될 것 아니에요?

    ▶정관용> 평가해야지요.

    ▷청취자 1> 예, 그렇게 교육을 시켜야 되는데, 전부 과만 (인정을 하고), (공은) 인정을 안 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정관용> 독재자로만 봤지만,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청취자 1> 예, 그럼요. 기초를 닦았고, 그리고 솔직한 소리로 그 3년이라는 큰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그 누가 하면 어떻게 더 잘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관용> 고맙습니다.

    ▷청취자 1> 예.

    ▶정관용> 다음 전화입니다. 여보세요? 자기소개 좀 해주시고요.

    ▷청취자 2> 여기는요, 제주도인데요. 제가 간단히 묻고 싶은 건요, 이승만 전 대통령 역사적 평가에 앞서서 내가 연세대학교 교수님한테 하나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4.3이라는 걸 내용을 알고 계실 건데요, 일본에서 해방되어가지고 한국에 와가지고 딱 1년 만에 한 가족이 다 몰살되어 버렸거든요. 왜냐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아니고 다른 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제주도에는 4.3이 안 일어났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 처갓집이 억울하게, 너무나, 스물 두 살 먹은 처자가 뭘 잘못했다고 군법회의에서 총살시키고, 또 우리 집사람은 유복자인데, 친정아버지는 대구교도소에서 재판받으러 갔다가 6.25터지는 바람에 행불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런 역사를 재평가하기 이전에는요, 4.3연구단체, 제주도민 및 4.3가족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그 원인을 풀고 그 역사를 재정비해야 합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청취자 2> 하고 싶은 말은 아주 한이 없어요, 한이 없어요.

    ▶정관용> 예, 바로 이런 한을 먼저 풀고 거기에 대한 평가와 반성한 후에 재평가하더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의견이신데, 류 교수님, 바로 좀 말씀 주시지요.

    ▷류석춘> 예, 제주도의 4.3사건 때문에 많은, 사실 실제 무고한 분들이 많이 희생당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희생당한 분들에게는 저도 뭔가 좀 보상과 명예회복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4.3사건이라는 것의 본질이라고 할까요, 핵심은 당시 준비되고 있던 제헌국회를 만들기 위한 5.10선거, 48년 5월 10일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일이 벌어진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그 건설을 하지 말자, 그렇게 하면 곤란하다는 세력과 그걸 해야 된다는 세력 사이에 어떤 갈등과 그 갈등이 빚어낸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5.10선거의 중요성을 우리가 강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5.10선거라는 게 이제 건국헌법을 만드는 제헌국회의원들을 탄생시킨 건데, 그 선거에 일부 남한의 정치세력이, 특히 좌파세력이 이제 비토를 하지요. 불참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선거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고, 그런 사건들이 집약되어서 제주도에서 4.3사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양민이 많이 희생된 그런 사건이 있어서 굉장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런데 이분이 표현하실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4.3은 안 일어났다,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류석춘> 저도 그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그 당시에 예를 들면 김구 선생 같은 분이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입장이었는데, 저는 그 당시 국제정세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남북협상론이 과연 가능했을까. 남한이 북한식 체제를 따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남북협상은 어차피 불가능한 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노선을 대표하는 분이 이승만 대통령이라 아마 전화 주신 분이.

    ▶정관용> 그래서 그렇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류석춘> 예, 그런 말씀을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관용> 박태균 교수, 이 부분 잠깐 코멘트하시고?

    ▷박태균> 글쎄요,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전화하신 분의 의도를 제가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4.3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실은 4.3사건이 그렇게까지 크게 번지지 않았어도 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47년에 3.1절 시위 때도 그랬고요. 이게 5.10반대 선거 때도 류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시작은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크게 번지지도 않았었고, 사실 그 부분에 있어서 처음에 토벌대하고 반대하는 세력 간에 협상까지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게 갑자기 강경한 진압으로 바뀌게 되면서부터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측면에서, 제가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의 한계, 라고 말씀드린 것이 어떤 정말 저희가 자유민주주의적이다, 또는 자유주의적이다, 민주주의적이다, 라고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적 가치는 저는 인권에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 어떤 인권적인 가치, 시장적인 가치와 함께 인권적인 가치라는 것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부분들이 결국은 4.3이라는 것이 그렇게 비극으로 가게 되는, 그런 중요한 어떤 역할을 했던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관용> 더 나아가서 박태균 교수, 아까 건국, 그리고 특히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라고 하는 평가에 대해서 그러나 그것은 반쪽짜리였다, 또 실제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를 운영하지도 못했다, 또 어떤 문제를 제기하실 수 있는지?

    ▷박태균> 저는 기본적으로는 일단 아까 질문하신 분의 의견에 전체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박사논문을 쓴 것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썼는데, 그걸 쓸 때에도 기본적으로 56년부터 이승만 정부 시기의 부흥부가 생기고 그 밑에 산업경제위원회라는 게 생겨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라는 것이 그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모태가 되기 때문에 그런 노력까지도 제가 다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승만 정부가 했던 그러한 부분들이 저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오히려 위협했다, 라고까지도 저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을 미국의 문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문제가 있다, 라고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미국에서 59년, 60년에 가면서 아, 이제 더 이상 이승만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되겠다, 라고 판단했던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가 아, 이러다가 한국에서 어떤 좌익에 의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라고 하는 정도의 굉장히 심각한 정도까지 생각을 했다, 라는 거지요.

    ▶정관용> 독재를 했기 때문에?

    ▷박태균> 예, 그렇지요.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마치 뭐 그게 사회주의로 간 것은 아니지만, 이란 같은 경우에 독재의 끝이 결국은 호메이니로 가고, 그것이 오늘날에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대한민국이 그런 어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원칙을 제대로 못 지킬 경우에 잘못하면 이게 사회주의로 가는 게 아니냐, 라는, 그런 위협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라는 것을 봤을 때는 사실 그 과정 속에서 노력을 했던, 민주주의 발전과 산업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들의 것들을 많이 인정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을 하고 나서 했던 부분은 인정을 하더라도 그 과에 대한 부분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정관용> 독재를 함으로 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오히려 위협했을 수도 있는? 그렇게 평가될 수도 있다?

    ▷박태균> 그렇지요.

    ▶정관용> 류 교수님, 어떻게 보세요?

    ▷류석춘> 아니, 지금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씀에는 저도 100% 동의하는데, 이제 인권 문제를, 그러면 민주주의를 갓 시작한, 48년에 출범한 대한민국이 지금 우리가 세계 10대 강국이다, 15대 강국이다, 하는 반열에 올라서서 생각할 수 있는 인권 문제와 48년 국민소득이 뭐 50불, 100불 하는 그 상황에서 인권 문제의 수준은 사실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아까 말씀하신 그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출발점이 무엇을 지향하는 국가였고,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보면 굉장히 너무 높은 가치로 그런 것을 평가하시지 않나, 오늘날의 가치로,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고요. 다른 한편으로 실제 이 좌파, 우파의 대결. 당시에서. 그게 그냥 의회에서, 혹은 언론에서 대립하는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사실 4.3사건, 혹은 그 사건의 배후에 있는 5.10선거에 참여하느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이 결국은 50년 6월 25일날 6.25전쟁으로, 열전으로 진행하거든요. 그 열전이 이제 해방 공간에 완전히 이렇게 숨어있는 것 아닙니까? 그 숨어있는 과정에서 그 남한 내부의, 특히 이제 북한 쪽에는 우리가 어떤 지렛대가 없어서 북한을 어떻게 남한 체제와 같은 것으로 바꾸자, 라는 논의는 전혀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치적 세력이, 공산당을 포함해서 다 존재했고. 그 서로 다른 노선들이 다 자기가 주장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 절차적으로 지금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다 진행이 되었느냐, 하면 실제 아니거든요. 가장 대표적인 게, 공산당이 미군정에 의해서 불법화된 것이 정판사 사건이라고 해서 위조지폐를 찍어냅니다. 그걸로 활동 자금으로 쓰려고. 그런 불법 활동을 보면서 미군이 공산당을 불법화해서 지하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런 사건을 보면 그 위조지폐를 찍고, 그 다음에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니 온갖 그 당시에 좌파들과의 대립, 대구폭동, 이런 것들이 연결이 쭉 되는 사건들인데, 그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의회 민주주의적인 기준, 또는 언론의 자유 기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게 50년까지 계속되다가 결국은 전쟁으로 가거든요. 이제 그런 부분을 우리가 좀.

    이승만 별장

     

    ▶정관용> 그런 좌파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좀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 말씀이신 건가요?

    ▷류석춘> 그렇지요. 그러니까 100%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맞지 못하게 되는 그런 부분이 그런 상황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 박 교수님?

    ▷박태균> 저는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서라도 한 사람의 인권이라도 저는 더 소중하게 다루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래야만 이 정부가 내가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는 거고, 그럴 때만 그 정부가 가치가 있는. 그러니까 한 사람이라도. 그러니까 이승만 정부가 위기가 됐을 때에 보면은, 그 위기가 다 인권 문제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4.3도 그랬고요, 여순 말씀하셨는데, 여순 때는 또 엉뚱하게 여순 사건에 김구 선생의 한독당이 개입이 됐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 소문이 퍼지고, 이게 나중에 49년에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암살할 때 법정에서 김구 선생이 여순 사건에 개입된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는. 그러니까 여순 사건에서 엄청난 인권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또 52년에 아까 말씀드렸던 부산 정치파동도 결국은 거창 양민학살 사건하고 연결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인권이라는 것이 문제가 됐을 때에는 사실은 정말 국민 개개인 하나하나가 지키고 싶은 나라를 만들 수가 없게 되는 거고, 저는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그 체제를 위협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류석춘> 아니, 뭐 인권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라는 그 원칙에 제가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국가 자체가 존립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안보 위협이 있다면, 국가가 더 중요하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이 중요하냐, 아주 큰 어려운, 그것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사실 쉬운 선택이 아니고, 또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보면 월남이 패망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국가가 없어지면 인권이고 뭐고 지킬 방법이 없게 되는 이제 그런 어려움도 있어서 그런 게 아까 말씀하신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그런 것에 있어서 100% 자유민주주의적인 그런 지향하는 원칙에 충실했느냐, 하는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고 저도 생각하는 거지요.

    ▷박태균> 저는 그게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사실은 4.3도 그렇고요, 여순도 그렇고 51년 거창 양민학살도 그렇고, 4.19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을 때 문제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이 네 가지 사건이 다 무고한 양민들이 죽었기 때문에 이분들의 명예회복에 대한 부분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것이 그 시기만 위협한 게 아니고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로 하여금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관용> 박태균 교수는 그러한 양민들이 학살당한 네 번의 사건들 속에 정치적 배경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의 자기 권력 강화라고 하는 것이 깔려있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박태균> 네 번의 사건 중에서 일단 4.3하고 여순사건은 그걸 직접적으로 연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탄압 과정에서의 문제는 있을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강화와 직접 관련이 있다, 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고요. 부산 정치파동하고 4.19혁명은 분명한 관련이 있습니다.

    ▶정관용> 관련이 있다고 본다? 류 교수님?

    ▷류석춘> 국가 전체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섰던 게 6.25전쟁이지 않습니까? 그 6.25전쟁 과정에도 또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 앞뒤로 굉장히 치열한 정치적 선택, 갈등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피해 받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이 피해 받은 사실이 있다고 인정을 하지만, 동시에 그분들이 피해 받지 않도록 하느라고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상황은 우리가 피해야 되지 않습니까?

    ▷박태균> 그런데 저는 거기에 조금 제가 찬성할 수 없는 게요, 예컨대 4.19혁명 시기에 학생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국가가 무너졌는가. 또 거창에서 공비토벌 하는 과정에서 거창의 양민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6.25전쟁에서 우리가, 대한민국이 없어졌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류석춘> 저는 생각이 다른데요, 6.25전쟁이라는 것은 실제 우리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북쪽에서 소련과 다 계획을 다 세워서 남한을 먹으려고 밀고 내려왔지 않습니까? 그거를 우리가 잘 막았어야 되는 거고, 그걸 막는 과정에서 일정한 희생을 감수해야지요, 우리가.

    ▷박태균> 아니요, 그건 막는 과정이 아니고요, 거창양민학살사건은, 분명히 그 지역은 후방 지역이고요.

    ▷류석춘> 아니, 거창이 후방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닌데.

    ▷박태균> 거기에 이제 빨치산 게릴라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기 계신 분들은 그 당시에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공, 이래가지고 오히려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이었고, 또 부산 정치파동만 하더라도 부산이 그 당시에 정치파동으로 계엄령이 내려질 이유가 없는 지역이에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고.

    ▷류석춘> 저는 사실 이승만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전쟁 중에 선거를 여러 번 치렀습니다.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도, 주기적인 선거를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시행하셨거든요. 그런 걸 보면 이분이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를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하는. 사실은 전쟁 중에도 그런 걸 좀 유예해도 우리가 전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정관용> 선거를 계속 해야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를 지킬 수 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요?

    ▷류석춘> 그런 면에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신 분으로, 지금 기준에서 100% 만족은 못하지만 그 당시 조건에서는 굉장히 애를 쓴 것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지요.

    ▷박태균> 아니, 그러니까 제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저는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관용> 좋습니다. 박태균 교수, 류석춘 교수 모두 공과 과, 같이 보자, 라고 말씀하시는데, 박 교수는 아무래도 과 쪽의 말씀을 많이 하고 계시고, 류 교수께서는 공 쪽의 말씀을 많이 하고 계시고. 아까 2부에서는 45년부터 48년. 우리의 정부 수립, 뭐 건국이라고 부르시는 분도 있고, 여러 가지, 우선 그 이름부터가 좀 논란거리가 되긴 합니다만, 그 과정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다면 지금 3부에서는 집권 기간 동안의 운영을 어떤 시각에서 볼 것인가에 대한 그런 논의로 좀 이어져 봤습니다. 시간 많이 흘렀고, 지금 핵심적으로 짚어야 될 것들은 대충 짚은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동상 건립, 그 다음에 특히 공영방송 KBS에서의 다큐멘터리 방송, 이것에 대해서 일부 세력들은 그런 것 하지 말아라, 동상도 세우지 말아라, 라고 하는 어떤 반대 시위도 하고 그런단 말이지요. 그 점은 어떻게 보시는지, 그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을 평가하거나 이럴 때는 우리가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가, 그런 말씀들로 한 말씀씩 좀 듣고 마무리를 지어보면 어떨까 싶어요. 유 교수님, 먼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류석춘>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라를 세우고 나서 한 일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이 농지개혁을 성공시킨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지개혁에 대해서 그동안은 뭐 이게 했지만, 전혀 성과가 없는 거다, 라는 견해가 없지 않아 있었던 적도 있는데, 요새 제가 알기로는 전체적인 평가가, 사료를 잘 정리해서 분석한 논문들을 보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그 당시에 독립한 나라들 중에서는 이만큼 잘한 농지개혁이 없다, 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데, 이 농지개혁의 개혁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누구였을까를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은요, 일제시대 때 돈을 많이 번 지주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 청산에 미온적이었다, 라는 평가를 친일 반민특위 활동하고 연관 지으면서 실제 인적 청산이 좀 미온적,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관용> 농지개혁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류석춘> 농지개혁이라는 것은 인적 청산은 아니지만, 그 당시 경제적 상층 계급인, 친일적인 모습을 가졌을 지주들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사람들의 물적 기반을 허무는 작업을 이승만 대통령이 했고, 그것이 6.25전쟁 때에도 우리 국민들이 남한의 편에서 북한에 대항해서 싸우고. 그 이후에 또 박정희 시대의 어떤 경제적 발전에 굉장히 큰 인프라를 깔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그 부분을 좀 다시 재조명했으면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관용> 좀 부각시켜서 평가해야 된다? 동시에 아까 동상 건립, 및 방송 등등에 대한 반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신지? 짧게만 한 말씀 하시고.

    ▷류석춘> 그런 부분은 지금 말씀드린 여러 가지, 입체적으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를 우리가 재평가하면은 아, 이 대통령을 우리가 어느 정도 기념해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결론을 저는 얻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정관용> 박 교수님, 어떻게 보세요?

    ▷박태균> 기본적으로 동상을 세운다, 라는 것은 저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 사회와 같이 지금 여러 가지 이념 대립이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는 굉장히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동상을 세우는 것은 오히려, 아마 어쩌면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하늘에서 그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글을 쓰면서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요, 하늘에서 보면서 오히려 본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니들은 내 맘 몰라, 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지금 저희가 이념 과잉 상태에서 명백한 어떤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이념적, 정치적으로 자꾸 평가를 하다보니까 오히려 저는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하면서 사실관계를 가지고 토론해나가야지, 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 먼저 하는 것, 저는 이것을 좀 지양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류 교수님도 이 대목에는 동의하실 것 같아요.

    ▷류석춘> 그렇습니다.

    ▶정관용> 학문적, 또 사실관계 연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

    ▷류석춘> 물론입니다.

    ▶정관용> 좋습니다. 류석춘 교수, 박태균 교수, 나름의 평가를 가지고 계십니다만, 연구부터 조금 더 하자, 라고 하는 데에 같이 동의하신다면, 사실 이런 분들이 힘을 합쳐서 조금 더 연구를 진행하고, 그걸 놓고 또 학술대회 같은 것도 하고, 이러면서 평가가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한쪽 방향으로만 결론을 내리는 식의 평가는 지양하자, 오늘 세 사림이 함께 그런 결론을 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자, 두 분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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